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로시간을 줄인 후 내 생활의 변화
일하는 시간을 줄인 후 내 생활이 드라마틱하게 변한 건 아니었다. 여전히 나는 일하는 엄마였고, 일하러 나갈 때는 아들을 돌봄을 도와주는 사람(=친정 부모님)이 필요했다. 그렇지만 육아에 할애할 수 있는 내 시간이 늘어났기 때문에 조금씩 아들 돌봄의 주양육자 자리를 되찾아가고 있었다.
정상근무할 때 (물론 이때도 만 24개월 이하의 유아가 있는 사람이 사용할 수 있는 1~2시간의 단축근무 중이기는 했지만) 내가 평일에 아들과 함께 할 수 있는 건 출근 전 1시간 정도와 퇴근 후 두세 시간 정도, 가끔은 4시간 정도였다. 밤잠이야 아들과 같이 자기는 했지만 그건 자는 시간이라 서로 교류하고 시간을 나누는 건 아니었으니 제외.
물론 많은 맞벌이 부모들이 이 정도의 시간만 아기들과 보내고 있다는 걸 안다. 이보다도 더 적은 시간을 아기에게 쓸 수밖에 없는 사람도 많을 것이다. 그렇지만 누구나 어린 자식하고 더 많은 시간을 보내길 바랄 것이다. 나도 그랬다.
내 아들은 두 돌이 지나서야 어린이집을 다닐 수 있게 되었다. 그러니까 두 돌까지는 가정에서 보육을 했다. 이때 부모가 모두 출근을 했기 때문에 우리 아들은 대부분의 시간을 외조부모와 함께 보냈다. 아들의 입장에서는 사랑만 듬뿍 주는 할머니, 할아버지와 함께 있는 시간이 부족하지는 않았을지도 모르겠지만, 엄마아빠와 함께 있는 시간은 분명히 부족했다.
아니 어쩌면, 아들은 괜찮아하는데 내가 아들과 보낸 시간이 적어서 초조했던 걸지도 모르겠다. (아들은 엄마보다 할아버지, 할머니와 함께 있는 걸 더 좋아했을지도?) 나는 내 사랑스럽고 어여쁜 아들과 함께 더 많은 시간을 보내고 싶었으니까.
여하튼, 근로 시간을 줄이고 이전보다 더 많은 시간을 가정에서 보낼 수 있게 되면서 아들과 함께 할 수 있는 것들이 늘어났다. 휴무일에는 하루종일 아들과 함께 지지고 볶고, 밥 같이 먹고, 같이 놀고, 같이 낮잠도 자고, 아들 밥 차려주고, 어디로 튈지 모르는 두 살짜리 아들 지켜보면서
힘들었다.
일도 공부도 이런저런 것들은 많이 해봤지만 육아는 이 아들이 태어나고 나서야 난생처음 하는 거였다. 게다가 아기가 점점 커가면서 그때마다 부여되는 퀘스트는 다양해지고 새로워졌다. 정석 공략집 따위 없는 게임 같은 기분.
정답은 없는데 난이도는 개별 맞춤이고 요구되는 성적 눈높이는 또 높아서 매번 답을 찾느라 낑낑댔던 것 같다. 내 평생 풀어보는 가장 어려운 과제가 육아였다.
알고 보니 나는 육아보다는 일을 더 잘하는 사람일지도 몰랐다. 말도 안 통하는 아기와 함께하는 24시간은 생각보다도 난해하고 쉽지 않았으니까. 적어도 일할 때는 일이 힘들면 생각을 정리할 시간도 만들 수 있고, 동료들과 어른스러운(?) 대화도 할 수 있고, 나 혼자 하고 싶은 걸 하면서 일할 때 막힌 걸 푸는 방법이 있었다. 육아는 그런 게 없더라. 아기가 물을 엎질러서 그걸 치우려고 수건을 찾았는데 그 사이에 아이는 똥을 싸고 울고 있는 것처럼 지금 당면한 과제가 해결되지도 않았는데 바로 다음 과제가 연달아 터지는 것 같았다.
아기가 낮잠을 자서 잠시의 시간이 생기면 그때 끼니를 때우거나 빨래를 하거나 급히 청소를 해야 했다. 그 간단한 것마저도 제대로 다 못할 때가 많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하는 시간을 줄여서 가정에 쓸 수 있게 되는 건 만족스러웠다. 평일에 하루 이틀씩 온전히 가정에서 육아와 집안일에 매진할 수 있다는 건 알고 보니 아주 중요한 것이었다.
