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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백이 실패한 걸까? 내 속마음을 드러냈기 때문에, 그 아이가 마침내 나 역시 '감정에 좌지우지하는 공부를 방해하는' 남학생으로 분류해버린 걸까? 아니면 워낙 부끄러움이 많은 19살의 여고생인 걸까, 아니면 이런 상황이 그저 어색했던 걸까?
나는 오늘의 상황을 곱씹어 보며 침대에 누웠다. 잠은 오지 않았다.
지금 그때로 돌아간다면, 다시 그 자리에서 그 아이에게 완벽하게 나의 마음을 보여 줄 수 있을 것 같다. 왜 첫사랑과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말이 나온 것인지, 그때의 열아홉 살의 순수한 남학생은 까마득하게 모르고 밤을 지새우며 앓고 있었다.
그 아이의 빛나는 눈망울 앞에서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부디 그 아이가 내일 아무렇지 않게 나에게 말을 걸어줬으면.
수능이 끝난 뒤, 모든 수험생들은 대학 수시입학 전형 책자를 한 부씩 받았고, 정시 배치표 또한 한 부씩 받았다. 학교가 끝나고도, 나는 자리에 앉아 그 책자를 보고 있었다.
"집에 아직도 안 갔네?" 교실 뒷문이 열리고 내가 그토록 듣고 싶었던 목소리가 들렸다.
"뭐보고 있어?" 그 아이는 대답도 하지 못하고 있는 나에게 다가오며 물었다. 어제의 일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고, 내색도 하지 않았다.
"잘 모르겠어, 열심히 들여다보고 있던 중인데, 이거 다 봤어?" 그 아이도 책자를 들고 있었다.
"나도 방금 막 보고 나오는 길이야.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네. 수의대가 조건이 조금 까다로워서 말이야." 그 아이는 머리를 긁적였다.
"아니며 아예 교대로 응시해볼까 싶기도 하고. 국어, 영어, 수학 세 과목만 보더라고." 그 아이는 책자의 어느 한 페이지를 가리켰다.
'교사라... 너랑 꽤나 잘 어울리잖아.'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그리고 마음속에 잘 새겨두었다.
"어쨌든 1순위는 수의대로 가는 거니 여기에 집중해보려고." 그 아닌 책자를 덮으며 말했다.
두말할 필요가 있을까? 그 아이 때문에 관심도 없는 공부를 시작했고, 이제는 당연히 그 아이 말을 듣고 빌어먹을 수의대에 가고도 남을 일이었다.
그렇게 결정했다.
나는 조금 더 연구했다. 수의대 수시 정원은 5명뿐이었다. 즉 나와 그 아이가 같은 학교에 같이 합격할 확률은 지극히 낮았다. 나의 성적으로는 무난하게 상위권 대학의 공대 정도는 들어갈 정도였다. 하지만 그쪽으로 진학하고 싶은 마음은 조금도 없었다. 다시금 그 아이와 갈라지는 상황에 맞닥뜨릴 테니까. 그러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말이지, 수의대로 응시할 거야." 나는 깊은숨을 내쉬며 최면을 걸었다.
나는 그날부터 수시 시험을 위한 공부를 시작했다. 물론 그 아이가 공부하는 도서관에 아침 일찍부터 가서 자리를 맡아 놓는 것을 시작으로.
'대학에 들어가면 반드시 너에게 다시 고백을 하겠어.' 나는 하품을 하며 맞은편 책상에서 공부하고 있는 그 아이를 쳐다보았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나는 과학점수가 중간에서 조금 높은 정도일 뿐이어서, 앞으로 준비하게 될 수시의 수리논술을 공략하는 게 가장 승산이 높을 것 같았다. 내가 늘 수학 과목으로 그 아이와 내기를 했던 데에는 분명히 어떤 뜻이 있었던 것이다. 그래, 인생에서는 우연의 일치란 없지.
드디어 수시 필기시험이 다가왔고, 시험장에서는 그 아이를 볼 수가 없었다.
나는 이곳저곳 돌아다니며 그 아이를 찾았다.
그때는 휴대전화가 있었지만, 그 아이는 시험을 앞두고는 휴대전화를 들고 다니지 않았다.
'늦잠 자고 있는 건 아니겠지?'
매사에 꼼꼼한 그 아이가 저지른 실수는 아닐 것이다.
초조하고 불안한 가운데 필기시험의 답안지가 까맣게 채워져 나갔고, 나는 넋이 나간채로 나머지 공백 또한 채워나가고 있었다.
시험장에서 나오니 휴대전화에 그 아이의 부재중 전화가 찍혀있었다. 나는 곧바로 그 아이에게 전화하여 어떻게 된 일인지 물었다. 차라리 묻지 않았으면 좋았을 것을, 온몸에 전기충격을 받은 느낌이었다.
알고 보니, 그 아이의 수능 수학 성적은 수의대 수시를 보는 최저등급보다 한 단계 낮았고, 이로 인해 수시 시험을 볼 기회가 없어졌다.
"야! 그러면 나한테 말이라도 해줬어야지!" 나는 당장이라도 죽어버릴 것 같은 기분을 느끼며 대학교 캠퍼스 안에서 절망적으로 부르짖었다.
"뭐, 이렇게 된 일이야." 그 아이도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모르겠는지, 미안해하는 목소리였다.
하긴 그 아이도 시험을 누구보다 무척 보고 싶었겠지. 어쨌든 이 모든 일이, 운명이 나에게 커다란 장난을 친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나는 얼마 후, 필기시험을 통과해 수의학과 입학 면접을 볼 자격을 얻었다.
그 아이는 교대의 면접을 볼 자격을 얻고, 서로의 목표를 향해 교차점이 없는 평행한 길을 걷고 있었다.
그렇게 우린 서로 각자의 목표에 도달했다.
합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