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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아닌 이름9장

한국으로 1994년 6월

by 아티크 Artique

1994년 6월, 에밀리는 김포공항에 도착했다.
5년 전, 지진 속에서 다짐했던 한국행.
그 약속을 지키기까지 꼬박 1,714일이 걸렸다.


5년의 준비

1989년 말, 그녀는 컴퓨터 과목을 복수전공으로 추가했다.
캘리포니아의 하늘 아래서 실리콘밸리는 이제 막 전성기의 문을 열고 있었다.
인텔, 애플, 휴렛팩커드(HP), 썬 마이크로시스템즈(Sun Microsystems)…
사람들은 인터넷보다 ‘워드프로세서’와 ‘모뎀’이라는 말을 더 자주 썼고,
Netscape는 막 창립됐고, Yahoo는 두 학생의 실험이었다.

에밀리는 1993년 여름, 산호세에 위치한 작은 스타트업에 취업했다.
C 언어와 Unix 시스템에 능숙했고, 작은 창업팀에서는 그녀의 논리력과 끈기를 좋아했다.
출신, 인종, 입양... 그 누구도 따지지 않았다.
단지, 주어진 문제를 얼마나 빠르게 해결하느냐가 전부였다.

월급의 일부는 고스란히 적금 통장으로 들어갔다.
그 통장의 목적은 단 하나.
한국으로 가서 알아보자"


1994년 여름, 한국행

에밀리는 **서강대 한국어학당 여름학기(6~8월)**에 등록했다.
90일 체류 가능한 단기 관광 비자로 입국했고,
그 안에서 자신의 출생을 찾아가는 시간을 계획했다.

낯선 말, 낯선 거리, 낯선 여름.
하지만 이상하게도 두렵지 않았다. 자기를 닮은 사람들이 많이 보였고 그 중의 하나로 에밀리는 주목받지 않는 이곳이 편안했다.


복지회 방문

종로의 오래된 건물 3층.
“한국사회복지회” 간판은 햇빛에 바래 있었고, 사무실 안엔 철제 캐비닛과 분홍색 커튼이 걸려 있었다.

직원은 오래된 종이를 꺼내며 말했다.
당신이름은 김정미가 맞아요. 1970년 5월생으로 추정되요. 당신은 2살경 부산 국제 시장 인근에서 발견되어 미아보호소와 동방아동원 을 거쳐 1978년 8살에 미국으로 해외입양 갔답니다. ”

에밀리는 말없이 서류를 바라봤다.
그 종이에 써진 정보들이 너무 정확하게 틀렸다.


나는 정미가 아니야.
내가 누구였는지는 몰라도, 정미는 아니야.


“혹시… 고아원이 어딘지 알 수 있을까요?”

직원은 약간 망설이다 명함 한 장을 내밀었다.
“여깁니다. 요즘은 시설이 바뀌었지만, 당시는 동방원이라고 불렸어요.”


고아원으로

몇 시간 뒤, 에밀리는 버스를 타고 부산 고아원으로 향했다.

어린시절 8년을 보낸 곳 부산...뛰어다녔던 기억속에 자기는엄마를 기다리고 있었다.

분명히 엄마가 있었고 그 엄마는 자기를 혜순아 라고 불렀다.

누군가가 이제부터 너는 정미야 라고 말했었다.

나는 정미가 아닌게 확실한데 그 말 이후로 나는 정미가 된것이다.

창밖으로 흐르는 풍경 속에
어느 순간부터 익숙한 냄새, 익숙하지 않은 감정이 스며들었다.

그녀는 입양 서류 봉투를 꼭 쥔 채 생각했다.


이제 시작이야.

정미든, 혜순이든,
내가 누구였는지를 마주하는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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