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좋아해 줘서 고마워

11

by 그릉


고등학교 3학년이 되었다. 그 아이 말처럼 나에게 집중하는 동안 공부에 매진했다. 공부에 매진하는 하루하루가 지나면서, 나의 성적은 점차 상위권으로 올라가 결국 2학년 마지막에는 열람실 한 자리를 차지하기도 했다. 성적이 가장 좋았을 때는 근현대사 및 역사 과목만 제외하면 전교 10등 안에 들 정도였다. 그렇다고 해도 줄곧 학교에서 1등을 유지하고 있는 그 아이와 함께 단상에 올라가 상을 받기에는 부족했다.

나는 그 아이와 마찬가지로 이과를 선택하여, 인문계가 아닌 자연계에서 함께 공부할 수 있었다. 신경을 안 쓴다 했지만 내 짝은 인문계로 가서 이후로는 거의 볼 수가 없었다. 나는 그 아이와 같은 반을 내심 기대했지만 3학년은 같은 반이 될 수가 없었다. 또 하나 바뀐 점이 있다면, 야자는 자율로 바뀌어 학생들의 자유에 따라 참석해도 되고 안 해도 된다.

예전이라면 나는 환호하며 당당하게 한쪽 어깨에 가방을 메고 교문을 걸어 나갔겠지만, 이제는 우등생 반열에 오른 나는 그러지 못했다.

"너 12반이라고? 에이 나는 14반인데." 그 아이는 뒤에서 내 가방을 붙잡고 말했다.

"이제 내가 없으면 수학 문제는 누가 알려주려나?"

"종종 물으러 갈게 괜찮지?" 그 아이는 장난스럽게 말했다.

나는 별다른 대답 없이 그 아이와 함께 교문을 나섰다. 그리고 손을 흔들며 내일 보자는 인사와 함께 등을 마주 보며 멀어졌다.


'네가 없다면 나는 아무것도 하지 못한단 말이다.'




나는 학원을 다니지 않아 거의 매일 저녁 학교에 남아 늘 공부했다. 다른 친구들은 저녁밥도 잘 먹지 않고 영어 학원, 수학 학원, 국어 학원에 참석하기 위해 대부분 8교시가 끝나고 학원으로 향했다. 그 당시 분당에는 교육열이 꽤나 강했던 거 같다. 그 당시 나는 학교 앞 마트를 가 달달한 과자나 초콜릿을 사 와서 입에 달고 살았다.

그 아이는 자기 혼자 교실 하나를 차지하고 공부할 때도 있고, 아니면 아예 집에 가서 공부를 할 때도 있었다. 나는 강한 인내심을 발휘하여, 절대로 그 아이를 찾아가 수다 떠는 일 없이 홀로 얌전히 문제집을 풀었다. 그 아이가 매일 수학 문제를 물어보아 같이 고민하는 것 외에는, 혼자 교실에 남아 영어 지문을 읽고, 화학 공식을 달달 외웠다. 남아도는 시간을 주체하지 못해 몹시 지루했던 까닭에, 시험도 보지 않는 물리 문제까지 몇 문제씩 풀었다.

그러고 있자면, 그 아이는 8시쯤 내가 있는 교실로 들어와 기지개를 켜며 내 책상 위에 있는 초콜릿을 하나씩 까서 먹었다.

여덟 시 반, 늦은 저녁 시간의 교실. 어린 남녀의 천진난만한 시간이 다시 찾아왔다.

천장에 매달린 선풍기는 윙윙 소리를 내며 돌아가고, 그 아이와 나는 함께 초콜릿을 까먹고 있었다.

그 아이는 여전히 처음과 똑같이 가디건을 걸치고 있었다. 처음과 조금 달라진 점이라면 손목이 많이 헤져 실밥이 튀어나온 정도.


"나중에 대학 어디갈지 정해둔 곳 있어?"

"아니 아직 진지하게 생각해본 적 없는데. 너는?" 나는 입속에 초콜릿을 녹여먹느라 오물거리며 대답했다.

"뭐 나도 아직은 확실히 생각한 건 없지만, 임시로 정한다면 서울대학교에서 수의학을 전공하고 싶어. 너도 임시로 하나 정한다면?"

"... 하나만 추천해줄래?"
"너는 의과대학 어때? 너는 남 돕는걸 꽤나 좋아하고, 의과대학에 가면 정말 좋은 의사가 될 것 같아." 그 아이의 눈은 반짝반짝 빛났다.

