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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 생활은 꽉꽉 채워져 흘러갔다. 학원을 따로 다니지 않았었기에, 매일 저녁 학교에 남아 공부를 했다. 주말이나 휴일이면 나는 집에서 공부를 하곤 했지만, 그 아이는 도서관에 가서 공부를 했다는 걸 알게 된 뒤로, 나는 아침부터 도서관 앞에 줄을 서 있다가 자리를 맡았다. 우리는 필기노트를 바꿔서 보고, 참고서를 바꿔 풀며, 시험지를 교환하여 서로의 공부법을 공유했다.
그 시기에 유난히 여자 친구를 사귀는 남학생들이 많아졌다. 다들 공부에 지쳤거나 포기했거나. 나는 이들을 보면서 그 아이가 했던 말이 와닿았다. 지금 연애를 하는 건 불필요하다는 것을.
하지만 그 아이에 향한 나의 마음은 더욱 커져만 갔다.
그렇게 또 한 번의 여름이 지나갔다.
우리는 시시콜콜한 모의고사 점수 내기를 하고 경쟁하고 독려하고, 바쁜 고등학교 3학년의 끝자락에 와있다.
부지런히 공부하도록 나를 이끌어주는 사랑의 매력적인 단어 아래, 나는 늘 전교 50등 이내의 성적을 유지했다. 그러나 그 이상으로는 재능의 영역이 아닌 노력의 영역이라는 사실을 점점 깨닫게 되었다. 재능으로 빠르게 여기까지 왔다면, 그 이상은 나보다 더 많은 시간과 노력을 쏟은 자들이 누려야 할 당연한 권리였다. 또한 그 아이가 추천해준 의대에 들어갈 방법이 없다는 현실 역시 깨달았다. 전교 1등인 그 아이면 몰라도.
나는 그래서 그 아이가 목표하는 수의학과로 목표를 바꾸었다. 나는 그냥 그 아이가 원하는 건 나도 원하고 그 아이가 하고 싶은 건 나도 하고 싶었을 뿐이다.
나는 이번 수능이 끝나면 그 아이에게 고백을 하겠다고 다짐했다.
전투에서 싸워서 승리를 한다면 가지고 오는 게 상당하지만, 실패했을 때의 대가가 너무 커서 감당하기 어렵다. 용맹하게 지는 것보다는 치밀하게 계획하여 물 샐 틈 없는 작전으로 승리를 도모하는 것이 낫다.
그래서 나는 그 아이의 가장 친한 친구와 먼저 친해져야겠다는 작전을 세웠다.
두 개씩 가져오던 바나나 우유는 이제 세 개씩 가져오게 되었고, 거기에 더해 몰래 편지를 같이 넣어 그 친구에게 주었다. 내가 그 아이를 좋아하며, 나에게 정보와 도움을 주면 좋겠다는 마음을 솔직하게 적은 편지를.
나는 이제 되돌릴 수 없는 전투를 시작하게 되었다. 심호흡을 한번 하고 그 아이의 친구 책상에 바나나 우유와 그 밑에 편지를 올려두었다. 얼마 뒤 내 책상 서랍에 편지가 와 있었다.
'내가 그 아이에게 너를 좋아하게 할 수는 없어도, 적어도 네가 궁금한 건 알려줄 수 있을 것 같아. 언제든지 물어봐!'
편지를 들고 있는 두 손에 힘이 들어갔다. 이렇게 해서 나는 그 아이의 최측근의 도움을 얻을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그 친구가 전해주는 정보를 통해, 그 아이의 마음속에 내가 차지하는 위치는 꽤나 특별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 아이에게 나는 좋아한다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특별한 사람이다.
나는 조금 더 특별해지고 싶다. 아주 조금이라도 더.
그 아이는 내가 자기를 좋아한다는 것을 알까?
만약 그 사실을 안다면 내가 조금 더 특별한 사람이 되지 않을까.
누군가를 좋아하는 일에 정확한 시간표나 계획표 따위는 없다. 좋아하는 것을 알리는데 적당한 시기라는 것도 없다. 이번엔 물 샐 틈 없는 전략을 짜기보다는 오로지 나의 직감을 믿어보기로 했다.
어느덧 겨울이 오고 수능을 보았다.
수능이 끝난 교실은 정말 시끌벅적하고 자유로웠다. 시험을 잘 보았건 못 보았건 인생에서 첫 번째로 마주한 가장 중요한 일을 끝냈다는 것에, 다들 그래도 즐거워 보였다. 하지만 나는 이제 공부를 통해 그 아이와 나의 유일한 접점이 사라졌다는 것에 조금 쓰라렸다.
책상에 앉아 책을 꺼내려 책상 서랍에 손을 넣으니 편지가 하나 있었다.
'오늘 점심 같이 먹자고 해봐! 오늘 나랑 점심 같이 먹자 했는데 내가 시간이 없어서~ 잘해봐.'
뜻밖의 기회가 찾아왔다. 오늘이 바로 나의 직감을 시험해 볼 날인 것이다.
나는 12시 수업 끝나는 종이 울리자마자 가방을 들고 그 아이 교실 앞으로 갔다.
그 아이가 나오는 게 보인다.
내 몸은 저절로 그 아이에게로 향하고 있다.
그 아이와 눈이 마주쳤다. 다시 그 눈망울과 눈을 마주쳤다. 수업시간 내내 연습했던 그 대사가 나오지 않는다. 나는 중요한 순간마다 그 눈망울에 무릎을 꿇고 좌절했다. 지금도 그렇다.
그 아이는 웃으며 나에게로 온다.
"야, 오늘 점심 먹으러 갈래?" 그 아이는 수줍어하기보다는 당돌하게 말했다.
"어? 좋아!" 나는 다시 호흡이 정상으로 돌아왔고 입을 뗄 수 있었다.
'점심을 먹고, 그다음은?'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그다음은 어떻게 할 계획이지?'
계획 없이 철저하게 직감으로만, 즉흥으로 시도했던 그날의 전투는 처참하게 패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