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 훌쩍이는 소리에 눈을 떴다. 옆에 누운 딸아이가 야속한 듯 나를 바라보며 울고 있었다. 잠시 무슨 상황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혹시 꿈인가?
아, 그래. 딸과 나란히 누워 그날 있었던 일들을 말하고 있었지. 나도 모르게 깜박 잠이 들었던 거야. 그런데 무슨 이야기를 하던 중이었길래 아이가 울고 있는 걸까. 엄마로서 미안하기 그지없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별 수 있나. 잠든 현장을 들킨 현행범으로서 사실을 자백하고 선처를 구할 수밖에.
“뭐라고 했었지?”
“나도 다른 애들처럼 내 맘대로 말하고 소리치고 때려버리고 싶어.”
“…….”
바로 답을 해 줄 수가 없었다. 딸아이가 다른 아이들에게 괴롭힘을 당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가슴이 '쿵'할 뿐이었다. 아이에게 불안한 마음을 들키지 않으려고 아무렇지 않은 듯 물었다.
“그런데 왜 그렇게 하지 않니?”
“…….”
대답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아이는 혼란스러워하고 있었다. 어떤 경로를 통했든 아이는 옳고 그름이라는 것에 대한 일종의 정의를 내리고 있었다. 어린 나이에도 머릿속의 정의와 현실에서의 감정은 다를 수 있다는 것을 느끼고 있는 중이었다.
“널 괴롭히는 친구가 있니?”
“응, 자꾸 장난쳐. 하지 말래도.”
“엄마가 혼내줄까?”
“안 돼. 내가 할게.”
아이가 무엇을 걱정하는지 나는 알 것 같았다. 지난번에도 한 남자아이가 딸아이의 묶은 머리를 잡아당기고 달아났지만, 선생님께 말씀드리면 그 아이가 혼날까 봐 참았다고 했다. 이번에도 선생님께 도움을 요청할 생각은 없어 보였다. 게다가 엄마가 누굴 혼내고 다닐만한 그런 주변이 없다는 것쯤은 이미 알고 있을 터였다.
딸아이가 할만한 일은 딱히 없어 보였다. 하지만 해보라고 했다. 잘할 수 있을 거라며 머리를 쓰다듬는데 아이가 내게 말했다.
“엄마도 어릴 때 그랬다면서? 싸움도 못하고 속상해도 참고 그랬다고 했잖아?”
이런, 아이는 엄마에게서 답을 알려줄 스승이 아니라 같은 경험을 갖고 있는 동지를 찾고 있었던 것이다.
그랬지. 엄마도 그랬어. 엄마가 세상에서 유일하게 싸워 이길 수 있는 사람은 아빠야. 그런데 그것도 아빠가 져주기 때문에 이기는 거지. 그러고 보니 엄마는 정말 이길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구나. 하지만 이제 싸움을 못해도 엄마는 속상하지 않아. 누구를 이기려고 할 때보다 져 줄 때가 더 마음 편하다는 걸 엄마는 이제 알게 됐는데 우리 딸에게 설명할 방법이 없네. 아쉽게도….
“그 아이를 이기고 싶니?”
“아니. 내가 강해 보이고 싶어.”
그 마음을 나는 너무나 잘 알고 있다. 다른 누구에게도 해코지를 하고 싶진 않지만 그렇다고 공격받고 싶지도 않아서, 나도 강해 보이고 싶었다.
“그래서 태권도를 배우고 싶구나?”
“응. 엄마도 태권도를 했어?”
글쎄, 엄마는 무엇을 했을까. 생각해보니 나는 말을 아꼈던 것 같다. 개인적인 이야기 속에 내 약점이 드러나 보일까 봐 그랬는지 나는 사생활에 대한 이야기를 아꼈다. 말하자면 나는 아주 소심한 방어책으로 자신을 보호하려 했던 것이다. 나만의 고치를 만들고 필요할 때마다 들어가 숨었다가 회복되면 나오곤 했다.
“스스로를 적극적으로 지켜내려는 우리 딸이 참 멋지다.”
“…….”
나도 안다. 내 말이 너에겐 좀 어렵겠지.
"때론 내 생각을 상대방에게 정확히 알려주는 것도 필요해."
"......"
그래, 이 말도 아직 이해하기 힘들 거야.
“내일 밤에 널 괴롭힌다는 그 아이 얘길 좀 더 해볼까?”
“내일 그 애한테 말하고 오라는 거지?”
누굴 닮아 이리 똑똑한 거야. 말이 통하는 딸이니 한마디 더 보탰다.
“엄마는 이런 걸 말할 수 있는 딸이 있어서 정말 좋아.”
“알았어. 앞으로도 다 말할게.”
바쁘다는 핑계로 행여나 아이에게 일어나는 변화를 못 챙기면 어쩌나 하는 엄마의 불안한 마음을 잘도 읽어주는 딸이 오히려 나보다 어른스럽게 느껴졌다.
내일 밤 나는 또 밀려오는 잠과 싸우며 어떤 대화를 아이와 나눌까. 잠만큼 보약인 행복한 대화. 그 속에서 아이는 커가고 나는 치유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