'의과대학이라...' 사랑만큼 사람의 마음에 의지를 불어넣는 게 또 있을까? 연애가 도움이 안 된다는 너의 그 말은 정말 틀렸다. 오히려 공부에 매진하게 만들어 전투력을 올려주는 방법이니.

초콜릿을 입에서 거의 다 녹였을 때쯤, 문득 뜬금없는 생각이 떠올랐다.

"가만 보니까 너 공부에는 자신이 있나 봐?"

"무슨 소리야?" 그 아이는 나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내기하자."

"무슨 내기?"

"이번 시험 점수 말이야. 국어, 수학, 영어 어때."

"유치하긴 하지만 자신 있어?"

"당연"

"뭐 나는 나쁠 거 없으니, 뭘로 내기할래?"

"일주일치 간식 내기!"

"좋아, 정확히 어떻게 간식을 하자는 거야?"

"진 사람이 매일 이 시간에 초콜릿과 우유를 사서 교실로 오는 거야. 일주일 동안."

"좋아. 근데 네가 이길 거라고 확신하는 거야?" 그 아이는 진지하게 말했다.

"용돈 많이 챙겨 오라고." 나는 콧김을 뿜으며 말했다.

그 아이는 어처구니없는지 웃었다. 그 아이가 웃는 것을 보자니, 그래도 고등학생 여자아이 같았다. 항상 동그란 눈으로 잔소리만 하는 얼굴이 아닌, 저렇게 귀여운 모습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잊지 말라고, 지금 너와 비등하게 수학 문제를 풀고 있는 사람이 누군지 말이야." 나는 그동안 열심히 국어와 영어 공부를 쌓아왔다. 물론 그 아이의 공이 더 컸지만. 그래도 수학은 내가 앞서고 국어나 영어도 잘만 하면 내가 이길 승산이 더 컸다.

실은 이 내기는 승패가 어떻게 되던 나는 상관이 없었다.

내가 이기면 그 아이는 매일 달콤한 초콜릿을 사들고 여기로 올 것이다.

내가 지면, 매일 초콜릿을 사들고 그 아이가 있는 교실로 들어갈 수 있다.

앞으로 그 아이와 약속된 시간이 얼마나 기다려지겠는가.

"그럼 그렇게 하는 거다." 나는 손을 내밀어 새끼손가락을 보였다.

"약속" 두 손가락이 마주 걸렸다.


얼마 후 시험 성적이 나오고, 그 아이의 이름은 가장 위에 걸렸다. 나는 가만히 그 이름을 지켜보고 있었다. 나는 근소한 점수 차이로 져서 일주일 간식을 책임지게 되었다. 나는 저녁시간이 되면 교문을 지나 마트로 가 그 아이가 좋아할 만한 간식들을 신중하게 골랐다. 바나나 우유, 딸기맛 사탕, 밀크 초콜릿 등등.

그리고 그 시간이 되면 간식을 한 아름 안고 그 아이의 교실로 갔다.

"고마워. 그것 봐 네가 질 거라고 했잖아." 그 아이는 웃으며 바나나 우유를 받아 들고 나에게 수학 참고서를 건네었다.

"마지막 수학 문제 실수만 안 했어도! 다음엔 더 큰 거 하자." 나는 참고서를 받고 펼쳐보았다.

"또 하자고?"
"응"

"좋아. 이번엔 무슨 내기로 할까? 똑같이?" 그 아이는 우유를 한 모금 마시고 말했다. 그 아이의 입가에 뭍은 노란색 우유가 정말 귀여웠다.

"응 똑같이 하고 내기는..." 나는 아직 생각해 둔 게 없다.

"얼른" 그 아이의 얼굴에는 기대감으로 가득했다.

"내가 이기면 이번 여름에 가디건 입지 마. 내가 지면 내가 여름에 가디건을 입고 다닐게."

"응? 그게 그렇게 대단한 거야?" 그 아이는 어리둥절하며 물었다.

"좋아. 이번 여름에 너 아주 덥겠네." 그 아이의 표정은 아주 즐거워 보였다.


사랑은 한 사람을 평소와 다른 모습으로 변화시켜준다. 그게 아니라면 사랑이 가지는 특별함은 아무것도 아니지 않을까. 우리가 밤낮을 새며 사랑을 위해 잠을 설치고, 사랑 앞에서는 무모해질 수 있게 되는 그런 사랑이.

그때의 나는 언제든 사랑을 위해 미칠 준비가 되어 있는 남학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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