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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아닌 이름 7장

버클리, 새로운 출발

by 아티크 Artique

제 7장 버클리 또다른 출발 1989년 8월


BART를 타고 다운타운버클리역에 도착한 순간, 에밀리는 숨을 들이켰다.

공기는 미네소타와 완전히 달랐다.

축축하면서도 따뜻했고, 바람에는 낯선 풀냄새와 콘크리트, 먼 바다 내음이 섞여 있었다.
햇살은 더 강했고, 거리엔 수많은 얼굴들이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누구도 그녀를 쳐다보지 않았고, 그 사실이 너무 좋았다.

미네소타에서는 늘 누군가가 “얘 이름이 뭐더라?”, “중국 애야?”,

“얘도 예수님 믿게 되었대?” 같은 말을 듣고는 했다.
이곳에서는 그 누구도 그녀가 어디서 왔는지 궁금해하지 않았다.


“이게... 자유라는 거구나.”
에밀리는 손에 들고 있던 지도 한 장을 펼쳐 들여다봤다.
Stern Hall – 기숙사 동쪽 끝
연필로 동그라미가 쳐진 그 위치는, 린던 선생님이 직접 붙여준 포스트잇 위에 적혀 있었다.

“This is where your new story begins. Proud of you. — Mr. Lyndon”

(여기가 네 새로운 이야기가 시작되는 곳이 될거야. 네가 자랑스럽다. 린던 선생님이)



캠퍼스를 향해 걷기 시작한 에밀리는 깜짝 놀랄 만큼 다양한 사람들을 보았다.
스케이트보드를 탄 학생들, 무지개 깃발을 든 커플, 예술가처럼 생긴 노숙자, 치과대학 광고를 붙이는 인도계 여학생.
모두 바쁘게 자기 삶을 사는 중이었다.

그때였다.
“Hey! You lost?” (너 길 잃었니?)
뒤에서 한 남학생이 웃으며 물었다.

에밀리는 당황했지만, 그가 손가락으로 지도를 가리키고 고개를 끄덕이자 작게 “Thanks”라고 답했다.
짧은 대화였지만, 그 안에 거절당하지 않는 편안함이 담겨 있었다.


[기숙사, 첫 밤]

Stern Hall 3층, Room 318.
문을 열고 들어섰을 때, 방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아직 룸메이트는 도착하지 않은 듯했다.

창밖에는 구불구불한 나무들과 멀리 시내 전경이 보였다.
기숙사 침대에 앉아 가방을 열던 에밀리는, 서류 봉투 하나를 조심스레 꺼냈다.

그 안에는 입양 서류와 함께,
그녀가 ‘정미’였던 흔적이 고요하게 들어 있었다.


그 위에 UC Berkeley 로고가 찍힌 티셔츠를 덮으며, 그녀는 속삭였다.
“오늘은 그냥 에밀리로 잘래.”

벽 너머에서는 누군가 기타를 치고 있었다.
“Hey Jude”의 어설픈 선율이 살랑이는 바람을 타고 들어왔다.

기숙사 침대 위에서 그녀는 잠시 눈을 감았다.
이름을 버리면 내가 사라질까 두려웠던 적도 있었다.
하지만 이름을 넘어설 수 있을 만큼 자란 나도 있단 걸, 오늘 처음 알았다.


그리고 그 밤,
에밀리는 열 살 이후 처음으로
누군가의 숙제를 대신하지 않고,
누군가의 식사 뒤설거지를 하지 않은 채
자기 이름으로 잠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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