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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이 Oct 21. 2023

9. 스쿨링-아이의 학교 생활 (하)

아싸 엄마와 인싸 아들의 뉴질랜드 스쿨링

너의 무덤에서 웃어줄게     


  즐거운 마음으로 등교했던 아이가 어느 날 눈물이 그렁그렁해져서 돌아왔다. 무슨 일이냐고 묻자 서러움에 어깨를 들썩거리며 두서없이 이야기를 털어놨다. 정리해보면 이렇다. 같은 반에 ‘레이나’는 아이가 있는데, 아빠가 호주 사람, 엄마가 한국 사람이라 한국어를 꽤 잘했다. 레이나는 기민이와 함께 입학한 한국인 여학생의 ‘버디’이기도 했다. 한국말이 통하는 만큼 처음에는 여러 가지 도움을 주었는데, 어디서부터 관계가 틀어진 건지 새로 온 한국인 여학생과 레이나가 의기투합하여 기민이를 따돌리기 시작했다. 학교에서 공용으로 사용하는 색연필을 못 쓰게 하고, 선생님이 한국어를 모르신다는 점을 악용하여 자꾸만 못된 말을 했다. 기분이 나빠서 그 아이들을 피하면 쉬는 시간에도 점심시간에도 계속 따라다니면서 괴롭혔다고 했다.      


  도대체 무슨 못된 말을 했는지 묻자 ‘너가 죽으면 나는 너의 무덤에서 기뻐하며 웃을 것이다.’라고 말했단다. 독설이 분명한데 어색한 번역체 말투라 속으로는 조금 웃겼다. 마음을 가다듬고 진지한 얼굴로 아이에게 물었다. “그래서 너는 걔한테 뭐라고 그랬어?” “이제 너랑은 절교라고 했지! 근데 엄마 ‘절교’가 정확히 무슨 뜻이야?” 아이고 이런 강아지들. 다행히 신체적 폭력은 없었고, 시간이 많이 있다면 스스로 해결해 볼 만한 문제인데, 우리에겐 그런 여유가 없었다. 4주밖에 안 되는 그 소중한 시간을 불편한 마음으로 보낼 수는 없지 않은가? 이런 상황을 담임 선생님께 조심스레 말씀드렸더니, 이야기해 줘서 고맙다고 하시며 적극적으로 해결해 주셨다. 두 여학생을 불러 주의를 주셨고, 기민이가 다른 남학생 그룹과 어울릴 수 있도록 수업 시간과 놀이시간에도 신경 써 주셨다.      


  우리가 외국인이라 선생님이 더 신경 써주신 부분도 있었겠지만, 기본적으로 모든 교사와 학부모의 관계가 무척 가까워 보였다. 처음에는 공개 수업 날도 아닌데 학부모가 교실 안까지 들어와서 선생님이나 다른 학부모들과 편하게 이야기 나누다 가는 모습이 무척 신기했다. 아무래도 매일 교실까지 아이를 직접 데려다주고 데려오고 하기 때문에 선생님과 소통의 기회가 많았다. 자꾸 보니까 더 신뢰감도 쌓이고 아이가 어떻게 지냈는지 뭘 좋아했는지 이런 얘기들을 자연스럽게 나누게 됐다. 접촉이 많은 만큼 진상 학부모와의 트러블도 있을 것 같은데 이 나라에서는 어떻게 대처하는지 궁금해졌다.            




뉴질랜드 학교에서는 무얼 배우나     


  아이는 학교생활을 무척 즐거워했다. 정해진 교과서가 없이 선생님의 재량으로 수업이 이루어지는데, 한 가지 주제를 가지고 여러 과목에 걸쳐서 통합적으로 배웠다. 마침 새 학년의 시작이라 ‘나’를 주제로 수업이 진행되었다. 영어 시간에는 나를 소개하는 글을 썼고, 산을 좋아하는지 바다를 좋아하는지 그 이유는 무엇인지 등을 쓰고 발표했다. 미술 시간에는 앞으로 1년 동안 교실에서 사용할 사물함이나 개인 물품 등에 붙일 자신의 이름과 마크를 그려서 장식했다. 내가 생각하는 나의 얼굴을 그려 교실에 쭉 붙여놓았는데, 기민이가 그린 그림을 발견하고 무척 반가웠다. 아이 이름이 적힌 그림을 보니 정말로 이 학교를 다니고 있구나 하는 실감이 났다. 한국에서는 똑같은 글쓰기를 하고 그림을 그려도 그것이 잘 해내야 하는 ‘과제’로 느껴졌는데, 이렇게 물 흐르듯이 스며드는 교육을 하니 재미있는 ‘놀이’처럼 보였다.        


