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좋아해 줘서 고마워

18

by 그릉


얼지 않은 바다를 바라보며 정신이 번쩍 드는 차가운 바람을 맞으며 이따금 대화를 나누고 웃음을 터뜨리다 보니, 조금 전 우리 두 사람 사이에 맴돌던 어색함 따위는 어느샌가 겨울 찬바람에 꽁꽁 얼어 뒤편으로 남겨졌다.

그리고 곧이어 가슴이 뭉글하게 따뜻하게 만드는 침묵이 뒤를 이었다.


그렇게 한참을 서서 초겨울 바다를 바라보며 우린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겠지.

나와 그 아이는 따뜻한 고기 국밥을 먹은 뒤 영화관에 가서 영화를 한 편 봤다. 새벽부터 시작된 고된 여정이었기에 상영 시간 내내 나는 끔뻑끔뻑 졸았다. 영화를 다 보고 나오는 길에서 그 아이가 이것에 대해 신이 나게 이야기를 할 때, 나는 눈치껏 호응하며 하나도 모르는 영화 얘기를 나눴다.


해 질 녘 가까이의 푸르스름한 기온은 아직 지지 않은 나뭇잎들마저 추위에 떨게 할 정도로 주위를 얼려버렸다. 그 아이는 추위로 하얀 두 빰이 빨갛게 언 채 계속 뻘면서 연신 손에 입김을 호호 불었다. 꽤나 귀여웠다.

이 기회를 포착한 나는 한쪽 손의 장갑을 빼내어 그 아이의 다른 쪽 손에 건네었다.

내 오른손에 한 짝, 그 아이의 왼손에 한 짝. 우리는 약속이나 한 듯 아무런 티도 내지 않았다.

혹여나 쑥스러움에 뇌를 거치지 않은 농담을 했다가는, 숨겨온 행복과 수줍음마저 사라져 버릴까 봐.

나는 가만히 입을 다문 채 목적지를 향해 걸어갔다.

우리는 전날 예약한 숙소에서 발길이 멈추었고, 따뜻한 온기가 도는 숙소에 들어오니 괜스레 기분이 좋았다.

처음으로 여자 아이와 밤을 같이 보낸다는 것이 이제야 실감이 되었고, 설렘에 앞서 굉장히 떨렸다. 하루 종일 몸에 붙어있던 졸음은 그 분위기 속에서 완전히 사라져 버렸고, 뇌를 뚫고 솟아오를 나의 상상력에 대한 기대가 가져온 흥분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그 아이는 히죽 웃으며 나를 쳐다보더니 오늘 재밌었다고 말을 건네었다. 나는 그 말에는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고, 여전히 우리 둘이 장갑을 하나씩 나눠 끼고 있다는 작은 행복에 빠졌다.

약 2미터 정도 떨어진 침대에 서로 자리를 잡고 누워, 오늘 하루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고기 국밥에 대한 이야기, 초겨울 바다에 대한 감상평, 그리고 지금.


만약 내 머릿속을 가득 찬 야릇한 상상력이 솟아오르는 모습을 볼 수 있다면, 그 높다란 황금빛 상상력이 그 아이에게 닿는 그 순간, 그 아이의 손을 잡고 '고백'을 할 것이다. 그때는 그 아이의 대답을 들을 준비가 되어 있었겠지.

성공 아니면 실패. 0 또는 100. 깊은 숨을 한 번 내쉬며 결심했다. 그래, 그렇게 하자.


"자?" 나는 떨리는 목소리를 억누르고 입을 열었다.

"..."

"저기... 자?" 나는 다시 물었다.


그 아이는 노곤한 하루를 보냈다는 것을 시위라고 하는 듯, 금세 골아떨어졌다. 나의 머릿속의 황금빛은 뭐라고 표현하기 어려운 묘한 빛으로 바뀌었다. 빛깔이 점차 옅어졌고, 힘찬 기세로 솟아오른 나의 다짐은 이제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새근새근 자고 있는 그 아이의 숨소리와 함께 나의 심장도 두터운 밑바닥에 묻혀버렸다. 어렵사리 끌어모은 용기가 바로 그 순간 완전히 사그라져버렸다.

몇 시간 후, 나도 곧이어 잠이 들었고, 그렇게 다시 한번 운명의 놀음에 떄려눕혀진 채 그날은 지나갔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던 밤이 지나고, 다음날 조촐한 아침을 먹고 다시 기차에 올랐다.

그 아이는 이런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내 옆에서 졸음 가득한 두 눈을 비비고 있었다.

"무슨 생각해?" 창밖을 보고 있던 나에게 그 아이는 말했다.

"아니 그냥"

"그만 보고 나랑 얘기해"

"그러지 뭐, 너 어제 코를 정신없이 골던데?"
"야!"





그렇게 그 아이와의 여행이 끝나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왔다. 나는 그 뒤로 매일 그날을 곱씹으며 생각했다.

그리고 생각의 끝에 도달해 결론을 내렸다.


나는 그 아이를 좋아하고 있는 걸까, 아니면 그 아이를 좋아하는 감정을 좋아하는 걸까.

내가 그 아이를 좋아한다는 감정을 그 아이가 느끼게 하는 것을 좋아하는 걸까?


내가 진짜로 좋아하는 게 빌어먹을 그 아이를 좋아하는 감정일지라도 변하는 건 없다.

나는 그 아이를 좋아하고, 그 감정까지 좋다. 그리고 그 아이가 이런 마음을 알아주는 것도 좋다.

그리고 그 아이를 좋아하고 있는 나 자신도 좋다.


누군가를 좋아하고 있으면, 그 감정이 나 자신을 빛나게 하고 있으니.

나는 그렇게 10년 동안 그치지 않고 빛이 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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