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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소닮다 Sep 26. 2022

18. 당신의 부재에 이름을 붙일 수 있다면.

無題


 누군가 내게 그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인생의 모든 숙제는 죽음을 통해 해결하는 것이라고.

 처음 그 말을 들었을 땐 이 문장들 중 '숙제'라는 말에 훨씬 더 많은 비중을 두었다. 누구나 살아가는 동안 각자의 숙제를 끌어안고 사는 숙명을 가지고 태어난 인간들이기에 죽음으로 모든 숙제를 끝낸다는 결과론적인 문장이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는 얼마 전 가장 사랑하는 이를 떠나보내며 다시 한번 그 문장을 부정하게 되었다. 인간의 생에 '숙제'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나는 당신의 생이 고달픈 숙제의 연속이 아니었길 바라고 또 바란다고.

 내가 살아온 시간, 33년 7개월 2일. 당신께서 살아온 시간, 85년 7개월 11일.

 당신의 생과 나의 생은 52년의 차를 두고 흘렀지만 나의 생의 모든 날들은 당신과 함께였다. 내가 태어나던 그 순간부터 당신께서 떠난 날까지 나의 모든 시간 안에는 당신과 함께하고 있었다. 내가 존재하지 않았던 당신의 시간보다 나와 함께 했던 모든 날을 더 기쁘게, 행복하게 기억하고 있는 당신의 부재 앞에 나는 꺼이꺼이 목놓아 울며 눈물로 시간을 채운다. 나는 당신의 부재 앞에 어떤 제목도. 이름도 붙일 수가 없다.


 2022년 8월 28일 오전 8시 25분, 사랑하는 나의 할아버지가 편안하게 눈을 감았다. 저혈당으로 의식을 잃은 지 16일째 되는 날이었다. 그리고 그날은 나와 할머니가 보호자 교대를 하기로 한 날이기도 했다.

 지난 7월 2일, 폐렴으로 입원을 하셨던 당시만 해도 대화를 나눌 정도의 기력은 있으셨지만 건강 상태는 썩 좋지 않았다. 한 달이 넘도록 입원을 하고 계셨지만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 노쇠한 몸, 병원에선 더 이상 손을 쓸 방법이 없어 당신께서 그토록 원하던 퇴원을 결정하던 날, 가족 모두 직감적으로 알았는지도 모르겠다. 이별이 머지않았다는 걸.

 퇴원하던 날 아침, 코로나로 인해 병원 면회도 어려운 상황이었기에 보호자도 한 명밖에 들어갈 수가 없었고 복잡한 퇴원 절차를 밟기엔 다리가 불편한 할머니보다 내가 나을 것 같았다. 9층에 도착해 병실로 들어가려는 찰나, 간호사 한 분이 내게 말을 걸어왔다.


 "OOO 환자분 보호자 되세요?"

 "네."

 

 내 대답에 나를 빤히 쳐다보던 간호사가 방긋 웃었다.


 "아~ 손녀 따님이시구나? 맞죠?"

 "네."

 "환자분께서 손녀 따님 엄청 찾으셨어요. 저희보고 우리 손녀 같다고, 우리 손녀 왜 안 오냐고 하시고. 전화도 걸어달라고 하시고."


 간호사의 목소리는 경쾌했고, 어쩐지 반가움이 묻어나는 듯했다.


 "아, 그러셨어요? 저 며칠 전에도 왔다 갔었는데."

 "안 그래도 보호자분(할머니)께서 손녀 따님이랑 영상통화도 자주 하지 않았냐고 하시는데도 우리 손녀 왜 안 오냐고, 보고 싶다고 계속 그러셨어요."


 가슴이 저릿했다. 나는 당신께 어떤 의미의 사람일까. 친척, 이웃들이 말했던 것처럼 나는 당신께 손녀가 아닌 늦둥이 막내딸 즈음일까? 그래, 그렇다고 친다 해도 오 남매나 되는 당신 자식들 다 두고 왜 나를 그렇게나 찾았을까. 그때, 문득 내가 시댁으로 들어가던 10여 년 전 그날이 떠올랐다.

