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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창준 Mar 23. 2023

두부를 자르다

늦은 저녁을 위해 두부를 자른다 얌전하게 물속에 담겨 있지만 결코 물에 녹지 않은 두부를 자른다 부드럽지만 부서지지 않는 두부를 자른다 두부를 자르다 보면 세상에 이보다 쉬운 일은 없을 것 같아 두부를 자른다, 희디흰     

너의 여린 눈빛으로 인해 나는 조심스러웠다 조바심을 내면 사라질 것 같은 네 영혼 그래서 지금 우리는 무엇도 되지 못한 것일까     

자르고 잘라도 모서리가 줄지 않는다 두부의 모서리는 누구도 다치지 할 수 없을 만큼 연약하지만 모서리를 버리지 않는다 위험하지 않은 모서리를 모서리라고 부를 수 있을까 그것은 영혼에 상처가 없는 소년의 이름을 부르는 일      

나의 말과 눈빛은 위험했지만 누구도 다치게 하지 않았다 그것은 나를 지키기 위한 시늉 나는 단지 과묵한 안간힘으로 내 몸을 지키고 싶을 뿐     

어디를 잘라도 겉과 속이 동일했다 숟가락으로 어디를 파내도 물기가 묻어 나왔다 제 몸에 스며드는 것들을 거부하지 않되 자신을 바꾸지 않는다 온몸을 갈아 넣어야 원하는 삶이 가능한 걸까. 그래도 끝까지 비명을 지르지 않는 두부를 자른다 두부의 상처에 간장을 뿌린다 저녁이 아닌 것을 위해 두부를 삼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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