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법은 없지만 이벤트는 있다

어른의 돈으로 산 어린 날의 꿈

by 조새늘

해리포터 덕후였던 나는 학창 시절 내내 마음속에 되뇌었던 다짐이 있었다. “언젠가 호그와트와 호그스미드에 놀러 가서 버터맥주를 홀짝이겠어.” 이 비밀스러운 맹세는 현실에 지친 내가 스스로에게 주던 위안이자 가장 순수한 꿈이었다. 나는 주변 친구들 중에서 가장 먼저 ‘해리포터덕질’에 몸을 던져버린 얼리어답터였다. 아마 우리 초등학교에서 최초로 해리포터를 읽은 사람이 아닐까 싶다. 때문에 어린 마음에 묘한 우월감과 자부심마저 가지고 있었었다. 책 표지가 닳고 해질 때까지 해리포터 책을 끼고 살았고, 심지어 영어 원문의 질감을 직접 느껴보고 싶다는 일념으로 해리포터 원서 독해에도 도전했었다. 물론 결과는 참담했다. 문장보다는 단어 하나하나와 씨름하다가 결국 백기를 들고 말았다. 그래도 그 처절한 도전의 기억마저 내게는 일종의 배지처럼 남아 있다. “나 이 정도로 해리포터를 사랑했었다”라고 증명해 주는 훈장 말이다.


그러다 영화가 개봉하자 나는 그 세계에 더욱 깊이 빠져들었다. 활자로만 존재하던 호그와트의 풍경이 거대한 스크린 위에 펼쳐지는 순간, 마치 내가 그 세계 안으로 걸어 들어간 듯한 전율이 밀려왔다. 둥둥 떠다니는 촛불 아래 끝없이 펼쳐진 연회 테이블, 천장에 비친 별빛… 꿈꾸던 장면이 현실이 되는 경이로운 순간에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그 뒤로 영화를 몇 번이나 돌려봤는지 셀 수도 없다. 매번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마음속의 나는 어김없이 호그와트 교복 차림이었다.


열네 살 무렵 친구가 해리포터 촬영지인 옥스퍼드 크라이트처치에 다녀왔다고 사진을 보여주며 엄청나게 자랑을 했었다. 부러움에 못 이긴 나는 부모님께 “제발 영국에만 보내주시면 공부도 두 배로 열심히 하겠다”라고 읍소했지만 돌아온 대답은 단호했다. “안 돼.” 마법처럼 영국행 티켓이 생길 리는 없었다. 유럽 여행은 내게 아득한 판타지에 가까웠다. 때문에 나는 책 속의 호그와트를 더 깊이 들여다보며 대신 그곳을 여행했다. 그러나 현실은 언제나 페이지 바깥에 있었고, 그 세계를 향한 동경도, 해리포터를 향한 사랑도 점점 마음속 어딘가로 천천히 가라앉았다. 그렇게 꿈은 서서히, 그리고 조용히 잊히기 시작했다.


그렇게 잊고 지낸 지 이십 년쯤 지난 어느 날, 우연히 반가운 소식을 들었다. 스타벅스에서 ‘해피 버스데이 해리’ 케이크를 출시한다는 것이었다. 해그리드가 해리의 열한 번째 생일에 직접 구워준, 그 핑크빛 생크림 케이크를 그대로 재현한 제품이라 했다. 그 사진을 보는 순간, 오래 전의 장면이 번쩍 떠올랐다. 허름한 오두막, 커다란 해그리드와 해리의 놀란 얼굴까지 마치 내 안에 봉인되어 있던 기억이 한꺼번에 풀려나오는 듯했다. 망설임 없이 곧장 매장으로 달려갔다.


