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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릉 Mar 26. 2024

가제 : 뫼비우스의 띠

4

"을사조약이 가지는 가장 중요한 의미를 말해볼래?" 똑같은 질문이 반복되는 것을 이제 알아차렸다.

고개를 돌려보니 선생님의 시선은 나를 향해 있었고, 여학생의 시선도 나를 향해 있다는 것을 느꼈다. 이런 상황은 익숙하다. 수업시간의 말썽쟁이에겐 이 상황은 1000번의 전투를 한 장군의 고작 1001번째 전투일 뿐이었다. 하지만 칼과 화살로만 싸우던 백전노장의 장군은 마치 처음 장총으로 무장한 군대와 마주한 것처럼 몸이 얼어붙어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타앙" 경쾌하고 산뜻한 소리가 귓가를 울린다.

여학생은 밝다 못해 빛나는 눈망울로 시선도 피하지 않고 나를 쳐다본다. 나는 그 눈망울과 시선이 마주했다.

나는 가슴에 무언가 뜨거운 것이 꿰뚫은 것처럼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천천히 몸에 힘이 빠지고 목덜미에서부터 등을 따라 내려가는 땀 한 방울이 느껴질 만큼 감각이 예민해졌다. 

다시 주위 소리가 들리고 선생님의 물음이 내 귀에 들렸을 때, 그제야 그 아이의 눈망울을 피할 수 있었다.

"죄송합니다." 무기력하게 입을 열었다.

나는 작게 말을 하고 나서야 다시 수업은 시작되었다.


'죄송합니다'라니 이렇게 쉽게 상대에게 항복했던 적이 있었던 말인가!

그날 그 아이의 빛나는 눈망울은 말썽쟁이를 무기력하게 죽였다.


수업이 끝나고 주안이 킥킥대며 내게 왔다.

"죄송합니다? 언제부터 그렇게 고분 하게 선생님 말을 들었지?"

"시끄러워" 나는 짜증 섞인 목소리로 조용히 말했다. 

"오늘 저녁에 우리 집 올래? 엄마 아빠 오늘 집에 안 오시거든"

"어? 무조건이지" 수업 시간의 무기력했던 나는 온데간데없이 내 눈은 반짝였다.

"그럼 이따 오기 전에 전화해, 먼저 간다"


한쪽 어깨에 가방을 걸친 채 돌아 나가는 주안이를 보며 나의 머릿속엔 온통 주안이 집에 갈 생각에 설렘과 기대가 가득 차있었다. 혼자 남아 청소를 하는 것조차 콧노래가 절로 나오면서 빗자루를 들었다. 창가로 고개를 돌려 운동장을 가득 채워 나가는 친구들을 바라보며 나는 이어폰을 귀에 꽂았다.

우리 마을의 학교는 예전부터 매주 금요일은 중고등학교 상관없이 오후 3시면 수업이 끝난다. 중학교부터 이런 규칙에 익숙해져, 왜 그런지는 궁금했지만 굳이 불만이나 불평은 없었기에 알아보려 하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금요일엔 항상 마을의 거리는 학생들로 가득하여 시끌시끌했다. 운동장에 모여 해가 떨어질 때까지 축구를 하는 아이들, 더위를 피하려 카페에 들어가 시원한 음료를 마시는 학생들, 대형 쇼핑몰이나 길거리를 걸으며 쇼핑을 하는 학생들이 마을 구석구석 메꾸고 있는 날이다.

돌돌돌 돌아가는 선풍기 아래서 나는 청소를 끝내고 시계를 보니 4시가 다되었다. 천장에 달린 선풍기들은 열심히 나를 위해 바람을 밀어내주었지만, 끝내 이마에서 떨어지는 땀방울들을 말려주진 못했다. 나는 채 마르지 않은 땀을 대충 손등으로 닦으며 가방을 들고 교실을 나섰다. 아직 주안의 집에 가려면 2시간이 넘게 남았다. 나는 2시간 동안 뭘 할지 골똘히 생각해 봤다.

'시원한 쇼핑몰에 가서 시간을 때우고 있을까, 아니면 게임방에 가서 친구들과 게임을 할까, 아니면 집에 가있을까?' 하지만 주안의 집은 우리 집과는 완전히 반대에 있기 때문에 집까지 다녀오기엔 무리가 있었다. 