가장 우선적으로, 체력적으로 감정적으로 힘들어도 세상에서 제일 예쁜 아들과 함께 보내는 시간은 소중했다.
평일에 쉬는 날에는 아들을 데리고 시에서 지원하는 놀이활동에 데려갔다. 음악활동을 통해 신체 발달, 감성 발달 등을 도와준다는데 일단 에너지가 넘치는 우리 아들과 새로운 경험을 하면서 집에서는 내가 못해주는 음악적, 교육적 활동을 할 수 이게 해준다는 게 만족스러웠다. 평일에 하루 오후 2~3실쯤에 진행되는 수업이라, 내가 일하는 시간을 줄이고 평일에 적어도 하루 휴무일을 만들지 않았다면 참석할 수 없었다.
결정적으로 아들이 어린이집을 다니게 된 후 일하는 시간을 줄이길 참 잘했다 여기게 되었다. 어린이집에 챙겨 보내야 할 것들이 생기면 여유 있게 준비하는 것이 가능했다. 출근시간에 마음이 급하게 쫓기며 미처 준비 못한 것들을 로켓배송에 의지하게 되는 것이 줄었다. 갑자기 아들이 열이 나거나 아플 때, 어린이집에서 연락이 올 때 즉각 대응할 수도 있었다. 물론 내가 출근했다면 부모님이 대신 도와주셨겠지만, 내 아이를 내가 직접 급할 때 돌볼 수 있다는 건 장점이었다. 밤새 간호하며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할 때도 마침 다음날이 휴무일이라면 출근 부담이 적어졌으니 내 마음도 덜 번잡했다. 다음날 출근을 걱정하며 아침 일찍 부서장에게 연락을 취해 ‘오늘 아기가 아파서 급하게 연차를 쓰겠다’는 말을 안 해도 되었으니까.
또한, 나 대신 아들을 돌봐주시던 친정부모님에게도 휴식 시간이 생겼다. 어린 아기가 언제 아프거나 무슨 일이 생길지 몰라서 두 분은 개인적인 약속이나 일정 등을 최대한 미뤄두고 있었는데 이제 내가 아들을 돌보는 시간이 늘어나니 부모님도 본인을 위해 시간을 조정하여 쓸 수 있었다. 친구들도 만나시고 병원 검진도 가시고 해야 할 일을 하시는데 시간을 쓸 수 있게 되었다.
집안일에도 시간을 투자할 수 있게 되면서, 나나 남편이 얻는 이득도 있었다. 빨래가 밀리지 않았고 냉장고에 먹을 것들이 썩어가는(...) 일이 줄었고 상대적으로 깨끗한 환경이 조금 더 유지되었다. 집안일이란 게 하면 티 안 난다 해도, 안 하면 티 나는 거라서 매일 출근할 때는 눈에 보이는 집안일들을 퇴근 후에 처리하곤 했다. 일을 다 하고 돌아왔는데 또 해야 할 퀘스트가 집에 쌓여 있는 건 대놓고 은근한 압박이자 스트레스였다. 그런데 평일에 이걸 해치워버릴 수 있게 되니 그 스트레스가 확실히 줄어들었다. 개인적으로는 아무도 없는 집에서 방해받지 않고 신속하게 집안일을 처리할 수 있다는 점도 매우 마음에 들었다.
그러니까 나 하나가 일하는 시간을 조정하면서 나뿐만 아니라 내 주변 사람들이 얻는 이득(?)이 많았다. 다들 아주 당연한 평범하고 소소한 생활을 유지할 수 있었다. 일을 안 하는 것도 아니고 그저 일하는 시간을 줄였을 뿐인데. 모두가 적게나마 얻는 기쁨이 있었다.
무엇보다도 아주 작은 행복과 기쁨일지라도 아들과 가족의 평안이 가져다주는 행복이란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로 큰 것이었다. 일하는 시간을 줄이길 잘했다. 일을 줄여서 후회한 적은 없었다.
이렇게 일하는 시간을 줄여서 생활해 보니 얻게 되는 장점을 알고 드문드문 생각했었다.
하루 8시간, 주 40시간을 일하는 것보다 더 필요한 대안이 있어야 하는 게 아닐까?,라는 아직 확실하지 않은 물음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