매장 진열대에는 핑크색 초콜릿과 크림치즈로 코팅된 케이크가 놓여 있었다. 케이크 윗면에 초록색 아이싱으로 휘갈겨 쓴 듯한 삐뚤삐뚤한 글씨체의 “HAPPEE BIRTHDAE HARRY”를 실제로 마주하는 순간 왠지 모르게 벅찬 감정이 느껴졌다. 조심스레 포크로 한 조각 떼어 입에 넣었다. 층층이 쌓인 꾸덕한 다크 브라운 초코 파운드케이크 시트 사이로 달콤한 딸기잼이 발라져 있었다. 진한 초콜릿 향과 새콤한 딸기잼 풍미가 입안에서 맞부딪혀 훌륭한 하모니를 이뤘다. 블로그 후기들에서 누군가는 이 조합을 ‘꾸덕+상큼+부드러움’이라는 삼위일체로 표현했는데, 과연 딱 들어맞는 묘사였다. 나는 케이크를 조금씩 음미하며 휴대폰으로 해그리드가 해리의 11번째 생일을 축하해 주는 영화 속 장면을 찾아 틀어놓았다. 현실의 케이크와 스크린 속 케이크가 겹쳐지자 마치 내가 그 축하를 직접 받는 듯한 감동이 밀려왔다.


그런데 그날 집으로 돌아오는 길, 유튜브 알고리즘이 내 운명을 뒤흔드는 영상을 하나 추천해 주었다. 다름 아닌 일본 오사카의 유니버설 스튜디오 재팬(USJ)에 해리포터 테마파크가 있다는 내용이었다. 화면 속에는 실제 크기의 호그와트 성과 호그스미드 마을이 펼쳐져 있었고, 그곳에서 사람들이 호그와트 교복을 입고 버터맥주를 마시고 있었다. “뭐? 일본에 호그와트가 있다고?” 나는 휴대폰 화면을 붙들고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오사카에 유니버설 스튜디오가 있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지만, 거기에 해리포터의 세계가 통째로 들어서 있을 거라곤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게다가 영상 속 상점들에선 내가 그토록 갈망하던 버터맥주와 개구리 초콜릿, 버티보트의 ‘온갖 맛이 나는 강낭콩 젤리’까지 실제 상품으로 팔고 있는 게 아닌가? 심장이 쿵쿵 뛰기 시작했다. 아련하게 마음속에 가라앉아 있었던 호그와트에 대한 동경이 다시금 피어올랐다. 영국은 너무 멀지만 일본은 가 볼 만하지 않은가. 내 눈으로 진짜 호그와트를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온몸에 전율이 일었다.


나는 그 길로 집에 도착하자마자 항공권부터 검색했다. 목요일 저녁에 출발해 일요일 아침에 돌아오는 빠듯한 일정으로 찾아보니 왕복 항공권 가격이 고작 13만 원도 되지 않았다. 순간 머릿속에 그럴듯한 변명이 스쳤다. “이번 여행, 어린 시절의 나에게 주는 선물이라고 생각하자.” 그렇게 통장 잔고 걱정도 잠시, 나는 곧장 결제 버튼을 눌렀다. 그 이후로 비행기 티켓을 손에 넣고 숙소와 유니버설 스튜디오티켓을 결제하는 데까지 망설임이 없었다. 실제 호그와트를 보기 위해서라면 그 정도 지출은 무리로 느껴지지 않았었다.


하지만 여행에는 늘 예기치 못한 복병이 숨어 있는 법. 출발 당일 새벽 1시 무렵 숙소 예약 확인서를 인쇄하다가 나는 눈을 의심했다. 예약된 투숙객 이름란에 영문으로 떡하니 “Gagaga” 즉 “가가가”라고 적혀 있었던 것이다. 순간 등줄기를 식은땀이 훑고 지나갔다. “이거... 괜찮은 걸까?” 예약자 이름과 실제 투숙객 이름이 다르면 호텔에서 체크인을 거부당할 수 있다는 이야기 기를 언듯 들은 것 같은 기억이 났다. 황급히 인터넷을 뒤져보니 우려는 현실이었다. 이름 철자만 조금 달라져도 입실 거부를 당했다는 후기가 여럿 보였다. 그런데 나처럼 아예 엉뚱한 이름으로 예약된 경우는 찾기도 힘들었다.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나는 아고다(Agoda) 사이트에 구글 계정으로 로그인을 했었는데, 구글 프로필 이름이 그대로 예약자 이름에 반영된 것 같았다. “구글 계정으로 아고다 로그인한 사람이 나밖에 없나? 다들 구글 프로필을 본명으로 한다고? 아니, 고쳐 놓지 않은 내 잘못인가?” 별별 의문과 자책이 밀려들었다. 문제는 이미 시각이 새벽 2시를 넘어가고 있다는 것이었다. 발등에 불이 떨어진 채 아고다 고객센터에 전화를 걸고 채팅 상담에 매달려 봤지만, 돌아오는 답변은 “예약자 이름 변경은 불가능하다”라는 판에 박힌 답변뿐이었다. 답답한 마음에 혹시나 하는 심정으로 직접 호텔 측에 이메일을 보내보기로 했다. 영어로 쓴 메일에 혹시 몰라 일본어 번역문까지 덧붙였다.


