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좋아해 줘서 고마워

13

by 그릉


나는 저녁을 먹고 내 방으로 들어왔다. 내가 방으로 들어오면 우리 집 고양이는 얼마 뒤 따라 들어오기 때문에 문은 항상 열어두고 있다. 책상 밑에는 그 녀석의 전용 자리가 있는데, 내가 책상 앞에 앉아 있으면 항상 여기로 와 자리를 잡는다. 그러고는 그릉그릉을 한참 하다 잠이 든다. 나는 가만히 그 녀석의 소리를 들으며 다시 그 아이를 떠올려 본다.


기분 좋은 강아지 샴푸 냄새가 느껴진다. 사각사각 연필로 무얼 끄적이는 소리가 들린다. 눈을 떠 옆을 보니, 평생 얽매이던 너의 그 하얀 얼굴이 보인다.


남학생은 그리고 작게 이야기한다.


"보고 싶었어"


아, 아니 아니지. 이건 처음 그 아이를 만나러 들어갈 때 시작하는 부분이지. 앞서 그 아이와 시험 내기를 하여 그 아이의 가디건이 없는 모습을 보고 싶어 한 부분이지.


나는 다시 그때의 기억을 생각하며 눈을 감고 다시 그때로 생각에 잠겼다.




나는 교실 자리에 앉아 그 아이의 성적표를 건네받아 살펴보았다. 세 과목을 합쳐보니 내 점수가 5점 낮았다. 과학 과목에 쏟을 시간을 몽땅 국어 수학 영어에 쏟았건만, 그럼에도 나는 그 아이에게 지고 말았다. 나의 점수는 내가 여태 받아 보지 못할 정도로 높은 점수였다. 물론 국어 영어 수학만 놓고 보자면.

시험 문제를 풀 때도 시간이 모자란 것도, 답이 안 나오는 것도 없었다. 나는 내 최고의 성적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 아이를 이기지 못했다.


"너 괴물이야?" 나는 성적이 올랐음에도 그 아이의 내기에 깨끗이 승복했다.

"하, 내가 너랑 시험 성적 내기를 하자니 조금도 한눈을 팔 수가 없더라고." 그 아이는 듣기 좋은 웃음소리를 내었다.

아이같이 순수하고 행복한 웃음을.

그 아이가 기분이 좋으니, 나도 기분이 좋다.

"오늘은 시험도 끝났으니 일찍 가는 게 어때?" 지금은 저녁 8시 자율학습 시간이 한창인 시간이다.

"좋아. 가방 챙기고 5분 뒤에 교실 앞에서 만나자." 나는 답했다.

나는 가방을 싸고 교실을 나오려는 찰나, 문득 떠올랐다. 나는 다시 교실로 들어가 사물함을 열어 몇 달째 안에만 있던 가디건을 꺼내었다. 학교를 3년째 다니는 중인데도 가디건은 마치 새것과 같이 깨끗하고 해진 곳도 하나 없었다. 나는 반팔 교복 위에 가디건을 걸치고 다시 교실을 나왔다.

그리고 교실 앞에서 기다리고 있는 그 아이에게 다가갔다.

그 아이는 눈이 동그래지더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나도 그냥 어깨만 으쓱해 보이며 웃으며 그 아이에게로 갔다. 이윽고 그 아이는 기어이 피식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나는 그 얼굴을 마주하지 못해 그 표정을 상상했다.

"약속 지켰다. 오늘부터 일주일." 나는 우쭐대며 말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 아이는 처음으로 전교 5등 밖으로 밀려났다. 내가 다른 과학 과목이나 교양과목에 쏟아야 할 시간을 국어 영어 수학에 썼던 것처럼, 그 아이도 그랬던 것이다. 그 아이는 나와의 내기에서 이기기 위해 다른 과목을 희생했다.


다음날 나는 가디건을 계속 입고 다녔다. 나도 그 아이의 가디건에서 나는 냄새를 위해 엄마에게 섬유유연제를 가득 넣어 빨라 달라고 했다. 그리고 아직 다 마르기도 전에 옷걸이에 걸려있는 가디건을 낚아채 입고 나왔다. 그날도 아침임에도 불구하고 햇빛이 꽤나 뜨거웠기 때문에 학교까지 걸어가면서 가디건의 물기는 바짝 마르게 되었다. 하지만 그 아이가 내뿜는 달콤한 냄새는 나지 않았다. 그저 향기로운 섬유유연제의 냄새일 뿐.


나는 학교에서 그 아이를 몇 번 마주쳤다. 그 아이는 아무런 내색 없이 일 년 내내 꽁꽁 싸매고 있던 가디건을 내려 두고 흰색 교복을 입고 있었다. 아무 일도 없다는 듯한 표정으로.

흰색 하복 교복에 새하얀 그 아이의 피부가 보였다. 얼굴만큼이나 그 아이의 몸도 새 하얗게 있었다. 그리고 이에 맞게 어깨까지 내려온 머리는 단정하게 뒤로 묶어 정말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나는 생각했다. 어떻게 이런 아이한테 반하지 않을 수가 없겠는가. 나의 기억은 이 날 그 아이의 모습이 카메라가 찍은 듯 정확하게 기억한다. 나의 기억력에 몹시 감사한다.

우리 두 사람은 예전처럼 문제집과 필기 노트, 시험지를 바꿔보며 공부했다.

"다음에 또 내기하자. 이번에는 2주 치다." 수학 시험지를 건네며 나는 말했다.

"그래, 네가 또 정말 고생하겠네." 그 아이는 눈웃음을 보였다.

"이번에는 다를걸." 나도 웃어 보였다.

나는 그날 이겼으면서 왜 가디건을 입지 않았냐고 그 아이에게 묻지 않았다. 그 아이 역시 아무 말하지 않았다.

그저 나는 기분이 좋다는 것만, 정말 많이 설레었다는 것만 느꼈다.

지금 돌아보면 그때의 설렘은 다시 못 느꼈던 것 같다.

조금은 유치해도, 조금은 사랑을 위해 용기를 내었으며, 조금은 그 아이를 위해 공부에 미쳤었다. 그게 뭐 어떻단 말인가?


사랑은 한 사람을 평소와 다른 모습으로 변화시켜준다.


그날의 그 아이는 미치도록 아름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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