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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아닌 이름 8장

1989.10.17 로마 프리에타 지진

by 아티크 Artique

8장 로마 프리에타 지진속에 떠오른 이름


UC Berkeley에서의 가을은 낯설 만큼 따뜻했다.
미네소타의 짧고 빠른 가을과는 달랐다. 나무들은 천천히 붉어졌고, 해는 길게 남았다.
하루하루가 빨리 흘러가지만, 그녀는 매일 다른 얼굴을 배우고 있었다.
'에밀리'라는 이름으로 사는 법, '정미'라는 이름을 기억하는 법, 그리고 아직 보지 못한 '혜순'이라는 이름.

그날도 평범한 화요일이었다.


10월 17일 오후 5시, 도서관에서 나오는 길.
에밀리는 통계학 교재를 가방에 넣으며 캠퍼스를 가로지르고 있었다.

그 순간—
땅이 울컥 솟구쳤다.
처음엔 기분 탓인 줄 알았다.
다음 순간, 땅이 좌우로 흔들렸다.
강의동 유리창이 울었고, 누군가 비명을 질렀다.


“Earthquake!” (지진이다.)

학생들이 일제히 운동장 쪽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전봇대가 흔들리고, 건물 틈에서 흙먼지가 피어올랐다.
에밀리는 그대로 얼어붙었다.

그 짧은 10초 남짓한 시간.

뇌리 깊은 곳에서 어떤 목소리가 들려왔다.

“혜순아!”
울음에 젖은, 절박한 음성.
“혜순아, 혜순아!!”

기억은 없었다.
하지만 몸이 먼저 반응했다.
가슴이 쿵 내려앉고, 다리가 힘없이 꺾였다.
뭔가 너무 오래 참고 있던 문이 지진처럼 벌어지는 기분이었다.

그날 밤, 캠퍼스는 비상등만 켜진 채 조용했다.
도서관은 문을 닫았고, 강의는 취소되었다.
학생들은 공터에서 삼삼오오 모여 라디오와 작은 TV로 뉴스를 보고 있었다.


“진앙은 산타크루즈 인근, 버클리에서 약 110km 떨어진 거리입니다.
샌프란시스코 지역에서는 고속도로가 붕괴되며 수십 명이 사망했고,
수백 명의 부상자가 발생한 것으로 파악되고 있습니다...”


누군가는 울고 있었다.
누군가는 가족에게 전화를 걸고 있었다.
에밀리는 커피를 들고, 뉴스 자막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혜순아 라고 누군가 나를 불렀던 적이 있다.
그 사람을 찾아야겠다. 그사람이 나의 생모일까?


책상 서랍 속에 묻어두었던 입양 서류.
봉투 위에 적힌 낡은 이름들.
정미.
혜순.
엄마.

그동안 그 이름들을 두려워했지만,
이제는 그 이름들이 나를 부르고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기숙사 방으로 돌아온 에밀리는,
서랍에서 그 봉투를 꺼냈다.
손가락 끝이 닿자 종이는 부드럽게 흔들렸다.
마치 그날의 지진처럼.그녀는 속으로 천천히 말했다.

에밀리는 자기가 혜순이로 불렸던 시간들이

현실인지 상상인지 이제는 분간이 안되었다.


“더는 멀리서 바라보지 않을래.
정체성을 찾는다는 건
그냥 서류를 보는 게 아니라,
직접 그곳에 가보는 거라는 걸 이제야 알겠어.”


그리고 그날 밤,
에밀리는 처음으로 ‘한국에 가야겠다’는 결심을 했다.

그건 도망이 아니라,
돌아감이 아니라,
찾아가는 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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