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선 글에서도 얘기했듯이 나는 《옥스포드 북웜 시리즈》 덕분에 영어원서 읽기에 다시 재미를 붙이게 되었다. 그 뒤로 다양한 책을 읽어보자는 생각에 《Dragon Masters 시리즈》를 읽었고, 영어원서 입문서의 바이블로 불리는 《Magic Tree House 시리즈》도 다시 꺼내 읽기 시작했다. (다양한 분야의 책이 맞나?)
《옥스포드 북웜 시리즈》를 구입할 때는 먼저 내 영어 수준을 파악해야 했다. 하지만 책이 비닐에 싸여 있어 내용을 확인할 수 없었고, 출판사나 블로거들이 제시하는 수준표도 나와 꼭 들어맞지는 않았다. 결국 나는 그냥 내가 끌리는 책들을 골라 샀다. 《드라큘라》(레벨 2), 《프랑켄슈타인》(레벨 3), 《지킬박사와 하이드》(레벨 4)를 각각 한 권씩 선택했다. 정확한 수준을 모르니, 각 레벨별로 하나씩 읽어보자는 단순한 접근이었다.
그런데 책을 읽으며 예상치 못한 혼란이 찾아왔다. 레벨 3인 《프랑켄슈타인》보다 레벨 4인 《지킬박사와 하이드》가 훨씬 쉽게 느껴졌고, 《White Death》(레벨 1), 《The Withered Arm》(레벨 1)은 오히려 《드라큘라》(레벨 2)보다 더 어렵게 다가왔다. 같은 레벨인데도 체감 난이도는 책마다 너무 달랐다. 나의 영어 독서 수준은 도대체 어디쯤일까, 혼란스러웠다.
나의 혼란의 이유는 어휘 수준만으로 책을 선택했기 때문이었다.나는 로맨스를 좋아하지 않고, 비극적인 이야기에는 감정적으로 쉽게 지친다. 그런 장르를 억지로 읽으려 하니 마음이 따라주지 않았다. 책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어휘가 전부는 아니었다. 어휘가 어렵지 않아도 마음이 힘들어 책장은 좀처럼 넘어가지 않았다.
게다가 원작을 지나치게 축약한 버전은 오히려 더 어렵게 느껴질 때도 있었다. 예를 들어,《The Adventures of Tom Sawyer(톰소여의 모험)》(레벨1)은 구텐베르크에서 다운받으면 168쪽에 달하지만, 북웜 시리즈에서는 64쪽으로 축약되어 있다. 어휘가 제한되어 있다 보니 이야기의 맥락이 생략되고, 등장인물의 감정 변화가 단선적으로 처리되었다. 그러니 오히려 더 낯설고 이해되지 않는 구간이 많아졌다.
또한, 나는 많은 이야기들을 ‘이미 알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었다. 《드라큘라》(레벨 1), 《프랑켄슈타인》(레벨 3), 《지킬박사와 하이드씨》(레벨 4) 같은 작품은 제목만 들어도 줄거리가 떠오른다. 하지만 실제로 그 이야기를 처음부터 끝까지 책으로 읽어본 적이 있었던가? 영화는 각색을 거치고, 번역본도 원작과는 다른 어조와 서사를 담는다. 그러니 기억하고 있던 장면들도 알고 보니 조각난 파편일 뿐이었다.
'책에 이런 내용이 있었나? 내가 아는 줄거리는 이게 아니었는데?' 영어 원서를 읽는내내 이런 의문이 뇌리에서 떠나질 않았다. '도대체 내가 읽은 책은 뭐지?'라는 생각에 내가 쓸데없는 것들에 시간을 낭비했나 싶기도 했다.
지금도 이런 혼란을 겪는지 궁금한가? 전혀 아니다. 이제는 그냥 그대로 받아들인다. 책을 읽든, 영화를 보든, 그 매체가 가지고 있는 그 내용만 가지고 받아들인다. 책이든, 영화든 그 모든 것들이 나의 삶을 풍성하게 만든다는 것을 이제는 알게 되었다. 책과 영화의 내용이 다르면 두 매체의 장단점을 비교하기도 한다. 다양한 시선이 나에게 새로운 관점을 주었고, 그 새로운 관점은 점점 더 많은 것들을 받아들일 수 있게 했다.
한때 세상에 있는 모든 책을 읽고 싶다는 꿈을 꾼 적도 있다. 영어원서를 처음 접했을 때도 그런 생각을 했었다. 영어를 제대로 배워서, 세상의 모든 영어책을 원서로 읽어야지! 지금 생각해보면, 꿈은 꿈이어서 더 좋은 것 같다. 그저 그런 꿈을 품고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하니까. 내게 영어는 그런 것이다. 아주 조금씩, 그러나 분명히 나를 바꾸는 느린 기적. 나는 그 길을 오늘도 걷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