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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ad (a)nd path

심연[深淵]의 늪

by 심미얀 Mar 20.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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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입니다."


세 군데의 대학병원, 소위 명문대 출신의 내로라하는 교수님들 입에서 같은 답변이 돌아왔다. 믿고 싶지 않았다기 보다도, 현실감각이 떨어졌다는 쪽에 가까웠다.


'전지적 작가 시점'


당시 나의 상태를 가장 명확하게 설명할 수 있는 용어이다. '아, 내가 암이구나. 저 징그러운 말미잘 같이 생긴 게 그러니까 악성 종양이고, 그게 지금 내 몸속에 1년 가까이 자리 잡고 있었다는 거구나. 술도, 담배도, 커피도 안 하는 내가, 암에 걸렸구나. 이제 고작 서른을 막 넘어가고 있는 나이에. 노령의 남성 흡연자가 대부분을 차지한다는 방광암 환자가 되었구나.'


그렇구나.


이후 병원의 안내를 차분히 들었다. 여전히 누군가에게 일어난 일을 관망하는 관찰자의 시선으로. 피검사, 소변검사를 하고 내시경으로 종양의 일부를 떼어내 조직검사를 시행했다. 첫 번째 조직검사 결과를 가만히 기다렸다. 아주 덤덤했다. '암인데 암이 아니겠지.'라는 이상한 생각을 했던 것도 같다. 


하지만 그 근거 없는 짐작을 비껴간 조직검사 결과는, 포장이 훼손되어 환불이 불가능해진 상품처럼, 마음에 안 들어도 일단은 가져가야만 했다. '내 것'으로 받아들여야 했다.




작년 11월, 난생처음 진행한 종합건강검진에서 방광 쪽에 무언가 결절 같은 것이 보이는 듯도 싶다는 메마른 짐작과 함께 형식적인 진료의뢰서를 받은 일이 있었다. 나는 이미 두어 번 자궁의 결절을 제거해 본 경험이 있었고, 이는 결절의 공포가 내게 건조한 무심으로 변해버린 지 오래라는 의미였다. 그저 '건강보다 앞서 생각해야 할 일생일대의 중요한 일들이 마무리되면-' 병원에 가보려고 했을 뿐이다.


그렇게 열 달이 흘렀다. 절체절명이 아닐 리 없었던 일들(그럴 리가!)이 모두 끝난 뒤, '(고작) 일주일 만의 요가'와 '(역시나 고작) 한 달 만의 미용실' 사이에서 선택을 고민하던 찰나였다. 엄마에게 전화가 왔고, 그제야 '아, 맞다.' 하고 밀린 숙제처럼 서둘러 병원을 예약했다. '보나마나 별일 아닐텐데(!) 무려 대학병원까지 가서 2차 검사를 하다니, 정말 나도 이제는 내 몸을 끔찍이도 생각하게 됐군.' 하며 제법 뿌듯함을 느꼈던 것도 같다.




"가장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아."

-라고는 하지만, 현실을 살아내야 했던 나는 그저 눈앞의 길을 달리고 또 달렸다. 당장 보이는 것들을 쫓기에도 숨 가빴던 나날 속에서, 내가 달리는 방향이 잘못되었음을 깨달을 리 없었다. 아니, 어쩌면 알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다만 방향을 틀어낼 기력조차 없었던 것이리라. 


이정표를 잃은 발걸음은 나침반을 뒤틀었고, 망가진 나침반은 또다시 이정표를 지워갔다. 같은 자리를 맴도는 발자국들은 점점 더 깊은 수렁을 만들었고, 나는 그 아래로 천천히 가라앉았다. 


영혼이 탈진한 채로,

끝없이,

침전하던 나는,


마침내 당도한 심연의 늪에서 어떠한 실체를 마주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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