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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일들이 얽히고 꼬인 끝에 나는 수의대학교 수시입학을 이루어 냈다. 비록 그 과정은 썩 마음에 들지는 않았지만, 어쨌거나 더는 입시를 마주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 기뻤다.
나와 친한 친구들 중에는 아무도 수시에 합격한 사람이 없었기에 다들 나의 조기 합격을 부러운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그날부터 졸업식까지 나는 학교 안을 마음껏 활보하고 다녔다. 다른 친구들이 정시 표를 펼치며 골머리를 앓는 동안 나는 괴상한 행동을 하기 시작했다. 교복 위에 새겨진 이름표를 떼고 있는가 하면, 교과서를 잘게 찢어 꽃가루를 만들어 교실 뒤에서 눈송이처럼 마구 흩날린다 든 거 하던지. 이것도 모두 지쳐 지루해지기 시작할 때쯤, 내 머릿속에는 그 아이에게 다시 어떻게 고백할지 하는 생각뿐이었다.
어떻게 하면 졸업 후에도, 그 아이에게 연락을 계속하며 지낼 수 있을까. 또, 그 아이가 인정하는 진지한 고백을 언제 하는 게 좋을까 하는 고민.
정시 시즌은 모두 흘러가 버렸고, 이젠 다들 홀가분해져 있거나, 아니면 내년 시험을 준비하고 마음먹었거나.
어쨌든 인생의 한 번뿐인, 삼 년 동안의 고등학교 시간이 끝나가고 있었다.
그 아이를 위해 숨을 쉬었던, 피가 터지고 거친 호흡으로 공부를 했던 삼 년 동안의 고등학교 생활이.
그러던 어느 날 침대맡에 놓여있는 핸드폰의 진동이 요란하게 울려대기 시작했다. 나는 눈을 뜨지 못한 채 핸드폰을 집어 들고 전화를 받았다.
"야 일어나!" 그 아이의 생기 있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응? 뭐냐?" 나는 아직 잠이 덜 깼다.
"일어나서 공부하러 가자. 일어나!"
"학교?" 나는 눈을 뜨고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어쨌든 일어나. 너 요즘 합격했다고 학교 다니는 꼴이 아주 못 봐주겠더라. 얼른 일어나!"
곧이어 핸드폰 너머에서는 그 아이가 흥얼거리는 소리가 멀리서 들렸다.
"뭐해?" 그 아이의 대답은 없었다.
나는 가만히 이불 안에서 그 아이의 흥얼거리는 소리를 듣고 있었다. 이런 행복한 기분에 잠겨있노라니, 그 아이를 좋아하는 마음을 숨긴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것이었다. 사랑은 과연 인간의 본성인지, 그 모든 것을 머리로 계획하고 그대로 움직이기는 어렵다. 그렇게 감정을 눌러 숨기는 것도 건강에 좋지 않을뿐더러.
"아직도 안 일어났어?" 그 아이의 흥얼거리는 소리가 핸드폰 가까이서 들렸다.
"일어났어, 일어났다고." 투덜거리며 말했지만, 속으로는 정말 좋았다.
"남은 일주일 동안은 이렇게 깨워줄게, 남은 고등학교 시간을 어떻게 충실하게 잘 쓸지 생각해 놓으라고."
"남은 시간에 잠을 자는 것도 굉장히 충실한 방법인데 말이지."
"또 이상한 소리 그만하고, 30분 이따 교문 앞에서 보자."
누군가 어떤 일을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하는지 알려면, 그 일에 쏟는 시간이 얼마나 되는지 지켜보면 된다. 나는 괜히 투덜거리며 앞으로 일주일 동안 그 아이가 나를 깨우는 데 더 시간을 쏟길 바랬다. 그러면 그 아이에게서 나는 정말 중요한 사람이 되지 않을까.
전화를 끊고 나의 온몸에는 걷잡을 수 없는 행복감이 휘감고 있었다.
내가 미칠 듯이 좋아하는 여학생이 매일 아침 전화해서 기분 좋은 노랫소리를 들려줄 거라니!
이것이 그 아이가 나에게 보내는 바로 그 고백의 타이밍인가요? 그런 거겠죠? 그럴 테지요! 나는 믿지도 않은 신에게 허공에 대고 빌었다.
나는 그날부터 바나나 우유와 함께 냉장고에 있는 손에 집히는 어떤 것이든 들고 그 아이에게로 향했다. 사과 한 개부터 시작해 오렌지, 딸기 그리고 전날 엄마가 한상 해놓은 김밥을 꺼내 전자레인지에 데워나가기도, 심지어 집에 있는 재료들을 모두 프라이팬에 부어 밥이랑 같이 볶아 담아 가기도 했다. 나와 결코 친하지 않은 주방에서 여러 날 저녁에 걸쳐 괴상한 요리들과 투쟁을 벌였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 도시락 통에 담아 그 아이에게 아침이랍시고 전해주었다.
그렇게 행복했던 일주일이 지나고 졸업식이 다가왔다.
졸업식 날, 나는 그 아이에게 꽃다발을 받았다. 그리고 옆에 서서 같이 사진도 한 장 남겼다. 어찌나 기쁘던지 졸업식 노래가 울려 퍼질 때, 다들 눈물을 흘리는데서 나는 미소로 웃고 있었다.
3년 동안의 추억을 쌓아 올린 친구들과 서로 졸업앨범에 메모를 남기고 사진을 찍고, 선물을 교환하고, 한편에서는 고백을 하고 다른 쪽에서는 이별을 하고 다들 바빴다.
나는 그 아이에게 다가가 내가 입고 있던 가디건을 벗어 주었다. 가디건 왼쪽 가슴에는 초록색으로 나의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그걸 받아 든 그 아이는 잠깐 놀란 눈치였지만, 나를 보며 웃어 보이며 자신이 입고 있던 가디건을 벗어 내게 주었다. 그 아이의 왼쪽 가슴에도 초록색으로 그 아이의 이름이 적혀있었다.
그리고 그 아이는 내 졸업앨범에 이렇게 적어주었다.
나의 첫 번째 짝 에게.
아침에 일찍 일어나는 건 좋은 습관이야. 나 없어도 스스로 일어나면 더 대단할 텐데!
앞으로도 스스로 노력하는 더욱 멋있는 사람이 되길!
2011. 2. 14
너의 짝꿍이
나는 그 메모를 받아 들고 내가 준비한 선물을 그 아이에게 전해주었다.
"자 이건 네 선물. 졸업 축하해. 너의 가디건을 빼앗아 갔으니, 앞으로는 이걸로 꼭 입고 다녀." 나는 새하얀 그 아이와 어울릴법한 베이지색 가디건을 그 아이에게 건넸다.
"어, 이런 선물을?" 그 아이가 웃으며 받아 들고 그 자리에서 펼쳐서 입어 보였다.
나는 속으로 가디건 주머니에 손을 넣지 않기를 바랐다. 첫 번째 고백처럼 많은 사람 앞에서 고백하는 것에 대한 실패가 있었으니. 다행히 기분 좋게 졸업식을 끝마칠 수 있었다.
졸업식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간 뒤, 내 예상대로 그 아이에게 전화가 걸려 왔다.
핸드폰 저 편 넘어에서는, 지금껏 내가 들어보지 못한, 내가 그토록 바랬던, 그 아이의 떨리는 목소리와 감동의 감정이 전해져 왔다.
때로는 간단하고 명료한 것이 더 잘 먹히는 법이다.
"고마워. 뭐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어." 그 아이는 목이 메어있었다.
"대학에 가서 기다릴게."
나의 가장 소중한 사람에게.
너를 좋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