  유학생들도 기본적으로는 현지 학생들과 똑같은 수업을 듣고 활동을 하지만, 영어가 부족한 경우 추가적으로 ESOL(English to Speakers of Other Language) 수업을 들을 수 있었다. 적은 인원으로 개인 수준에 맞는 수업을 받을 수 있어서 많은 도움이 되었다. 왠지 뉴질랜드 학교엔 숙제가 없을 것만 같았는데 의외로 매일 조금씩 숙제가 있었다. 숙제 프린트에는 학부모가 코멘트를 써야 하는 칸이 있었는데, 매번 여기에 뭔 말을 써 보내야 하는가가 나의 최대 고민이었다. 사인만 휙 해 가는 거면 쉬웠을 텐데, 이것은 아이가 하는 숙제를 관심 있게 지켜보지 않으면 쓸 수 없는 것이었다. 학부모 사인이 확인과 감시라면 코멘트는 관심과 격려였다. 짧게라도 칭찬의 말을 썼더니 숙제를 대하는 아이의 태도가 달라졌다. 이번에는 엄마가 무슨 말을 써줄지 은근히 기대하며 신나게 숙제를 했다.  


  뉴질랜드에서의 일상은 완전히 신선놀음이었다. 하교 후에 학교 놀이터에서 놀고, 학교가 문 닫으면 바다에서 놀고, 배고프면 근처에서 바비큐 해 먹고. 정말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놀았다. 지금 아니면 언제 공부 걱정, 학원 걱정 없이 이렇게 놀아보겠나 싶어 그냥 자유를 만끽했다. 즐거운 시간은 왜 이렇게 빨리 지나가 버리는지 어느새 스쿨링 마지막 날이 다가왔다.         


   


 




태권도복을 입은 소년     


  초등 남아에게 ‘태권도’란 절대적 강함의 상징이다. 동네의 웬만한 학교 폭력 사건은 태권도 관장님 말 한마디로 해결될 정도로 그 위세가 대단하다. 일부러 세분화시킨 빨주노초파남보 띠를 하나씩 딸 때마다 아이들의 자신감은 수직 상승한다. 뉴질랜드에 오기 얼마 전에 국기원 심사를 받고 1품을 땄으니 기민이의 태권도 부심은 하늘을 찌를 듯했다. 전 세계에 태권도를 알리겠다는 마음으로 뉴질랜드까지 도복을 챙겨왔고, 괜히 그거 입고 옆돌기하고 발차기하면서 동네를 떠돌았다. 사실 엄마 눈에는 기안84 만화에 나오는 우기명 어린 시절처럼 보였지만, 부끄러운 마음을 내색하지 않고 멋지다 최고다 추켜세웠다. 그게 좀 과했던 것일까. 기민이는 환갑잔치에 제일 고운 옷을 입고 가는 할머니처럼, 스쿨링 마지막 날 의상으로 태권도복을 골랐다. 진정한 핵인싸만이 소화할 수 있는 옷을 입고 위풍당당하게 등교했다. 내 배에서 이런 애가 나오다니 정말 미스터리다.           

       

  그날 수업을 모두 마치고 선생님은 특별한 시간을 마련해 주셨다. 큰 스크린에 구글 맵을 띄워 기민이가 사는 나라, 다니는 학교, 집을 찾아서 보여주셨다. 그리고 한국이나 기민이에 대해 궁금한 점이 있으면 질문하라고 하셨다. 아이는 용케 질문들을 다 알아듣고, 서툴지만 자신이 할 수 있는 영어 표현을 총동원하여 성의껏 답했다. 어떤 친구가 우리가 사는 아파트를 보고는 그 건물이 통째로 우리 집인 줄 알고 부자냐고 물어서 한바탕 웃음바다가 되었다.  뉴질랜드에서는 대도시가 아니면 모두 낮은 건물에 살기 때문에 고층 건물에 사는 것이 신기한 모양이었다. 선생님은 기민이에게 상냥함으로 반 친구들에게 모범이 되어주어 고맙다는 상장을 수여하셨다. 그리고 반 아이들과 함께 찍은 사진과 메시지 그리고 뉴질랜드 문화에 대한 동화책을 선물로 받았다.      



  이제는 정말로 헤어질 시간이 왔다. 반 친구들에게 고마움의 표시로 초콜릿을 나누어주었다. 초콜릿만 받고 쌩 가버리는 것이 아니라 한명 한명이 기민이와 눈을 맞추고 고맙다고 잘 가라고 인사를 해줬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모두 진심으로 대해 줬음을 느낄 수 있었다. 특히 친했던 아이들은 허그를 했는데, 꼭 미리 안아도 되겠냐고 허락을 구했다. 놀 때도 장난으로 툭툭 치고 이런 경우가 전혀 없었다. 나와 타인의 몸에 대한 존중을 어려서부터 교육 시키는 것이 매우 인상 깊었다.      


  많은 친구들이 인사를 나누고 집에 갔는데 끝까지 가지 않고 주변에 맴돌고 있는 아이가 있었으니, 바로 레이나였다. 아까부터 기민이랑 인사를 하려고 하는 모습이 보였으나 다른 아이들이 많아 타이밍이 놓친 것 같았다. 선생님이 이리 와서 기민이랑 인사하라고 부르자 레이나가 가까이 다가왔다. 허그를 할까 말까 손이 오르락내리락하다가 한국말로 “안녕, 잘 가.”하고는 부끄러운 듯이 쪼르르 달려갔다. 아마도 미운 정 고운 정이 들었나 보다. 우여곡절도 조금은 있었지만, 결국 따뜻한 마음과 좋은 추억만 안고 뉴질랜드 스쿨링을 무사히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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