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싸 엄마와 인싸 아들의 뉴질랜드 스쿨링
아이가 서너 살 무렵 야외 바비큐장에서 고기를 구워 먹는데, 잠깐 한눈판 사이에 아이가 없어졌다. 사색이 되어 주변을 둘러보니 옆 옆자리에 있는 가족들 틈에 껴서 꺄르륵 대며 과자에 고기까지 얻어먹고 있었다. 별로 낯가림이 없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 일 줄이야. 떡잎부터 파워 외향인에 인싸 재질이었던 아이는 지금도 동네에 모르는 사람이 없다. 저 형은 피아노 형, 저 아줌마는 누구네 엄마, 쟤는 1학년 때 같은 반. 꼭 일일이 인사하고 아는 척을 한다. 이 아이의 기준에는 놀이터에서 한 번이라도 같이 놀았으면 다 ‘친구’다.
처음 보는 사람에게 다가가는 것도 주저함이 없다. “안녕? 같이 놀래?” 하고 금방 친해진다. 간혹 경계의 눈초리로 “너 나 알아?” 하고 면박을 주는 아이도 있는데, “아니 몰라. 너 이름이 뭐야?” 그러면 또 순순히 이름을 알려주고 어느새 같이 놀고 있다. 극내향인인 나로서는 너무나도 신기한 일이다. 아이의 이런 외향적인 성격은 짧은 시간 내에 낯선 언어로 새로운 아이들과 어울려 지내야 하는 단기 스쿨링에 매우 적합했다.
스쿨링 시작 전날 밤, 나는 걱정이 태산이었다. ‘애가 영어도 잘 못 하는데 어떻게 하지? 화장실은 혼자 갈 수 있으려나? 인종 차별하는 애들이 있으면 어떡하지?’ 걱정세포가 또 열심히 공장을 돌리기 시작했다. 한편 우리 아들은 뭔가를 주섬주섬 가방에 챙기고 있었다. 내가 고딩 때 쓰던 낡은 전자사전과 알록달록한 색종이 한 묶음이었다. “엄마, 모르는 거 있으면 여기에 단어 찍어서 보여주면 되겠지? 그리고 나 미니카 잘 접으니까 이거 접어서 주면 애들이 좋아할 거야.” 새로운 친구들을 만날 생각에 아이의 얼굴은 기대로 가득 차 있었다.
‘그래 걱정과 긴장은 엄마가 다 할 테니 너는 가서 즐겁게 놀고 오렴!’
대망의 스쿨링 첫날. 교복을 입고 모자를 쓴 모습이 무척 대견해 보였다. 마치 초등학교 입학 첫날 같은 감동이었다.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교정에 들어서자 제일 먼저 넓고 푸른 잔디밭이 눈에 들어왔다. 나이에 맞는 놀이를 할 수 있도록 저학년용 고학년용 놀이터가 따로 마련되어 있었다. 고학년용 놀이기구들은 어른인 내가 봐도 아찔하고 재미있어 보였다. 높은 나무에 매달리고 기어오르며 노는 아이들도 있었다. 아침 수업 시작 전, 모닝티(간식 시간), 점심시간에는 밖에 나와 자유롭게 놀 수 있다고 했다. 신체활동을 많이 해서 그런지 아이들이 모두 건강하고 생기있어 보였다.
아이를 담임 선생님께 인계하고 학부모는 강당으로 이동하라는 안내를 받았다. ‘우리 집에 왜 왔니’ 놀이처럼 재학생과 선생님 그리고 신입생과 그 학부모로 나누어져 서로 마주 보고 섰다. powhuiri라는 마오리 환영 의식이었다. 뉴질랜드 국가 교육과정이 마오리 문화를 기반으로 운영되고 있음을 실감했다. 마을의 촌장 격인 어르신이 마오리어로 환영 인사를 했다. 마치 우리나라 교장 선생님의 훈화 말씀처럼 끝날 듯 끝나지 않고 계속 이어졌다. 뜻 모를 언어를 계속 듣고 있자니 주술사가 말하는 것 같은 느낌이었는데, 워낙 경건한 분위기라 잡담조차 할 수 없었다. 한 명씩 줄지어 코를 맞대는 마오리식 인사를 나누고 마침내 아이들이 교가를 불렀다. 교가 역시 마오리어였는데, 듣는 순간 맑고 깨끗한 바다와 열대지방의 따사로운 햇살이 떠올랐다. 같은 폴리네시아 계열이라 그런지 디즈니의 ‘모아나’ OST와 비슷한 그루브가 느껴졌다. 우리는 교가에 푹 빠져버렸고 아침저녁으로 계속 들었다. 아이는 스쿨링 일주일만에 교가를 외워 부르는 기염을 토했고, 지금도 우리는 뉴질랜드의 자연과 여유로움이 그리울 때마다 이 노래를 듣는다.