'아차 오늘 아빠가 늦게 들어온다고 했지'

오늘 아침에 아빠가 했던 말이 생각났다. 집에 혼자 있는 히마 저녁을 챙겨줘야 한다. 다행히 지금까지의 나의 고민은 단번에 해결되었고 집에 있는 히마에게 오늘은 특별히 맛있는 밥을 주기 위해 학교 앞에 있는 동물병원에 들러, 맛있는 습식캔을 샀다.

'달그락 덜컥, 달그락 덜컥' 투명한 비닐봉지에서는 조금은 무거운 경쾌한 소리가 들렸다. 나는 소리에 맞춰 발걸음을 맞췄다. 그리고 다시 학교를 지나칠 찰나 문득 얼마 전에 발견한 기차역이 있던 곳이 생각났다. 조금의 고민도 없이 학교 뒷문으로 돌아 그곳으로 향했다. 뒷문은 여전히 관리되고 있지 않았으며, 그새 식물들은 더욱 자라나 학교를 삼킬 듯 줄기를 뻗고 있었다. 나는 그 모습을 힐끗 보고는 풀숲으로 들어갔다. 조금을 더 들어가니 오래된 나무 표지판이 다시 눈 안에 들어왔다.

'들어가지 마세요' 오래되었지만 세월로 단단해진 나무판 위로 검은 글씨가 쓰여있었다.

'누가 이거에 겁을 먹고 되돌아갈까...' 나는 혼잣말로 중얼거리며 낡은 표지판을 스쳐 지나갔다. 귀에 들어오던 도시의 소음은 전혀 들리지 않았으며, 기분 좋은 바람이 살랑거렸다.


'딸그락 덜컥, 딸그락딸그락'

손에 들린 히마의 캔들은 더욱 요란스럽게 울려대었고 그 소리가 이제 성가시게 들릴 때쯤 계단이 놓인 초입이 보였다. 내려올 땐 몰랐는데 아래서 위를 올려다보니 꽤나 가파르고 높았다. 비닐봉지의 손잡이를 한번 돌려 손목에 단단하게 고정시키고 심호흡을 한번 한 뒤 오른발을 먼저 계단에 딛고 힘을 주었다.


"턱" 이 넓은 공간에서 내가 내딛는 발바닥과 계단이 맞닿은 소리만 울려 퍼졌다. 그리고 계단과 맞닿은 발바닥 아래에서 작은 모래알이 부스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숨이 턱까지 차오를 때까지 한참을 걸어 올라가니, 계단 앞으로 드디어 하늘색의 하늘이 보였다. 굽었던 허리를 펴고 거칠어졌던 숨을 정리하며 이마에 흐르는 땀을 손등으로 닦았다. 몸을 돌려 뒤를 돌아보니 계단 아래로 학교와 마을이 작게 보였다. 그리고 아래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나의 등을 밀어 안으로 들어가라고 하는 것 같았다. 나는 그대로 낡은 플랫폼의 개찰구를 밀고 들어갔다. 아직 여름의 쨍한 햇빛이 내려쬐고 있었지만 가끔 불어오는 바람은 흘러내린 땀을 시원하게 말려주었다.

녹이 슨 철도 사이사이로 햇빛이 비집고 들어와 반짝임을 만들어냈다. 그 반짝임은 오전의 "사건"으로 나를 다시 데려다주었다. 나를 뚫어지게 바라보던 그 아이의 빛이 나는 눈망울이 머릿속에서 사라지지 않고 계속 떠올랐다.

계속 그 눈망울을 떠올릴수록 그 아이의 머리스타일이 어땠는지 기억을 더듬었고, 다시 녹슨 틈 사이로 햇빛이 반사되면서 그 아이의 코와 입의 형태가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나는 그 "사건" 속에서 고개를 내려 아이의 왼쪽 가슴에 달린 명찰로 시선을 돌렸다. 하얀 셔츠 위에 초록색 바탕의 명찰에는 검은색으로 그 아이의 이름이 쓰여있었다. 흐릿했던 글자에 초점이 조금씩 들어올 찰나 나의 몸은 잠시 공중으로 떠올랐고 알루미늄 캔과 흙바닥이 마주하는 소리와 함께 나도 바닥으로 고꾸라졌다. 



매주 주말 업로드 목표를 하고 있습니다.

나아가 6월 이후에는 주 2회 업로드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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