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인사치레로 하는 말.
이제 더는 하지 않게 되었다.
한 사람의 성격을 어찌 딱 하나로 설명할 수 있을까.
같은 상황이어도 어떤 날은 부드럽게 반응하는가 하면 어느 날은 흥분하는 날도 있기 마련이니까 말이다.
딱 꼬집어 '난 활발하다.'라고 말하는 사람도 어느 날은 기분에 구름이 잔뜩 끼기도 하니까.
그런 날이었다.
아침부터 왠지 기분이 업되는 날.
아이들도 아침부터 스스로 자신의 일을 해나가고 아침을 차렸는데 누구도 투정 부리지 않아 행복하기만 했다.
아이를 키우는 엄마라면 아마도 공감할 아침. 아이들의 징징거림이 없는 아침이 얼마나 소중한 순간인지, 1년 중에 몇 없는 귀한 시간인 것이다.
기분 좋은 아침 시간을 보낸 후, 나는 평소답지 않게 평범한 눈인사에 상쾌한 아침 인사를 얹어 동네 아줌마들과 공수표 같은 인사를 나눴다. 내일이면 사라져 버릴 무의미한 인사말.
"시간 되면 차나 한잔해요."
낯익은 누구와도 주고받는 말이지만 그 말을 지키기 위해 다시 연락을 주는 사람은 드물었다. 아니, 한 명도 없었다.
나도 굳이 연락하지 않았다.
"안녕하세요." 대신 좀 더 친근함을 보탠 인사말 정도로 여기는 말이었다.
변명하자면 그렇다는 것이다.
옆 동 단정한 느낌의 아기 엄마는 늘 차분했다. 그녀의 딸아이는 늘 번갯불에 콩 볶듯 통통 튀는 활발한 아이였지만 그녀의 여유로운 걸음걸이엔 영향을 주지 못했다.
한결같은 모습에 감탄하던 어느 날,
'저 여자도 집에서는 나 같겠지. 밖이니까 고상 떠는 걸 거야.'라고 생각했지만, 실은 부러웠던 게 본심이다.
놀이터에서 아이들과 놀고 있을 때, 아이들 등하원시간마다 늘 그녀에게 눈길이 갔다.
가끔 아파트 밖에서 마주칠 때가 있었는데, 여신이었다. 바람이 부는 대로 긴 머리카락은 물결치고, 폭넓고 긴치마는 그녀가 움직이는 대로 자연스럽게 나풀거렸다. 치마 밑단엔 살짝살짝 보이는 레이스, 주름이 잔뜩 잡힌 볼륨 있는 어깨선.
'누가 애엄마로 보겠냐고.'
내가 입고 있는 옷차림을 쓱 내려보게 하던 아기 엄마.
'같은 3살 또래 아이를 키우는데 집에서 나오는 사람이 이렇게 이쁘게 하고 나올 수도 있구나.' 감탄했다.
애 키운다는 핑계로 귀찮음을 정당화했던 나를 되돌아보게 했다. 그 깨달음은 10초를 채 유지하지 못했고 늘 면티 아래엔 무릎 나온 면 추리닝 혹은 레깅스면 딱 애 키우는 엄마스타일이라고 생각하고 만다.
아이들의 투정 없던 행복한 아침의 여파로 아기엄마에게 반가움을 보태 인사를 했고 "언제 차 한 잔 마셔요."라는 공수표를 날렸다. 그녀는 웃으며 "네. 시간 만들어 볼게요."라는 듣기 좋은 말로 인사말을 대신했다.
그랬다고 생각했다.
어린이집에 보내지 않는 막내와 함께 하는 평소와 같은 다음 날 아침.
큰 애들이 하나둘 학교와 어린이집으로 떠나고 드디어 펑퍼짐한 옷에 맞게 늘어지게 되는 그 시간.
3살 난 아이는 티브이 속 귀여운 캐릭터에 빠져있고 커피 둘, 프림 둘, 설탕 둘의 황금비율로 포장된 믹스커피에 뇌세포가 활성화되는 그 시간.
"띵똥" 누군가 찾아왔다.
커피 한잔의 여유를 누리고 있는데 '감히 이 시간에 누가 온 거야' 첫 번째 벨소리는 침묵으로 답했다. 두 번째 벨소리가 들리자 나가본 문 앞엔 내 옷차림을 쓱 내려보게 하던 아기엄마가 있었다.
너무 놀라 무슨 일이냐며 문을 열어주었고 맨발로 다다다 뛰어나가는 3살 난 딸아이를 두 손으로 번쩍 들어 올리며 골반에 걸쳐 안았다.
"커피 한 잔 하자고 하셔서... 지금 괜찮으세요?"
이렇게 바로 찾아오는 사람은 결단코 큰애를 임신한 새댁일 때부터 막내가 3살이 된 순간까지 10년 동안 단 한 번도 없었다.
나의 친근함을 보탠 인사말에 진심으로 응한 아기엄마였다. 그렇게 우리 집으로 찾아온 아기엄마를 난 집안으로 들이지 못했다. 아이들과 남편이 벗어던지고 간 옷들, 아침 해먹이고 난 후 폭탄 맞은 싱크대와 식탁 위의 그릇, 반찬통이 어수선했던 아침을 보여주고 있었기 때문에 도저히 아기엄마의 방문을 흔쾌히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아... 정말 죄송해요. 지금 막내가 오전 낮잠 자야 할 시간이어서요. 제가 따로 연락을 드릴게요."
하며 오전 낮잠 졸업한 막내를 팔아서 위기를 모면했다. '신나게 놀고 있던 막내야, 분위기 파악 좀 해줄래.' 하며 속으로 안절부절못했다.
"그럴지도 모른다 생각했어요. 다음에 시간 되실 때 연락 주세요."
하며 공손한 대답과 함께 아이의 손을 잡고 우아한 턴을 선보였다. 대각선으로 시선을 맞춘 체 고개만 까딱한 눈인사. 그것조차 우아했다.
그날을 기점으로 내 입에선 "언제 커피나 한 잔해요."라는 인사치레 말을 삭제했다.
물론 꼭 이야기를 나눠보고 싶은 사람을 만나게 되면 커피 타임을 권하지만 표현하는 말이 달라졌다.
"지금 시간 괜찮으면 커피 한 잔 할까요?"
타이밍이 좋다면 지금 당장, 그렇지 않다면 기약 없는 빈말 대신 다음 기회를 기약하는 인사말이 되었다.
우리 집 현관문 앞에서 아이와 손잡고 수줍게 서 있던 아기엄마와는 다음 날 반가운 커피 타임을 가졌다.
아침 일찍 애들 챙겨 보내고, 거실만 대충 치우고 설거지하는 걸로 집안일은 마무리했다.
머리 감고 양치까지 하려면 시간이 빠듯했기 때문이다.
막내딸은 산발된 머리카락에 물만 살짝 묻혀서 참빗으로 빗어내려 주고, 지저분한 내복만 후다닥 갈아입혔다.
첫 번째 방문에 응하지 못한 미안함을 덜기 위한 나름대로 부지런을 떤 아침.
이 일이 있고부터 인사치레로 하는 빈말을 하지 않게 됐다.
그녀는 오늘도 긴 원피스에 굽 낮은 단화를 신고, 긴 머리카락을 아무렇게나 묶은 듯 자연스럽게 하고선 여유로운 발걸음을 하고 있을 것이다.
"빈말 같은 건 내 사전에 없어요." 하는 아우라를 풍기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