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좋아해 줘서 고마워

17

by 그릉


그렇게 모든 입시가 끝나고 2월, 대학교 입학이 일주일 전으로 다가왔다. 나와 그 아이의 대학교는 비교적 멀리 떨어져 있었고 그 아이는 기숙사에서 학교를 다니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이틀 후 우리는 입학 전 같이 만나서 놀러 가기로 약속했다.


그 아이는 위에는 두꺼운 옷을 입고 나왔지만, 그 안에 눈에 띄는 가디건이 보였다. 졸업식에 그 아이에게 준 카디건이라는 것을 알았지만, 티 내지는 않았다. 그 아이도 처음에는 조금 쑥스러워한 듯했지만, 금방 우리는 같이 길을 걷고, 카페도 가고, 무얼 먹을지 토론하며 함께 밥을 먹었다. 조금 추운 겨울이었지만 그 아이 옆에서 걷는 동안은 그 추위를 느끼지 못했다.

추워도 손을 주머니 안으로 넣지 않았다. 걸을 때마다 손등이 스치는 그 묘한 감정을 느끼고 싶었다. 그렇게 나의 손을 빨갛게 변해가고 있었다.

그날, 그 아이와 나는 하루 종일 다니며 쉴틈 없이 대화를 나누었다. 수다쟁이였던 그 아이는 여전히 변하지 않은 채, 조곤조곤 말을 이어나갔다. 해가 지고 가로등이 켜지고, 우리는 아쉬움에 어느 하나 집에 가자는 말을 할 수 없었다.

그리고 내 몸 안의 어떤 밸브가 통제를 잃고 멋대로 열려버렸다.

"지금까지 쭉 너를 좋아했어."

"내가 왜 그렇게 공부를 했는 줄 알아?"

"너는 내 고등학교 시절 가장 소중한 존재야."


나는 순식간에 그 아이가 대답할 틈을 주지 않은 채, 수많은 말들을 뱉어냈다.

나의 빨간 손을 어느새 땀으로 흥건했다.

"나는 결국 너랑 만나서 평생 함께 할 거야. 백 퍼센트 너랑 있을 거야." 나는 떨리는 목소리를 간신히 억누르며 내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말을 했다.


그 아이는 심호흡을 했다. 숨을 깊이 마신 후 뱉었고, 다시 한번 깊은숨을 마셨다.

"지금 대답해 줄까? 대답해 줄 수 있어." 그 아이의 목소리는 차분했다. 나는 그 차분한 목소리에 숨긴 의미를 그날 알지 못했다. 그 아이의 빛나는 눈동자가 나의 사고를 하지 못하게 했으니.


문득 그 눈망울이 나를 두려움 안으로 밀어 넣었다. 지금 이 아이의 대답을 듣는 다면 앞으로 이 아이를 좋아하는 것이 허락되지 않을 수 있다. 그리고 그 눈망울은 나를 강물 위로 휩쓸리게 했다. 강물을 정처 없이 떠돌다가 결국 서서히 가라앉고 사라지겠지.


"아니 대답하지 마. 그냥 나의 바람을 너에게 말한 것이니."

"정말 대답 안 듣고 싶어?"

"지금은 말하지 말아 줘. 아직은 내가 너를 계속 좋아할 수 있게." 강물에 휩쓸려 버린 나는 이미 막무가내의 고집만을 말하고 있었다.


그렇게 우리의 그날 밤은 간신히 넘어갈 수 있었다.




대학교의 삶은 정말 재밌었다. 매일 수업이 끝나면 밤에 술을 마시며 게임을 한다던지, 아침엔 수업을 빠지면서 늦잠을 잔다던지. 그래도 바뀌지 않는 게 한 가지 있다면 그 아이와 연락은 매일 같이 했다. 핸드폰을 붙잡고 메신저로 답장을 기다렸다가 다시 답장을 한다던지, 유독 그 아이의 수다가 정점을 향할 때면 어김없이 그 아이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이는 한 시간은 꼬박 그 아이와의 대화를 하기에 밖에서 자리를 잡고 통화를 했다.


초록색이 무성한 풀밭 위의 벤치에 걸터앉아 전화를 받았으며, 단풍이 지고 낙엽이 가득한 벤치 위에서 전화를 받았다. 때로는 눈이 너무나 많이 와서 벤치에 앉으면 폭삭 내려앉는 기분을 느끼며 전화를 받았다.



일주일 후 나는 그 아이와 함께 기차를 타고 가장 아름다운 바다를 보러 떠났다.


겨울바람이 물고기 비늘처럼 빛나는 금색 햇살을 헤치고, 새하얀 눈 위를 반사하여 창가를 눈부시게 빛내었다. 기차의 엔진 소리가 말없이 박자를 맞추었다.

사람이 거의 없는 기차 안에서 그 아이가 바로 지금 이 순간 오로지 나와 단둘 이만 있다는 묘한 기분에 흠뻑 젖었다. 그 아이 역시 지금 이 순간을 나와 함께 기억하길 바라면서.


"야." 나는 정적을 깨고 말했다.

"응?"

"나 너 지금도 좋아해."

"나도 알아."

"어떻게 알아?"

"그냥 알아."

"지금도 엄청 좋아해."
"나도 안다니까! 유치하게 그러지 마." 그 아이가 부끄러움에 얼굴을 붉히는 것을 보았다.

새하얀 얼굴이 붉어지는 것을 보았다. 넋을 잃게 만드는 그 표정을.



우리 사이의 모든 것이, 그 끝에 닿았을 때는 후회 없는 결말이 되길 진심으로 바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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