뉴질랜드에서는 보통 7살에 초등학교에 입학한다. 그래서 우리나라 학년에 +1을 해야 제 나이에 맞는 학년이 된다. 기민이는 한국에서 초등학교 3학년이기 때문에 원래대로 라면 Year 4로 신청을 하는 것이 맞는데 일부러 Year 3로 신청을 했다. 학년이 낮으면 그만큼 수업 내용을 따라가기 수월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과, 그간 12월생으로 머리 하나 큰 친구들한테 여기저기 치이며 살았으니 여기서라도 비슷한 사이즈 친구들이랑 어울려 봐라 하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교 시간에 아이를 픽업하러 교실에 갔는데, 맙소사! 반 친구들이 죄다 머리 두 개만큼 큰 것이 아닌가. ‘호오...역시 양인들이라 피지컬이 대단하군.’ 뉴질랜드 3학년들은 거의 우리나라 5학년만큼이나 컸다. 뉴질랜드 청정 소고기를 먹고 저렇게 큰 건가 싶어 그날 저녁은 우리도 소고기를 구워 먹었다. 그리고 다음 날, 학교에서 유학 담당 선생님과 유학생 부모님들과의 간담회가 있다고 해서 참석했다. 조금 일찍 도착하여 ESOL 교실을 둘러보는데, 책상에 유학생들 파일이 쫙 놓여있었다. 다른 친구들 것은 개인정보이니 보면 실례겠고, 우리 아들 파일은 봐도 되겠지 싶어 살짝 열어봤다. 거기에는 뉴질랜드 친구들이 머리 두 개만큼 큰 이유가 적혀 있었다.
[Very young to be in a year 5/6 class however there is no space in year 4 classrooms.]
허! 참! 기가 차서 말이 안 나왔다. 기민이가 배정된 반은 바로 5,6학년 합반이었던 것이다. Year 3를 신청했는데 한 학년 위도 아니고 두세 학년 윗반에 넣다니. 아니 자리가 없으면 없다고 얘기라도 해줘야지. 이렇게 막무가내로 넣는 법이 어디 있나. 한 달 뒤면 갈 사람이라고 무시하는 건가? 그동안 학교에서 받았던 좋은 인상이 와르르 무너졌다.
사실 입학서류 오갈 때부터 조짐이 보이긴 했다. 유학원 측에서는 빠릿빠릿하게 일 처리를 하려고 노력하는 게 보였으나, 학교에서 보내온 서류는 생년월일, 여권번호, 신청 학년이 죄다 틀리게 기재되어 있었고, 정정된 이메일을 받기까지 한참이 걸렸다. ‘그래, 모두가 우리나라처럼 빨리빨리의 민족이 아니니까.’ 외국에서는 뭐 하나 하려면 시간을 넉넉히 잡아야 한다는 것을 익히 들었기 때문에 그 정도는 이해하고 넘어갔다.
하지만 이번엔 경우가 달랐다. 내 아이의 금쪽같은 4주를 엉뚱한 교실에서 보내게 할 순 없었다. 이런 엄마의 속도 모르고 기민이는 자기가 ‘형님 반’에 들어갔다는 사실에 무척 좋아했다. 한국에서도 아직 안 배운 나눗셈을 자기는 영어로 배웠다며 우쭐거렸다.
파파고에 의지하여 반 배정에 항의하는 장문의 메시지를 썼다 지웠다를 반복했다. 화는 나지만 앞으로의 관계를 생각하면 너무 강한 표현은 쓸 수 없었다. 한국어라면 정중하면서도 강경한 문장을 쓸 수 있을 것 같은데 이걸 영어로 쓰려니까 너무 힘들었다. 그때 뜬금없이 이 말이 떠올랐다.
‘You can do anything, but not everything.’
‘그래, 혼자서 끙끙대는 K장녀 마인드는 이제 버리자. 뭐든지 내가 다 할 수는 없는 거야. 내가 못 하는 것은 다른 사람한테 도와달라고 하면 되지. 이럴 때 도움받으려고 유학원에 학교등록 대행 맡긴 거잖아. 6개월 전부터 신청한 내용인데 이제 와서 자리가 없다고 하면 말이 안 되지. 입학허가서에 나온 대로 학년을 배정해주지 않은 것은 학교는 물론이고 유학원에도 책임이 있어.’
다음 날 아침 유학원에 자초지종을 이야기했더니, 밤새 고민한 것이 무색하게 한 방에 해결되었다. 학교 측에서는 바로 Year 3 반으로 옮겨 주며 유학 담당 선생님이 바뀌는 바람에 착오가 있었다고 사과를 했다. ‘착오라니 자리 없어서 5,6학년에 배정한 거 다 아는데.’ 어쨌든 문제는 해결되었고 나는 교양인이니까 파일에서 본 내용까지는 굳이 언급하지 않았다. 하루 동안 담임이었던 Richard 선생님은 기민이와 그새 정이 들었는지 반이 바뀐 이후에도 점심시간에 따로 만나 함께 닌텐도로 마리오 게임을 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