 얼마 되지 않는 짐을 꾸려 주문진 시댁으로 들어가던 그날, 대문 앞에 서서 희끗한 정수리만 보인 채 옷소매로 눈물을 훔치며 펑펑 울던 나의 할아버지. '어떻게 키웠는데 이렇게 가버리냐'며 헛헛한 마음을 소리 내어 외치던 사무친 목소리. 왜 문득 그때가 생각났을까.

 저릿한 가슴을 붙들고 병실로 들어서 커튼을 조금 젖히자 수척해진 할아버지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멍하게 천장을 올려다보던 할아버지의 두 눈이 동그래지더니 이내 씩- 웃어 보이는 메마른 입. 눈물이 왈칵 차올랐다.

 동네 어귀, 조금만 걸어 나가면 있는 쓰레기장에 나갈 때에도 꼬리빗으로 머리를 매만지고 나가던 단정한 할아버지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푸석한 얼굴에 바싹 메말라버린 입가, 까끌하게 자란 수염, 푹 패인 두 눈의 노인이 덩그러니 침대에 누워있었다.

 친정 집에 들를 때마다 아이처럼 '안녕~' 하며 손을 흔들어주던 할아버지는 혈관을 찾지 못해 여러 번 주삿바늘에 찔려 멍이 잔뜩 들어있는 팔을 공중에 휘적거리며 그때와 똑같이 '안녕~' 하고 인사했다. 왈칵 눈물이 날 것 같았지만 차마 울지도 못했다.


 "안녕~"


 나도 반갑게 인사했다. 엊그제도 봤는데, 어제 영상통화도 했는데 마치 나를 아주 오랜만에 보는 듯 반갑게 인사하는 할아버지의 표정이 나를 더 애끓게 했다. 왜 이제야 왔냐는 듯 내 팔을 자꾸만 위아래로 쓰다듬을 때마다 머리가 쭈뼛설만큼 마음이 아렸고, 손녀가 당신의 기저귀를 간다는 것을 무척이나 싫어하던 할아버지가 이젠 그런 내 손길조차 거부하질 못한다는 것이 너무나 두려웠다. 마음의 준비를 해야겠다, 는 것을 머리로는 이해하면서도 막상 그 시간이 정말 얼마 남지 않았음을 직면하게 되자 뒤돌아서서 시간의 반대로 뛰어가고픈 심정이었다.

 비록 자가는 아니었지만 집에 대한 애착이 강했던 할아버지는 막상 집으로 돌아오자 집을 매우 낯설어했고 병원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이야기도 자주 했다. 할머니는 아마도 집에 정을 떼려고 하는 것 같다고 했다.

 할아버지가 완전히 의식을 잃기 바로 전 날, 나는 그날도 퇴근을 하고 종종걸음으로 친정으로 향했다. 고모부가 사다주신 말랑한 복숭아를 숟가락으로 살살 긁어 할아버지 입에 넣어드리자 마치 이제 이가 막 난 아이처럼 오물오물 드시는 모습에 나는 조금 안심했다. 목에 관을 넣어 유동식만 드시던 때에 비하면 맛을 느낄 수 있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싶었다. 비록 채 다섯 숟가락도 못 드셨지만 내일은 한 숟가락이라도 더 드실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도 들었다.

 한참 할아버지와 대화를 나누던 내가 집에 가려고 일어서자 할아버지는 아직 멍이 다 가라앉지 않은 오른팔을 들어


 "잘 가, 내일 또 봐~"


 하며 손을 흔들었다. 나도 손을 흔들며 '응, 내일 또 올게~' 하고 인사했다. 그게 할아버지와 나눈 마지막 대화가 되었다.

 할아버지는 바로 그날 밤, 의식불명 상태로 빠져들었고 돌아가시는 그날까지 단 한 번도 눈을 뜨지 못했다. 내가 어떤 말을 걸어도 듣지 못했고 이불을 모두 걷어놔도 춥다는 몸짓 한 번 하지 못하셨다. 추위를 그렇게나 많이 타는 분이 내가 물수건으로 온몸을 닦아도 어떤 반응도 하지 않았다. 손가락 한 번 움직이는 일도 없었고 마치 깊은 잠을 자듯 그렇게 나와 눈 한 번 마주치지 않았다.