초조함을 달랠 길 없어 운세에 손을 내밀었다. 포털 사이트 네이버의 오늘의 운세를 보니 총운이 한마디로 ‘요령부득’, 딱히 방법이 없다는 흉흉한 내용이었다. “오늘 당신은 언행을 조심해야 합니다. 사소한 말과 행동으로 오해가 생길 수 있는 날입니다. 쉽게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은 삼가세요. 확신이 생겼을 경우에만 행동으로 옮기시기 바랍니다.” 이런 애매모호한 경고들이 가득했다. 읽으면 읽을수록 불안감이 배가될 뿐이었다.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 이번에는 스마트폰 운세 앱 ‘점신’을 열어 보았다. 놀랍게도 정반대의 말이 적혀 있었다. “횡재수를 기대해도 좋은 하루입니다. 뜻밖의 행운으로 아침부터 기분이 상승할 것입니다. 오후에는 예상치 못한 이익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 아까와는 180도 다른 희망적인 예언들에 나도 모르게 긴장이 풀렸다. “그래, 잘될 거야. 분명 잘될 거야…” 근거 없지만 간절한 자기 암시를 걸고, 다른 가성비 호텔을 찾으며 예약한 호텔의 답신을 기다렸다. 당일이라 남은 호텔이 많이 없었고 가격도 훨씬 더 비쌌다. “망했네. 망했어. 나 어떡하지?” 하면서 울먹이고 있는데 새벽 3시경에 마침내 호텔로부터 이메일이 도착했다. 내용은 오직 일본어뿐이었다. 심장이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혹시 나쁜 소식이면 어쩌지? 떨리는 손으로 내용을 복사해 번역기 앱에 붙여 넣었다. “제발… 제발… 나 돈 없단 말이에요…” 혼잣말로 주문을 외우듯 중얼거렸다. 잠시 후 번역 결과가 눈앞에 나타났다. “이름을 변경했습니다. 체크인 시 여권을 제시해 주시면 됩니다.” 그 문장을 확인하자 결국 “살았다!” 싶어 온몸의 긴장이 풀렸다. 새벽 공기를 깨울 뻔한 함성을 겨우 삼키고, 나는 즉시 그 답장을 출력한 뒤 다음날 입을 바지 주머니 깊숙이 접어 넣어 두었다. 다음날 회사에 출근해서도 그 종이를 절대 빼지 않았다. 현지 도착 후 호텔 체크인은 허무할 만큼 간단했다. 여권만 내밀자 곧바로 카드를 건네주는 것이 아닌가. 그제야 비로소 실감이 났다. 드디어 내일이면, 꿈에 그리던 호그와트와 버터맥주를 만나는구나!


다음 날 아침, 이른 시각부터 서둘러 유니버설 스튜디오로 향했다. 입구에 다다르자 거대한 지구본 로고 조형물이 천천히 회전하며 방문객들을 맞이했다. 이미 이 순간 내 심장은 반쯤 호그와트 성에 도착해 있었다. 긴 입장 대기줄 속에서 등줄기를 타고 흐르는 땀도, 머리 위로 작열하는 햇볕도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렇게 얼마나 기다렸을까. 드디어 눈앞에 호그스미드 마을과 저 멀리 우뚝 솟은 호그와트 성이 모습을 드러냈다. 마치 영화 속 장면이 현실로 튀어나온 듯한 광경에 사진 찍는 것을 멈출 수 없었다.


