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이름은 고아가 아니야. 이름있어. -1980년 3월-
1980년 3월 / 미네소타 그레이스몬트시
"Hey, orphan girl! You dropped your pencil."
(어이, 고아 소녀!!너 연필 떨어뜨렸어.)
그 말이 에밀리의 등에 박히듯 날아왔다.
교실이 조용했다.
칠판 앞에 있던 선생님도, 공책에 머리를 박고 있던 아이들도
모두 순간 멈췄다.
에밀리는 천천히 의자에서 일어나 연필을 주웠다.
그러고는 돌아서며 말했다.
"My name is not orphan girl. I have a name. Emily. "
(내 이름은 고아소녀가 아니야. 이름 있어. 내이름은 에밀리야)
처음으로 거의 1년만에 애들 앞에서 영어로 말하는 순간이었다.
이 말을 하려고 얼마나 연습했는지...
자신도 모르게 나왔다.
마치 마음속 깊이 눌러둔 말이 터져나온 듯이.
하지만 대답은 없었다.
그저 한 무리의 아이들이 웃음을 참지 못하고 킥킥거렸다.
"Wow, The orphan girl speaks English!!"
(우아!!!고아소녀가 영어를 한다.)
매번 에밀리를 괴롭하는 백인 남자애가 양손으로 눈을 찟는 시늉을 하며 말했다.
수업이 끝나고 나서도, 그 말은 마음에서 떠나지 않았다.
고아소녀 Orphan girl.
그 단어는 처음 무슨 소리인지도 모를때부터 싫었다.
자신을 완전히 부정하는 말처럼 느껴졌다.
언제나 붙어다니는 꼬리표 같았다.
‘에밀리’는 단지 이름일 뿐,
사람들이 보는 건 피부색, 말투,
그리고 어디선가 “보낸” 아이라는 사실뿐이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스쿨버스 안에서
에밀리는 창밖을 멍하니 보며 중얼거렸다.
“나는 고아가 아니야… 엄마가 있었어. 분명히 있었어.”
문제는
그 ‘엄마’의 얼굴이 희미하다는 것이었다.
정확히 떠오르지 않았다. 없는것 같을때도 있었다.
집에 돌아와 책가방을 내려놓기도 전에
양엄마인 마가렛의 목소리가 날카롭게 울려왔다.
"Emily! Why are you late again! Your brothers made a mess."
(에밀리, 왜 또 늦었어!!동생들 집을 난장판으로 만들었어)
에밀리는 무릎을 꿇고 쌍동이 동생들이 어질러 놓은 장난감을 치우기 시작했다.
동생들이 만들어 놓은 난장판 속에서
그녀는 다시 ‘고아 소녀’가 되었다.
돌보는 사람은 자신이었지만,
돌봄 받는 존재가 된 적은 없었다.
밤이 되자,
에밀리는 조용히 책상 서랍에서 오래된 스케치북을 꺼냈다.
거기엔 그녀가 그리고 지운 수많은 얼굴들이 있었다.
그녀는 페이지 한가운데에 조심스레 이름을 썼다.
삐뚤빼뚤 한국어.
초등학교 1학년을 간신히 마치고 미국에 온 에밀리는 한글을 맞게 쓰고 있는지도 헷갈렸다.
그래도 엄마를 찾으려면 잊어버리지 않아야 하는 이름이었다.
자꾸 혜순이라는 이름이 기억에서 사라져갔다.
성은 기억나지 않았다.
Emily Sweet
혜순
김정미
세 개의 이름.
그중 어느 것도
온전히 ‘나’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그럼에도,
오늘 그녀는 처음으로 한 가지는 확신했다.
“지금 내 이름은… 에밀리야.”
“정미는 내이름이 아니야”
그 말은 마치 마음속에 새기는 주문처럼
그녀를 조금 더 단단하게 만들어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