 그게 마지막 인사인 줄 알았더라면, 그날이 마지막인 줄 알았더라면 더 오래 있다가 올 걸. 사랑한다고 더 많이 말하고 올 걸, 키워줘서 고마웠다고 또 한 번 안아주고 올 걸. 매일 헤어질 때마다 볼에 뽀뽀해드리는 걸 귀찮아하셨는데 그러거나 말거나 더 많이 해드리고 올 걸. 알지 못했던 마지막을 후회하고 또 후회했다.


 그날은 일요일이었고 별 다른 꿈도 꾸지 않은 날이었다. 예정대로라면 토요일 오후에 보호자 교대를 했어야 했는데 그날따라 할머니가 교대해주지 않아도 된다고, 내일 오라며 완강히 교대를 거부하셨다.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면 아마 할머니는 할아버지의 상태가 좋지 않다는 걸, 그래서 마지막은 당신께서 곁을 지키려고 그랬던 게 아닐까 싶다.

 정확히 8월 28일 아침 8시 25분, 전화벨이 울렸지만 애석하게도 나는 그 시간까지 잠에서 깨지 못하고 있었다. 전화벨이 끊기고 다시 연달아 전화벨이 울렸을 때, 아주 불길한 예감이 들어 두 눈을 번쩍 떴다. 할머니가 아닌 셋째 삼촌의 전화였다. 눈은 떴으나 완전히 잠겨버린 목소리로 '여보세요'라고 하자 삼촌은 '잤냐'는 물음부터 먼저 꺼냈다.


 "응."


 불길한 예감이 들긴 했으나 '잤냐'는 일상적인 물음에 조금 안심했던 나는 다음 말에 눈물부터 주르륵 쏟아냈다.


 "할아버지 돌아가셨어. (잠깐의 침묵) 얼른 준비해서 와."


 어떻게 준비를 했는지, 무슨 준비를 하긴 한 건지 정확하게 기억나진 않지만 그것만은 분명하게 기억한다. 가장 사랑하는 사람 중 한 사람을 잃었고, 나는 그 공허한 마음을 또 다른 사랑하는 사람에게 기대고 있다는 것.


 "자기야!! 자기야!!"


 다른 방에서 자고 있던 남편을 절규하듯 불렀고, 남편은 내게 달려와 펑펑 울고 있는 나를 끌어안았다. 나와 가장 가까운, 내 가족을 처음으로 잃어본 날이었다.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는 표현보다는 나의 몸 중 어느 한 곳이 뻥 뚫린 것 같았다는 표현이 더 나을 듯했다. 이제 겨우 한 달이 지났을 뿐인데 아주 오래전 일인 듯 싶다가도 막상 할아버지의 묘에 가보면 어제 일인 것처럼, 아니 실감이 나지 않을 때도 있었다.

 꼬리빗으로 곱게 머리를 빗어 넘기고 칼주름 잡힌 바지와 깨끗하게 먼지 털어 걸어놓은 외투를 걸치고 머리에 반 밖에 걸치지 않은 모자, 때 하나 묻지 않은 얼룩무늬 운동화.

 배달시켜 먹고 남은 포장 용기를 전부 가져와 세제로 깨끗하게 기름기 닦아 햇볕에 말려 분리수거하고 고기 구워 먹을 때 주위에 깔아 뒀던 신문지들 전부 걷어 또 햇볕에 기름기 말려놓고 차곡차곡 쌓아 착착 접어둔 라면 봉지들과 함께 노끈으로 묶던 모습.

 벚꽃 지는 봄, 낙엽 떨어지는 가을이면 하루에 세 번이고 네 번이고 나가 마당을 쓸고 먹다 남은 치킨 곱게 담아 집 뒤편 고양이들 먹으라고 내놓았다가 고양이들이 다 먹고 떠난 자리 깨끗하게 쓸고 물까지 뿌려 청소하던 모습, 가을이면 감 따다 껍질 벗겨 곶감 틀에 꽂아 밖에 걸어두던 모습까지.