직원 한 분이 나를 보자 반가운 듯 외쳤다.

“예! 슬리데린!”

처음에는 무슨 말인가 했지만, 곧 그 의미를 깨닫고 큰 웃음이 터졌다. 그날 나는 별생각 없이 초록색 티셔츠를 입고 갔었는데, 호그와트의 4개 기숙사 중 하나인 슬리데린의 상징 색은 초록색이다. 옆에 있던 다른 직원도 주먹을 불끈 쥐며 “위 아 슬리데린(We are Slytherin)!”이라고 거들었다. 나도 장단을 맞추며 손을 번쩍 들고 “예! 위 아 팀 슬리데린!”하고 화답했다. 평생 내 마음속 넘버원 기숙사는 그리핀도르라 믿어 의심치 않았지만, 그 순간만큼 기숙사는 상관없이 분위기를 즐기고 싶었다. 그렇게 난 그날 하루 당당한 슬리데린의 학생이 되었다.


호그와트 성 앞 야외무대에선 마침 작은 공연이 열리고 있었다. 이름하여 ‘히포그리프 매지컬 레슨’. 마법사로 분장한 배우들이 무대 위에서 관객을 향해 “참여하고 싶은 사람?”을 외치며 손을 흔들었다. 나는 망설임 없이 한 손을 높이 치켜들었다. 그러나 그 기회는 옆에 있던 여자아이에게 돌아갔다. 잠시 아쉬움이 밀려왔지만 이내 스스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호그와트는 어디까지나 어린 마법사들의 학교니까. 무대에 오르는 영광은 아이에게 양보하는 편이 맞았다. 덕후라면 이 정도 미덕은 발휘해야 하지 않을까 하고 혼자 피식 웃음도 지어 보였다.


그리고 “해리 포터 앤드 더 포비든 저니(Harry Potter and the Forbidden Journey)” 어트랙션. 이건 평생 잊지 못할 경험으로 남아있다. 호그와트 내부를 본뜬 어두운 대기 공간에는 어린아이 키만큼 큰 초상화들이 줄지어 걸려 있었는데, 하나같이 살아 움직이며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덤블도어 교장실 세트장도 정교하게 꾸며져 있어 기다리는 순간마저 황홀했다. 빗자루를 타고 날아다닌다는 콘셉트로 만들어진 이 어트랙션은 4D와 실제가 교차로 나오는데 몰입감이 최고라는 후기가 정말 많았다. 진짜 빗자루를 타고나는 것 같은 기분을 선사한다고 했다. 평소 고소공포증이 심했던 나는 살짝 걱정했지만 후기들이 하나같이 전혀 무섭지 않다고 쓰여 있어 편안한 마음으로 도전했다. 그런데 출발과 함께 의자가 허공에서 휙 뒤로 젖혀지는 게 아닌가. “악! 무서워!” 그 뒤로 해리의 뒤를 따라 하늘 이곳저곳을 나는데 너무 무서워 눈을 뜰 수가 없었다. 그런데 눈을 꽉 감자니 '여기까지 왔는데 이걸 안 본다고? 놓친다고?' 하는 아쉬움이 밀려와 눈을 떴다가 다시 무서워서 감기를 반복했다. 말 그래로 진퇴양난이었다. 그래도 놀이기구를 타는 게 아니라 마법 빗자루를 타고 해리를 따라 마법 세계를 폭주한다는 기분은 확실했다. 천둥 같은 효과음과 함께 수많은 위협이 지나가고, 마침내 해리와 덤블도어가 손을 흔들며 인사해 주는 장면이 눈앞에 펼쳐졌다. 온몸이 굳어 있던 나는 그제야 겨우 몸에 힘을 풀면서, 눈가에 맺힌 뜨거운 눈물을 살짝 훔쳤다. 무서움의 눈물이 아니라 벅차오름의 눈물일 거라고 믿고 싶다.


