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류

길을 잃었다.

by 오경수


오랜만에 글을 쓴다. 개강하면서 많이 바빠서 사색에 빠질 시간도 없고, 글을 쓸 시간도 없었다. 내가 전에 언급한 코페르니쿠스적 전회의 결과는 만족한다. 나는 ‘이데아’라는 파롤(Parole)을 오프라인에서 본 적이 딱 한번 있다. 그 경우는 아는 교수님께 오랜만에 찾아뵈어 말씀을 듣던 중에 있었다. 항상 책을 통해 활자로만 접하던 이데아라는 개념을 내 귀로 직접 들으니 엄청난 지적 쾌감이 느껴졌다. 이데아라는 전문적인 개념을 들어서 그랬던 것 일까? 아니면 나 말고 다른 사람이 나와 같은 지식을 가지고 있다는 것에 쾌감을 느꼈을까? 그 후로 그 교수님께는 자주 연락드리고 찾아뵙고 철학적으로 정말 큰 도움을 받았다. 일개 공돌이인 내가 과연 인문학 박사님과 인문학에 대해 논할 수 있는 기회를 얻은 것은 정말 천운이었던 것 같다.


요즘은 내가 그토록 듣고 싶어 하던 이데아라는 단어를 이제는 거의 매일 듣는다. 전기공학과에서는 저항, 전압, 전류와 같은 단어들이 강의를 주로 채웠다면, 철학과에서는 이데아, 에피스테메, 공리주의와 같은 개념들로 강의를 채웠다. 그래서 수업시간에 집중을 하지 않을 수가 없다. 내가 아는 지식을 교수님께서 언급하시지 않을까 하는 나르시시즘적인 기대감이 나를 딴짓하지 못하게 만든다. 그동안 내가 매일 혼자 공부하고 생각하던 개념들을 수업으로 들으니 그전에 느꼈던 인문학적 외로움을 느낄 수 없었다. 복수전공을 신청하기를 정말 잘한 것 같다.


수업에는 만족도가 매우 높았으나 학교 공부에 집중하다 보니 글쓰기에 소홀해졌다. 아직 개강한 지 2주밖에 되지 않았지만, 나는 그 어느 때보다 열심히 공부하고 있다. 거의 모든 강의를 예습과 복습을 한다. 특히 내가 제일 좋아하는 과목인 서양철학사는 주말에도 공부하고 있다. 버트런드 러셀의 ‘서양철학사’를 정독하며 공부하는데 빨리 이 책을 정복하고 싶다. 그래야 시간이 좀 생겨서 생각도 하고 글도 예전처럼 쓸 텐데.


하지만 코로나에 감염되면서 이 리듬이 깨졌다. 호기심에 해본 자가진단키트에서 양성이 뜰 줄은 난 전혀 몰랐다. PCR도 마찬가지로 양성이 떠서 일주일 동안 격리를 했다. 본 전공이었다면 학교 안 간다고 좋아했을 텐데, 이번에는 강의를 듣고 싶어 미치는 줄 알았다. 그래서 집에서 러셀의 책을 꽤 많이 읽게 되었다. 어제부터 격리가 해제되어 도서관에 가서 다른 책들도 빌려보고 영감을 받고자 했는데, 후유증 때문인지 이유 없이 너무 피곤하다. 격리할 때는 증상이 감기보다 경미했다. 그런데 오랜만에 학교를 가서 그런지 적응이 안 되고 너무 피곤했다. 이 글을 쓰는 지금 나는 공부할 체력도 없고, 글을 쓸 소재 또한 없다. 테세우스가 크레타섬의 미궁에서 헤매는 것처럼 나도 지금 철학이라는 넓은 바다에서 헤매는 것 같다. 그에게 아리아드네의 실이 있었던 것처럼, 나에게도 이 미궁을 헤쳐나갈 무언가가 있음은 분명하다. 그것이 브런치 일지, 집에 있는 책일지, 학교 강의인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그것이 존재함은 분명하다. 빨리 미노타우로스를 때려잡고 이 미궁에서 벗어나고 싶다.

엘시티에서 본 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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