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싸 엄마와 인싸 아들의 뉴질랜드 스쿨링
뉴질랜드 학교에는 ‘모닝티’라는 시간이 있다. 그야말로 오전에 차 한 잔 하듯이 가볍게 간식을 먹고 밖에서 뛰어놀 수 있는 시간이다. 오랫동안 책상 앞에 붙어있기 어려운, 아이들의 특성을 잘 배려한 처사라고 생각한다. 아침 식사를 못 한 아이들은 배를 채울 수 있고, 뛰고 싶어 온몸이 근질근질한 아이들에게는 에너지 발산의 좋은 기회이다. 여기저기 참견하러 다니는 걸 좋아해서 항상 발이 5cm쯤 붕 떠 있는 것 같은 우리 아들도 모닝티 시간을 제일 좋아했다. 간식으로는 보통 과일이나 견과류, 에너지바 같은 것을 먹는데 학교에 따라 초콜릿이나 사탕이 허용되는 곳도 있다. 알레르기 문제 때문에 나누어 먹을 수는 없고, 본인이 가져온 것만 먹어야 한다. 모닝티가 한국에도 도입되면 좋을 텐데, 있는 체육 시간도 줄이는 마당에 쉬는 시간으로 30분이나 할애하는 것은 아마 불가능하겠지?
한국에서 편안하게 급식만 먹이다가 갑자기 도시락을 싸려니 긴장이 됐다. 가뜩이나 시차 적응이 덜 되어 아침에 일어나는 게 고역인데, 도시락이라니!! 우선 동네 마트에 가서 ‘국민 도시락통’이라 할 수 있는 Sistema 런치 박스를 샀다. 간식과 점심밥을 한꺼번에 담아갈 수 있어 편리해 보였다. 과일은 전날에 씻어서 잘라두고, 간식도 미리 통에 담아 두는 식으로 최대한 꼼수를 부렸다. 점심 메뉴는 고민할 것 없이 샌드위치로 정했다. 참치마요, 계란마요, 햄 치즈 이렇게 내용물만 바꿔가며 슥슥 만들어 보냈다. 괜히 한식으로 싸갔다가 현지 아이들이 낯선 냄새에 불쾌해할 수도 있고, 한식으로 도시락 싸는 게 훨씬 손이 많이 가니까. 사실 후자의 이유가 더 컸다. 하하하.
한동안은 아이도 별 불만 없이 샌드위치를 먹었다. 그러다 어느 날 메뉴 주문이 들어왔다. “엄마! 나도 밥 먹고 싶어. 유부초밥 싸 줘.” 한국 유학생들끼리 모여 점심을 먹을 기회가 있었는데 그중에 누가 밥을 싸 온 모양이었다. 아니, 자기는 삼시세끼 맥도널드만 먹어도 좋다던 녀석이 밥 타령이라니. 입 짧은 아이가 밥을 찾으니 반가우면서도 매일 아침 쌀밥을 지어야 한다는 생각에 부담스러웠다. 게다가 우리가 지내는 숙소는 실내에서 취사를 할 수가 없어서 실외에 있는 바비큐 기계에 달린 가스레인지를 써야 하는데, 아침 댓바람부터 불 줄이고 뜸 들이고 어떻게 밥을 짓냐고! 밥 먹이기에 지극정성인 엄마들은 한 달 살기에 쿠쿠 밥솥을 들고 가기도 하는 모양인데, 나는 원체 짐 무거운 거 딱 질색이고 대충대충 사는 엄마라 밥솥을 가져온다는 건 생각조차 안 했다. 아침부터 냄비 밥 하기는 싫고, 밥은 먹여야겠고 이를 어쩐다.
내가 지극정성으로 밥은 못 해도 지극정성으로 검색 질은 할 수 있지. 이런저런 검색 끝에 나에게 딱 필요한 물건을 찾아냈다. 그것은 바로 전자레인지로 밥을 지을 수 있는 ‘라이스 쿠커’였다. 당장 사러 마트에 갔더니 세일까지 하고 있었다. 집에 와서 두근대는 마음으로 열어봤는데, 딱히 특별한 장치는 없고 2~3인용 밥솥 크기의 그냥 빨간 플라스틱 통이었다. ‘이걸로 정말 밥이 되긴 하는 거야?’ 적당히 불린 쌀에 물을 넣고 전자레인지에 20분간 돌렸다. 제법 밥 냄새가 솔솔 올라왔다. 뚜껑을 열어보니 “우와!!” 정말 맛있는 ‘죽’이 완성되었다. 생각보다 물 조절이 어려웠다. 두 번의 실패 끝에 세 번째에는 제법 그럴듯한 밥이 지어졌다. 작고 가벼워서 어디든지 휴대할 수 있고, 버튼만 눌러 놓으면 20분 만에 밥이 되니 요물 같은 아이템이었다. 해외여행의 든든한 동반자여, 내 너는 꼭 한국에 데려가리라.
