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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아닌 이름 11장

기억 저편의 동생

by 아티크 Artique


제11장.기억 저편의 미순


며칠 후, 동방보육센터에서 에밀리에게 연락이 왔다.

“며칠 전 말씀하신 강미순 씨에 대한 서류 중 일부 기록이 남아 있었습니다. 서울로 갔고 한국사회복지회에서 데려갔어요


에밀리는 미영과 함께 다시 센터를 찾았다.

이번엔 부원장이 직접 손에 든 폴더를 펼쳤다.


“당시 미순이는… 1973년생.

입소 사유는 ‘모가 두 자녀를 경제적 사정으로 위탁 보호’.

입소일은 1976년 4월. 그리고 퇴소일은 1977년 6월.

한국 사회복지회에서 데려갔어. 그곳에 가보면 어디로 입양 갔는지 등을 알 수 있을 거야”

서울로 올라온 에밀리는 미영과 함께 한국 사회복지회를 찾았다. 한국 사회 복지회는 60년대부터 90년대까지 많은 아이들을 해외로 입양 보낸 기간이었다.

그런데 부모가 아닌 형제를 찾는 작업을 복지회에서 도와줄 수 없다고 했다. 개인 정보 보호법에 의해 부모의 개인정보 공개 요청이 있을 때에만 형제의 정보를 공개할 수 있으므로 먼저 부모의 개인정보 공개 동의서를 받아오라고 했다. 에밀리는 이 상황이 이해가 가지 않고 답답했다

미영이 천천히 통역했다.

"저와 미순의 엄마는 지금 어디 있는지 몰라요. 엄마는 1976년에 부산 동방 고아원의 저희를 맡겨두고 갔어요. 저희가 해외 입양을 가면서 엄마와 연락이 완전히 끊겼어요. 엄마도 찾고 싶어요. 미순이 입양 간게 분명하다면 어디로 갔는지 그 미국 부모님 성함을 알 수 있을까요?"


사회복지사는 미안하다며 고개를 저었다.

복지회를 나와 미영과 에밀리는 어디로 가면 좋을지 의논했다. 남북한 이산가족 찾기를 떠올리며 미영은 방송의 도움을 받자고 했다.

자기일처럼 도와주는 미영이 고마왔다.


미영은 사촌 언니가 방송작가이고 방송국에서 일한다고 했다. 언니와 전화를 해보겠다며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미영은 한참 통화를 하더니 에밀리를 향해 손으로 오키아크 사인을 보냈다. 뭔가 해결이 된 느낌이다.


언니가 하는 아침방송에 에밀리의 이야기를 내보내주겠다고 했다. 아직 방송 일정이 꽉 차있어 당장은 어렵겠지만 일단 기다려 보라고 했다.


방송국에 출연을 부탁해두었지만 돌아온 대답은 “조금 기다려달라”는 말뿐이었다.
미영의 사촌언니가 내부 작가에게 부탁까지 했지만,
미혼모, 입양, 해외동포 이슈가 좀 무겁다며 '때'를 기다리자는 대답이었다.

“요즘엔 연예인 스캔들 특집이나 리얼 가족극이 많아서…”
라는 말을 듣고 나오던 순간,
에밀리는 잠시 어지러움을 느꼈다.

기다리는 건 익숙했지만, 이제는 조바심이 앞섰다.

“어디 잠깐 바람이나 쐬고 갈래요?”
미영이 가방을 들어올리며 말했다.

“신촌에 괜찮은 찻집이 있어요.
학교 근처인데, 요즘 벚꽃도 피고 날씨도 좋아요.”

신촌 거리, 1995년 봄

2호선 신촌역을 나와 이대 쪽 언덕길을 지나면
하얀 벽에 꽃무늬 커튼이 걸린 찻집과,
LP판 음악이 흐르는 커피숍들이 늘어서 있었다.

오후 3시, 햇살은 강했지만 바람은 이제 가을이 온다는 걸 알려주고 있었다. .
거리엔 통기타를 메고 다니는 대학생들,

미영이 안내한 곳은 작은 언덕 위, 이름 없는 다방이었다.

