엊그제 일이었다. 가방엔 두꺼운 책 한 권과 지갑이 있었다. 집 앞 마트 가는 길에 책은 뭐 하러 챙겨서 어깨며 손목만 더 힘들게 했을까. 가방이 그날따라 더 무겁게 느껴진 것은 두꺼운 책 때문만은 아니었다.
잔뜩 흐린 하늘, 위로 높게 솟은 회색 구름, 빈 공간 없이 겹겹이 쌓인 구름들이 기대하게 했다. 빗방울을. 따뜻한 봄이 오길 기다리는 꽃봉오리처럼. 우산으로 토독토독 떨어지는 빗소리를 기대하게 하는 하늘이었다. 일부러 챙긴 우산 하나. 자꾸 하늘을 올려다보게 했다.
나는 비 오는 날이 싫었다. 신발 속으로 스며드는 빗물. 바지 끝을 적셔 온종일 축축한 기분으로 지내게 하는 그날을 좋아할 수 없었다.
맞벌이로 늘 바빴다는 이유로 엄마는 어떤 감정도 공유하거나 표현하지 않았다. 그럴 시간에 집으로 가져온 일을 더 해야 한다는 생각뿐이셨다.
표현하지 않는 엄마 마음을 알리 없었고, 내 마음이 힘들다고 티를 내면 알아봐 주길 바랐기만 했다. 여린 마음은 늘 상처받기 일쑤였다.
축축 쳐지는 마음에 비에 젖은 신발 때문에 기분만 더 상하게 됐다. "아후... 비. 진짜."
분노와 짜증을 애꿎은 비에 쏟았다.
고등학교 3학년장마철이었다. 비가 올곧게 직선으로 주룩주룩 내리던 날. 바람 한 점 없는 날이라 옆으로 들이닥치는 비가 없던 날. 엄마가 느닷없이 나를 불렀다. "미정아, 체육복 반바지로 갈아입고 슬리퍼 신고 따라 나와." '안 그래도 비 오는 날이라 기분 별론데 왜 나오래.' 속으로만 웅얼거리고 슬리퍼를 질질 끌며 엄마를 따라나섰다. 파란 하늘색 비닐우산을 쓴 엄마, 학교에 들고 다니던 우산을 쓴 나. 비가 얼마나 많이 한꺼번에 쏟아졌던지 비닐이 쭉 찢어졌다. 한 우산을 나란히 쓰긴 처음이라 어색했던 좁은 우산 속. 긴장감마저 맴돌았다.
"엄마는 이렇게 비 오는 날 슬리퍼 신고 우산 쓰고 돌아다니는 거 좋던데. 넌 어때?" 처음이다. 엄마가 무언갈 좋아한다고 말한 날이. 엄마가 좋아하는 게 있다는 게 신기할 정도였으니. "엄마, 계란 안 좋아해. 냄새 나." "엄만 생선 살 퍽퍽해. 대가리 뜯어먹는 게 제일 맛있어." "엄만 변비가 심해서 고기 별로야. 야채가 숨 죽어서 완전 맛있어. 니들도 먹어봐." 했던 엄마였으니 놀랄 수밖에.
이젠 안다. 그 말이 '나도 좋아해. 참는 거지.'라는 뜻이라는 걸.
"엄마는 비 오는 날이 좋아? 난 싫어. 진짜 싫어." 둘이서 도란도란 이야기 나눈 것도 처음. 한 우산을 함께 쓰고 걷는 것도 처음. 우리는 물살에 슬리퍼가 떠내려가는 걸 잡는다고 뛰어다니기도 하고, 우산 밖으로 손을 내밀어 비를 맞기도 했다. 사춘기 두 소녀처럼 깔깔 거리며 웃다가 잠시 조용한 시간이 흘러도 이젠 어색하지 않았다.
그날 알았다.
엄마도 마음속엔 하고 싶은 것도 많았던 사람이란 걸. 꾹 참고 산다는 걸.
비가 너무 쏟아져 일거리를 못 가져온 공장장 덕분에 엄마랑 단 둘이 남포동까지 걸을 수 있었던 그날 알았다.
그 후로 다시 돈 버는 기계처럼 일만 하는 엄마였다. 서운함이 가득했던 내 마음은 온데간데없고, 이젠 엄마 옆에서 부업을 도왔다.
생각해 보니, 부업을 하는 동안 한 번도 도와달라는 말도 없었고 삼시세끼 밥 먹는 일을 늦은 적도 없었다. 엄마는 그렇게 마음을 표현했던 거였다.
그날 이후로. 비 오는 날이 좋아졌다.
비를 기다리는 마음도, 비에 흠뻑 젖은 채 걷는 일도, 우산 위로 떨어지는 빗소리를 듣는 것도 언제나 그 하루를 떠올리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