빨간 밥통 덕분에 점심 메뉴의 레퍼토리가 다양해졌다. 유부초밥, 스팸 주먹밥, 참치마요 주먹밥, 볶음밥 등등 만들 땐 수고스러웠지만, 맛있게 먹고 싹 비워온 도시락통을 보면 참 뿌듯했다. 그렇게 도시락 싸기가 익숙해질 무렵 스쿨링은 끝이 났다. 내가 직접 도시락을 싸보기 전에는 우리나라 급식이 얼마나 편하고 고마운 제도인지 미처 깨닫지 못했다. 영양가 있는 식단에 다양한 국과 반찬, 디저트도 주고 학부모 보라고 매일 사진까지 올려주는 센스! 대한민국 급식 시스템에 무한한 감사를 보낸다. 역시 사람은 집 떠나서 고생을 해봐야 철이 든다는 말이 맞는가 보다.
나는 어학 공부를 좋아한다. 왜냐하면 해외 드라마를 좋아하기 때문이다. 드라마 좋아하는데 왜 어학 공부를 하나 이상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는데, 순서는 이렇다. 처음에 자막을 켜고 외국어로 된 드라마를 본다. 잘생긴 남주의 매력에 푹 빠져서 몇 시간씩 본다. 설거지할 때, 빨래 갤 때 그냥 계속 틀어둔다. 그리고 운전할 때는 그 드라마 OST를 듣는다. 이쯤 되면 계속 반복적으로 나오는 단어나 문구가 들려서 나도 모르게 따라 하게 된다. 자막 없이 내용을 이해하고 있는 듯한 착각도 든다. 외국어 리스닝의 인풋이 쌓인 만큼 아웃풋을 내고 싶어 진다. 뭐든 좋으니 그 나라 말로 씨부리고 싶어지는 지경에 이르는 것이다. 나는 그렇게 중국어와 영어를 공부했다. 부모는 자식의 거울이라고 하니, 엄마인 내가 영어 공부를 열심히 하는 모습을 보여주면 아이도 따라서 열심히 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뉴질랜드 한 달 살기를 준비하면서 6개월간 영어 과외를 받았고, 현지에 가서도 꼭 어학원에 다녀야겠다 마음먹었다.
스쿨링 할 동네에 며칠 적응을 하고, 숙소에서 제일 가까운 어학원에 찾아갔다. 간단히 커리큘럼이랑 시간표, 수업료 정도만 알아보러 간 거였는데, 데스크 직원 말빨에 넘어가 갑자기 레벨 테스트를 보게 됐다. 가벼운 시험이겠거니 했는데 이게 웬걸? 문제의 양이 너무 많았다. A4 용지 10장 분량에 앞뒤로 꽉꽉 채운 문제를 1시간 안에 풀어야 했다. 문법, 독해, 작문 등등 영역도 다양하지. 객관식이면 찍기라도 할 텐데 주관식 문제가 꽤 많았다.
잠시 당황한 건 사실이나 곧 정신을 차렸다. 비록 그간 엄마 노릇하느라 초야에 묻혀 지냈으나, 나는 다년간 시험과 사교육에 길들여진 대한민국의 딸이 아닌가. 우선 자신 있는 문제만 스피디하게 쭉쭉 풀고 긴가민가한 문제는 별표를 해두었다. 독해 문제는 지문이 길어서 시간을 많이 잡아먹기 마련인데, 그걸 일일이 다 읽을 필요는 없지. 문제가 묻는 게 무엇인지 파악하고 필요한 단락의 핵심 단어에만 줄을 그어가며 읽었다. 출제자들은 수험자를 헷갈리게 하려고 앞에 나온 내용을 미끼로 삼지만, 대부분 결론은 마지막 단락에 있는 법. 빙고! 자, 이제는 작문이다. 괜히 있어 보이려고 어려운 단어 쓰지 말고 최대한 쉬운 말로 나의 이야기를 쓰자. 모른다고 빈칸으로 두지 말고 아무 말이라도 쓰면 부분 점수받을 수 있다!