연보랏빛 커튼 사이로 들어선 그곳엔
검은색 전화기, 라탄 소파, 그리고 작은 화병이 놓여 있었다.

“에밀리 씨, 이럴 때일수록 너무 몰아붙이지 마세요.”
미영이 말했다.
“어머니가 새가정을 시작했다면…나타나시기가 쉽지 않을것 같아요.”

에밀리는 끄덕이며 창밖을 바라봤다.


순간, 가슴 속 무언가가 흔들렸다.

“미영 씨…”
“응?”
“내가 정미가 아니라면, 그리고 혜순이라면…
내가 떠났을 때 울던 동생이 있다면…
그 아이는 지금 어디서, 뭘 하고 있을까?”

찻잔에 놓인 허브티가 식어갔다.
시간도, 마음도 천천히 흐르고 있었다.


가게를 나설 때, 미영은
“다음 주쯤 다시 방송국에 연락해볼게요”라고 말했다.


일주일쯤 지난 어느날, 미영이 숨을 헐떡이며 전화를 걸어왔다.

“에밀리! 이번 주 수요일, 방송 들어갈 수 있대!
KBS ‘이산가족을 찾습니다’ 프로그램처럼 구성된 특집 다큐인데,
입양인 사례를 한 꼭지 다룬대.”

순간, 핏기가 에밀리의 얼굴에서 사라졌다.
말로는 기다렸다고 했지만,
막상 카메라 앞에 선다는 건 전혀 다른 문제였다.

“내가… 잘할 수 있을까?”

“진심이면 돼요. 그게 전부예요.”


촬영 당일, 여의도 KBS 구사옥 스튜디오

작은 녹화 스튜디오. 붉은 벽지, 좁은 대기실, 긴장한 공기.
에밀리는 미영과 함께 도착하자마자 간단한 리허설과 메이크업을 받았다.

통역이 필요하다는 점에서
그녀의 이야기는 미영의 입을 통해 전해지기로 했다.

“한 가지… 이름은 에밀리로 쓸까요, 혜순으로 쓸까요?”
작가가 물었다.


에밀리는 잠시 망설이다가 말했다.
“혜순이라고 해주세요.
그게… 저를 부르던 엄마의 목소리였어요.”

카메라가 켜졌다.

조명이 얼굴을 덮고, 붉은 'REC' 불빛이 켜졌다.
정면의 인터뷰어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당신은 누구십니까?”

에밀리는 숨을 들이켰다.
“저는 혜순입니다. 미국 이름은 에밀리 정미 스윗이고요.
열 살에 미국으로 입양되었어요.
제가 정말 ‘정미’였는지는 모르겠어요.
어릴 적 기억엔, 제 이름은 혜순이었고,
엄마는 항상 절 그렇게 불렀어요.”

그녀는 화면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엄마,
혹시 이 방송을 보고 계시다면, 꼭 전하고 싶은 말이 있어요.”

통역을 통해 천천히 말이 전해졌다.

“엄마를 원망하지 않아요.
저는 지금 잘 살고 있어요.
그러니 너무 미안해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어요.”

에밀리는 눈을 감았다.

“그냥…
엄마가 살아 계시고,
언젠가 제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면,
만나고 싶어요.”


녹화가 끝난 후, 조명은 꺼졌고
스튜디오에는 깊은 정적이 흘렀다.

미영은 가볍게 에밀리의 어깨를 감쌌다.

“잘했어요. 정말 잘했어요.”


며칠 뒤

프로그램은 평일 저녁 8시 30분,
KBS 2TV의 시사 프로그램 내에서 방영되었다.

녹화는 10분 남짓한 짧은 분량이었지만,
혜순의 얼굴은 또렷이 남았다.

바람결처럼 퍼져나간 그 영상은
서울 어딘가에서
과거를 숨기고 살던 한 여자의 가슴에, 조용히 닿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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