그 짜릿한 여운을 간직한 채 성 밖으로 나오니, 나의 오랜 바람 중 하나였던 버터맥주가 기다리고 있었다. 유니버설 스튜디오에서 판매하는 버터맥주는 이름은 맥주지만 실제로는 알코올 없는 달콤한 크림소다 음료다. 차갑게 제공되는 버터맥주를 한 모금 머금자 입안 가득 탄산의 상쾌함과 버터스카치의 진한 단맛의 풍미가 퍼졌다. 혀끝을 간질이는 거품 위에는 마치 버터를 한 스푼 얹은 듯한 고소함이 감돌았다. 원작 소설 속에서 주인공 일행은 따뜻한 버터맥주를 자주 마셨다고 나오지만, 유니버설 스튜디오에서 파는 버터맥주는 시원한 맛 밖에는 판매하지 않는 듯했다. 내 머릿속에는 해리가 버터맥주를 처음 마신 후 중얼거렸던 감탄사가 자동 재생되었다. “이렇게 맛있는 건 생전 처음이야... 마치 속까지 따뜻해지는 느낌이야.” 현실과 원작의 기억이 뒤섞여, 입은 차갑지만 내 가슴속은 달콤하고 포근하게 데워지는 것 같다는 기분이 들었다.


버터맥주로 도파민을 올린 나는 곧장 옆의 허니듀크 상점 안으로 뛰어들었다. 예전부터 이름만 들어도 호기심을 자극하던 마법 세계의 간식들을 실제로 맛볼 기회가 마침내 찾아온 것이다. 나는 바로 ‘버티보트의 모든 맛이 나는 강낭콩젤리’와 ‘개구리 초콜릿’ 상자를 집어 들었다. 계산대 직원이 합계를 알려주는데 무려 3,500엔이었다. 한국 돈으로 3만 원이 훌쩍 넘는 금액. 평소라면 과자 2개에 3만 원이라면 눈이 휘둥그레져 고개를 절레절레 저을 가격이었지만 이상하게도 그 순간에는 전혀 아깝지 않았다. 여행 전 마음속으로 이미 변명을 준비해 두었기 때문이다. “이번 한 번쯤은 사치해도 돼. 이건 어린 시절의 나에게 보내는 선물이니까.” 이 강력한 자기 합리화 앞에서는 어떤 지출도 도리어 뿌듯하기만 했다. 그리곤 해리포터 에어리어를 벗어나 다른 어트랙션들도 실컷 즐겼다. 그렇게 동심과 향수에 흠뻑 젖은 채 숙소로 돌아왔을 때는 온몸이 노곤했지만, 신기하게도 피곤함보다 기대감이 앞섰다. 이제 남은 궁극의 이벤트는 직접 사 온 간식을 먹어보는 일. 나는 샤워도 뒤로 미룬 채 침대에 걸터앉아 허겁지겁 젤리와 초콜릿 상자를 풀기 시작했다.


먼저 강낭콩젤리부터 개봉했다. 뾰족한 탑 형태의 패키지를 망가뜨리지 않으려고 윗면이 아니라 밑바닥 부분을 조심스레 벌렸다. 그러자 곧바로 20여 가지 맛 이름이 적힌 설명서가 나왔다. 문제는 그 설명서가 전부 일본어였다는 사실이다. 고요한 호텔방에서 ‘구글 렌즈’ 앱을 켜고 하나하나 번역을 시도했다. 그런데 나온 결과가 심상치 않았다. ‘코 씨발맛, 바나나맛, 지렁이맛, 귀아카미, 푸른 사과맛, 마시멜로맛, 검은 후추맛, 게로맛, 썩은 달걀맛, 비누맛, 블루베리맛, 소시지맛, 레몬사탕맛, 계피맛, 면과자맛, 잔디맛, 수박맛, 소박한 맛, 설탕절임 풍미맛, 체리맛’... 분명 20가지의 목록인데 번역은 군데군데 이해 불가한 단어투성이었다. “코 씨발맛”이라니, 설마 코딱지 맛을 이렇게 잘못 옮긴 걸까? “귀아카미”는 귀지 맛을 말하는 걸까? “소박한 맛”이라는 건 도대체 뭘 뜻하는지 짐작조차 가지 않았다. 알듯 말듯한 기묘한 번역어들을 한참 들여다보다가 나는 마음을 굳게 먹고 러시안룰렛처럼 젤리를 하나씩 집어먹기 시작했다. 과연 이 젤리들의 실제 맛은 어떨까?