 당신께서 살아온 생은 모두 그런 삶이었다. 어느 하나 비뚤어진 것 없이, 어느 한 군데 지저분 한 곳 없이 깨끗하게 펼쳐져있던 삶. 비록 가난했고 당신의 삶 절반이 병들어 고통스러웠던 삶이었지만 그래도 당신을 기억하는 내가, 그리고 또 다른 가족 중 누구라도 당신의 생이 구겨져있지 않고 늘 당신께서 해오신 만큼 반듯한 삶으로 기억된다면 나는 당신의 생이 그리 누추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가난을 걸친 삶은 누추하다고 말한다. 팔십 평생을 벗지 못한 옷이지만 당신께서 가시는 길은 당신께서 쓸어 담은 낙엽만큼 깨끗하고 곧은길이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나를 그렇게나 애틋해 마지않던 할아버지는 한 달 동안 내 꿈에 두 번이나 나타나 인사를 건네주셨다. 한 번은 할머니 집에서, 또 한 번은 우리 집에서. 처음 꿈에선 가만히 앉아 밤을 까 드시고 계셨고 두 번째 꿈에선 말쑥한 양복차림으로 나를 한참이나 빤히 바라보다 "내 위해 울어준 게 고마워서." 하며 엷은 미소를 띠곤 연기처럼 사라져 버렸다. 그리고 할아버지가 사라진 그 자리에 천사 날개 모양을 한 은반지 하나가 덩그러니 놓여있었다. 그 어느 손가락에도 맞지 않던 반지가 왼쪽 새끼손가락에만 꼭 맞았고 그 반지를 끼우자마자 꿈에서 깨어났다. 그리곤 한동안 누운 자리에서 꺼이꺼이 눈물을 쏟아냈다.

 매주 주말이면 '야가(얘가) 오늘은 안 오나' 하며 나를 기다리던 나의 할아버지는 이제 더 이상 나를 기다리지 않는다. 늘 비질을 하던 마당에는 할아버지 대신 아빠가 나와있고 분리수거도 이젠 아빠의 몫이 되었다. 전국 노래자랑을 보며 옥수수를 드시던 할머니의 곁은 빈자리가 되었고, 할아버지의 휴대폰 번호는 이제 없는 번호가 되었다.

 한 평도 되지 않는 할아버지의 묘 위에는 조금씩 잔디가 자라나고 있고 손바닥만 한 비석 위에는 할아버지의 생(生)과 졸(卒)이 작게 쓰여있다. 묘에는 잡숫지 않던 술 대신 한 김 식힌 믹스커피를 한 잔씩 부어드리고 그 앞에 쪼그려 앉아 한참을 말없이 바라만 보다 돌아오곤 한다.

 완전히 잊진 못하겠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조금씩 눈물을 멈추고 좋았던 모습들을 더 많이 기억해야 한다는 남편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가족을 더 먼저 떠나보냈던 남편은 겪어보지 못해 자신의 마음을 더 많이 헤아려주지 못했던 내게 가장 든든한 위로가 되어주었다. 1년쯤 지나야 온전히 받아들일 수 있을 거라고, 그러니 가고 싶을 땐 언제든 가서 그리워하라고, 하지만 이제 마음 편하게 가실 수 있도록 그만 울어야 한다고 말해주는 사람도 남편이었다.


 당신께 어떤 의미였는지 모르겠지만 나 또한 당신께서 그러하셨듯 깊은 애틋함으로 당신의 마지막을 볼 수 있었어서, 그토록 편안한 모습의 당신을 볼 수 있어서 아주 행복했노라고 전하고 싶었다.

 어떤 말을 꺼내기도 전에 이미 목울대까지 차오르는 그리움이 내 말문을 막더라도 서운해하지 마시라고, 나는 당신께서 바라는 대로 행복하고 멋지게 잘 살 거라고 꼭 전하고 싶다.

 나는 차마 이 깊이 모를 그리움에, 당신의 부재에 이름을 붙일 수 없지만 먼 훗날 이름을 붙이게 된다면 그건 아마도 당신을 만난 후이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그때까지 부디.

 안녕, 우리 또 봐 할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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