이게 뭐라고 나이 40에 손톱을 깨물어 가며 하얗게 불태웠다. 시험 결과는 100점 만점에 80점. 100점만 취급해 주는 나라에 살다 보니 이게 어느 정도 레벨인지 감도 안 왔다. 선생님은 이 정도면 꽤 잘 나온 점수라며 나를 제일 높은 반에 배정했다. 그때까지는 기분이 좋았다. 그때까지는.
다음 날 설레는 마음으로 학원에 갔다. 다양한 인종의 학생들이 직업을 얻거나 영주권을 따기 위해 영어를 배우고 있었다. 선생님이 프린트를 나누어주고 오늘의 토픽에 대해 옆 사람과 이야기해 보라고 했다. 프린트를 보는 순간 깨달았다. ‘아... 여기는 내가 있을 곳이 아니구나.’ 거기에는 이렇게 쓰여있었다.
What can we do in terms of social, economic and environmental aspects for sustainable development? (지속 가능한 발전을 위해 사회, 경제, 환경적 측면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아니, 나는 이걸 한국말로 얘기하라고 해도 못 하겠는데, 이걸 어떻게 영어로 하냐고요~~~! 나는 ‘주말에 뭐 할 계획이에요?’ ‘이 주변에 맛있는 레스토랑은 어디인가요?’ 이런 영어 회화를 기대하고 왔는데, 수업 내용은 완전히 딴판이었다. 알고 보니 여기는 IELTS 시험을 준비하는 반으로 유학생들이 대학에 입학하기 위해 보는 시험이라 내용이 아카데믹할 수밖에 없었다.
꿀 먹은 벙어리로 수업을 마치고 데스크에 가서 반 배정이 잘 못 된 것 같다고 말했다. 직원은 내 정보를 찾아보더니 이 점수로는 그 반이 맞고 다른 반으로는 갈 수 없다고 했다. 선생님께 항의해 봐도 소용이 없었다. 너뿐만 아니라 많은 한국 사람들이 시험에는 강한데 Speaking이 약하다며 힘내라고만 하셨다. 아놔 괜히 열심히 했어. 울며 겨자 먹기로 수업에 들어갔는데, 어제도 그제도 오늘도 지구상의 온갖 사회 문제는 다 이 수업에서 고민하는 듯했다. 레벨에 안 맞는 공부를 한다는 것이 이렇게 괴로운 일인 줄 몰랐다. 주 5일 수업료를 덜컥 결제해 버린 나의 열정이 원망스러웠다. “아니 청정 뉴질랜드에 와서 상큼한 바람맞으며 매일 카페 브런치 투어를 해도 모자란데, 애 학교 간 황금 시간에 내가 ‘세계인구 증가에 따른 식량문제’를 고민해야겠냐고! 그것도 영어로! 으아아아악!”
한계에 다다른 나는 바로 다음 날부터 자체 휴강에 들어갔다. 양심상 다 빠질 순 없고, 주 3회 가는 걸로 합의를 봤다. 혼자 놀기 심심해서 같은 학교에 스쿨링 중인 한 엄마를 꼬셨다. 영어 이름이 케이트인 그 엄마는 나보다 영어를 잘해서 학원 수업도 착실히 듣고 있었는데 그만 나의 악마 같은 꼬임에 넘어가고 말았다. 우린 예쁜 카페에 가서 브런치를 먹고 신나게 수다를 떨었다. 한국말로 어른의 대화를 나누는 것이 대체 얼마 만인지. 어떤 파스타 소스가 맛있을까, 마트 구경만 몇 시간씩 해도 깨가 쏟아졌다. 뭘 해도 학원에 앉아있는 것보다 백배 천배 재미있었다.
사실 한 달 살기 초반에는 영어에 몰입하기 위해서 웬만하면 한국인과 가까이 지내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하지만 낯선 외국 생활에서 가장 위안이 되고 힘이 되는 것은 역시 같은 한국 사람이었다. 케이트와 나는 학원 땡땡이를 치며 함께 시간을 보냈고, 다행히 아이들도 결이 비슷하여 종종 같이 놀면서 영어로만 생활하는 긴장감을 해소했다. 물론 엄마가 학원을 안 갔다는 사실은 비밀에 부쳤다. 아들이 학원 가기 싫다고 할 때는 세상이 두 쪽 나도 꼭 가야 할 것처럼 잡도리를 했는데, 내가 그 입장이 되어 보니 너무 이해가 갔다. 싫다고 할 때마다 학원을 다 관두게 할 수야 없겠지만, 힘들어하는 그 마음만큼은 이해하고 다독여주는 엄마가 되어야겠다고 다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