일단 짐작했던 대로 코딱지 맛 젤리에서는 살짝 쉰내 같기도 한 꿉꿉한 풍미가 느껴졌다. 그렇다고 먹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이어서 귀지 맛, 썩은 달걀 맛, 레몬 드롭 맛을 차례로 시도했는데, 문제는 세 가지 맛의 색깔이 전부 비슷한 누르스름한 톤이라 뭐가 뭔지 구별이 잘 안 된다는 것이었다. 결국 ‘언젠간 레몬맛이 나오겠지’하는 심정으로 노란 젤리들을 연거푸 씹어 먹었는데, 입 안에서는 단맛과 쓴맛이 뒤죽박죽 엉키고, 최종적으로는 형언하기 어려운 구린내만 남았다. 검은 후추 맛은 살짝 얼얼한 매운기가 코 끝까지 훅 치솟았다. 비누 맛을 먹었을 땐 '내가 정말 먹을 수 없는 걸 먹고 있구나'라는 반성을 강제로 안겨주었다. 그러나 간간이 수박 맛, 블루베리 맛, 체리 맛 같은 평범한 과일젤리가 나타날 때면 그 기쁨이 두 배로 크게 다가왔다. 마치 디멘터를 만났다가 초콜릿을 한입 베어무는 순간 같은 안도의 달콤함이랄까. 기겁할 맛들을 잇달아 겪으면서도 즐거웠던 건, 무엇보다 지금 내 눈앞에 펼쳐진 이 말도 안 되는 미각의 향연이 바로 해리포터 책 속에 나오는 ‘그 젤리’와 똑같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그다음은 대망의 개구리 초콜릿 차례. 파란색과 금색으로 디자인된 오각형 상자를 열자 손바닥을 가득 덮을 만큼 커다란 초콜릿 개구리가 한 마리 나타났다. 크기가 너무 커 반으로 부러뜨려보려 했지만 꿈쩍도 하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포장을 벗긴 채 개구리 뒷다리를 크게 한 입 앙 베어 물었다. 밀크 초콜릿 특유의 부드럽고 풍부한 단맛이 입안을 가득 채우자, 앞서 먹은 괴상한 젤리들의 남은 맛이 말끔히 지워졌다. 디저트는 역시 달달한 게 최고지! 개구리 초콜릿을 말하자면, 동봉된 인물 카드도 빼놓을 수 없다. 나는 혹시 덤블도어 같은 친숙한 얼굴이 나오지 않을까 기대했지만, 내가 갖게 된 건 호그와트 4대 창립자 중 한 명인 고드릭 그리핀도르의 카드였다. 낮에는 슬리데린 학생으로 지냈지만, 개구리초콜릿만큼은 나를 다시 그리핀도르 편으로 이끌어주었다. “역시 난 팀 그리핀도르가 어울려.”


한국으로 돌아온 이후에도 그날의 흥분은 쉽사리 가라앉지 않았다. 짐을 풀기도 전에, 구입한 해리포터기념 컵에 편의점 맥주를 따라 버터맥주 흉내를 내보았다. 그리고는 TV 화면으로 해리와 론이 처음 만난 호그와트행 급행열차 장면을 다시 찾아 틀었다. 그리고 해리가 트롤리에서 산 각종 마법 과자를 론과 나눠 먹던 장면에 이르렀다. TV화면에 나온 간식들과 내 손에 들린 간식들이 완전히 겹쳐지는 순간, 오래전부터 꿈꿔왔던 장면이 실제 내 현실 속에서 이루어졌다는 사실에 울컥하고 말았다. 돈을 번다는 건 단순히 생활비를 충당하는 일이 아니었다. 더 중요한 건, 그렇게 번 돈으로 내 취향과 꿈을 실현할 자유를 사는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나는 앞으로도 내가 번 돈으로 또 다른 ‘호그와트’를 찾아 나서고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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