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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이 Oct 21. 2023

7. 나의 작은 여행 메이트

아싸 엄마와 인싸 아들의 뉴질랜드 스쿨링

   

  나는 애고 남편이고 드러누워 유튜브만 보고 있는 꼴이 세상에서 제일 보기 싫다. 특히나 쌩 돈 들여 영어 좀 써보자고 뉴질랜드에 왔는데 여기서까지 그 꼴을 볼 수는 없었다. 그래서 숙소에 와이파이가 없다고 몇 번 뻥을 쳤다. 아직은 초3이라 그런지 내가 진지하게 “우리가 도시에 있을 때는 됐는데, 여기는 시골이라 인터넷 연결이 안 되나 보다.” “여기 에어비앤비는 할머니가 운영하는 데라 와이파이가 뭔지 잘 모르시나 봐. 정말 아쉽다.” 하고 이야기하면 순진하게도 진짜 그런가 보다 하고 믿었다. 엄마 핸드폰은 길 찾기나 예약 확인에 꼭 필요하니까 데이터를 함부로 쓰면 안 된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감히 달라고 조르지는 않았다.   


   



  그날은 여행의 피로가 극에 달한 시점이었다. 처음에는 바짝 긴장해 있어서 뭣도 모르고 막 다녔는데, 점차 뉴질랜드 생활에 익숙해질수록 오히려 피로감은 더해갔다. 아는 만큼 보인다고, 아무래도 관광객 모드에서 생활인 모드가 되니 이곳에서 지켜야 할 상식이나 규칙들을 더 신경 쓰게 되어 그랬던 것 같다.  


  양들이 한가로이 풀을 뜯는 넓은 초원을 지나, 이틀 동안 우리의 집이 되어 줄 농가에 도착했다. 역시 기민이에게는 새로운 숙소의 와이파이 유무가 너무나도 중요했나 보다. 도착하자마자 노트북만 쏙 꺼내 들고 숙소에 들어가 인터넷부터 잡으려고 했다. 나는 장시간 낯설고 울퉁불퉁한 길을 운전했기 때문에 완전히 파김치 상태였다. 그래도 어쩌겠나, 어른이 나 하나뿐인걸. 혼자서 묵묵히 작은 배낭, 큰 배낭, 작은 캐리어까지 하나씩 옮겼다. 그러다 마지막으로 28인치짜리 무거운 캐리어를 낑낑대며 옮기는데, 갑자기 한계에 다다른 풍선같이 분노가 빵! 터졌다. 파김치한테 어떻게 그런 힘이 나왔는지, 나는 옮기고 있던 캐리어를 바닥에 냅다 던져버렸다. 쾅!! 기민이는 엄마의 급발진에 놀라 토끼 눈이 되었다. 내 입에서는 너무나도 뻔한 레퍼토리의 유치한 말들이 튀어나왔다.      


"엄마가 네 하인이야? 너 유튜브 보려고 뉴질랜드 왔어? 너는 손이 없어 발이 없어? 어? 왜 나만 짐 옮겨야 되는 건데!"     


  나는 빽 소리를 지르고 주저앉아 어린애처럼 엉엉 울어버렸다. 엄마가 소리 지르고 우는 모습에 당황한 기민이는 어느새 옆에 와서 따라 울고 있었다. 우리는 서로 얼싸안고 눈물 콧물 범벅이 되도록 한참 동안 소리 내어 울었다.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고, 나는 훌쩍거리며 말했다.     


“기민아, 엄마 사실은 너무 힘들었어. 길도 잘 모르겠고, 운전도 혼자 해야 하고, 영어로 말하는 것도 너무 긴장됐어. 그리고 기민이 잃어버리지 않게 잘 챙겨야 하고, 짐도 옮겨야 하고... 아빠가 있었으면 같이 했을 텐데... 기민아... 아빠가 너무 보고 싶어헝헝... 지금은 아빠도 없고 의지할 사람은 우리 둘밖에 없는데, 우리 싸우지 말고 사이좋게 지내자아아~~ 쿨쩍쿨쩍”      


  이렇게 한바탕 울고 나니 마음의 앙금이 모두 사라졌다. 혼자 다 할 수 있는 척, 다 아는 척, 괜찮은 척을 내려놓으니 속이 너무 편했다. 그전까지 기민이는 그냥 내가 다 챙겨줘야 하는 ‘어린아이’ 일뿐이라고 생각했는데, 내가 힘들다는 것을 인정하고 도움을 청해보니 훌륭한 ‘여행 메이트’가 되었다. 기민이는 짐을 풀어서 적재적소에 탁탁 놓았고, 신발도 정리하고, 옷도 걸어놓고, 새로운 숙소에 뭐가 있는지 어떤 기능을 하는지 하나하나 탐색해서 엄마에게 알려줬다.      




  생각해 보면 내가 이렇게 분노 폭발하기 전에도 아이는 나에게 여러 가지 도움을 주었다. 운전하다 실수하거나 잘못된 길로 들어가 바짝 긴장하면, 아이는 옆에서 산신령 같은 목소리로 “괜찮다 지영아~” “잘했구나 지영아~”하면서 웃긴 농담으로 나의 긴장을 풀어주었다. 그뿐만이 아니다. 덜렁거리는 엄마가 깜빡 잊은 소지품들을 챙겨주기도 하고, 요리 재료를 다듬고 자르는 것을 도왔다. 집에서만 지냈을 땐 몰랐던 기민이의 듬직함을 이번 여행에서 많이 발견하였다. 정말 고마워 기민아.     


기특한 우리 강아지


  이번 숙소에서만큼은 제대로 쉬기로 했다. 관광지에 가서 뭘 꼭 보거나 먹어야 한다는 의무감도 내려놓고, 틈틈이 수학 연산을 하기 위해 가져온 ‘기적의 계산법’ 문제집도 잠시 덮어두고, 놀고 쉬는 것에 죄책감 느끼지 않기로 했다. ‘어차피 며칠 뒤면 스쿨링 시작이라 말도 잘 안 통하는 뉴질랜드 학교에서 긴장의 연속일 텐데, 하루 이틀 늘어지게 유튜브 보고 논다고 뭐 큰일이야 나겠어?’ 나는 나의 작은 여행 메이트에게 아주 쿨하게 와이파이 비밀번호를 알려주었다.      


  아이는 노트북으로, 나는 핸드폰으로 각자 좋아하는 영상을 봤다. 나는 ‘미스터 션샤인’을 정주행 했다. 오랜만에 듣는 우리말이 어찌나 반갑고 편안한지, 드라마 한 편 한편을 소중하게 음미하면서 봤다. 남자 주인공인 ‘유진’은 조선인의 외양을 하고 있으나 미공사관 대리로서 영어를 구사한다. 그가 영어로 말을 하면 어딜 가나 대접이 달라진다. 그걸 보고 옛날이나 지금이나 다를 게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거 봐봐, 기민아. 이래서 우리가 영어를 열심히 배워야 하는 거야.” 제대로 쉬기로 약속까지 했는데, 오늘도 기승전 ‘엄마의 잔소리’로 끝이 났다. 하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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