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불려진 이름
서울 외곽, 조용한 빌라의 거실.
흰 커튼 사이로 오후 햇살이 길게 드리운 시간이었다.
텔레비전에서는 평소라면 눈길도 주지 않을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이 흐르고 있었다. 제목은 <찾고 싶은 이름>. 오래전 헤어진 가족을 찾는 이들의 사연이 소개되는 프로그램이었다.
“엄마, 뉴스 끝났어. 리모컨 어딨어?”
고등학교 3학년 딸 수연이 방문을 열고 나왔다.
“잠깐만. 이거 좀 보자.”
여자는 텔레비전 앞에 그대로 얼어붙은 채 앉아 있었다. 화면에는 단발머리의 젊은 여성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고 있었다. 그 옆에는 통역사라는 자막이 달린 또 다른 여성이 앉아 있었다.
“저는 혜순이에요. 한국 이름은 정확하지 않지만… 제가 기억하는 건, 엄마가 미순이랑 저를 안고 울던 장면이에요.
혹시 저를 기억하신다면… 부디 용기 내 주세요. 괜찮아요. 전 원망하지 않아요.”
여자는 리모컨을 쥔 손을 덜덜 떨었다.
“혜순이…”
입술 사이로 흘러나온 이름은, 마치 수십 년간 가슴 깊숙이 묻어두었던 지하실에서 꺼낸 것처럼 낯설고도 절절했다.
그날 밤, 여자는 침대에 눕지 못했다.
작은 다용도실에 들어가 오래된 철제 서랍장을 열었다.
노란색 봉투 하나. 고아원에서 보내준 아이들 사진이 들어 있었다.
그녀는 울지 않았다.
울기엔 이미 너무 많은 밤을 눈물로 버텨냈다.
다만, 미안함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나를 엄마라고 말할 자격이… 있을까?"
그녀는 자신에게 물었다.
이제 와서, 자신이 다시 두 딸의 삶에 발을 들여놓는 것이… 그들에게 축복일지, 또 다른 상처일지.
그날로부터 20여년 전.
그녀는 가슴으로 두 딸을 안고 버텼다.
혜순이 여섯 살, 미순이는 겨우 세 살이었다.
퇴근하고 돌아오면 둘은 배고프다고 울고 있었다.
방 한 칸짜리 쪽방.
우유 한 병을 둘이 나눠먹이고, 겨우 밥을 물에 말아 함께 나눠먹었다.
“엄마, 추워…”
겨울밤, 그녀는 아이 둘을 품에 안고 한 이불에 웅크려 잠이 들었다.
그러던 어느 날, 동네에서 그랬다.
“혼자서 애 둘 데리고 사는 건 무리야. 맡겨. 고아원이라도.”
처음엔 펄쩍 뛰며 반대했다.
하지만 고시원 청소, 식당일, 설거지, 세탁소 배달…
새벽부터 밤까지 일해도 아이들에게 제대로 된 밥 한 끼를 못 먹일 때, 그녀는 무너졌다.
눈물로 고아원 문 앞에 섰던 날.
혜순이가 “엄마, 가지 마…” 하며 울부짖던 목소리가, 귀에서 떠나지 않았다.
그리고 1년 뒤.
돈을 모아 혜순이와 미순이를 데리러 갔을 때, 이미 미순이는 입양이 확정되었다고 했다.
혜순이는 말도 없고 표정도 어두웠다.
그녀는 지쳐 있었다. 모든걸 다 포기하고 싶은 나날이었다.
십여년만에 복희를 찾아낸 복희의 엄마와 아빠는 복희를 다시 집으로 데려갔고
몇달쯤 지나 복희에게 선을 보게 했다.
남자는 예상외로 자상했고, 따뜻했다. 그리고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그래서 결심했다.
‘살아서라도 나중에, 애들 찾을 힘을 얻자.’
그러나 현실은 쉽지 않았다.
남편은 복희가 고아원에 맡겨둔 아이들이 있다는 걸 몰랐다.
자신이 미혼모였다는 사실도.
복희의 아이들 수연과 수호는 아무것도 몰랐다.
현재, 다시 거실.
그녀는 아이들이 잠든 집 안에서, 텔레비전 앞에 앉아 있었다.
혜순이 말하는프로의 재방송이 나오고 있었다.
그녀는 손을 들어 화면을 천천히 쓸었다.
화면 속 에밀리의 눈매, 턱선, 말투…
모두, 너무 익숙했다.
“혜순아…”
그날 밤, 그녀는 방송에 나왔던 번호로 몇번이나 전화를 했다가 그냥 끊었다.
“이제와서 뻔뻔하게 어떻게 걔를 찾아. 난 엄마 자격이 없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