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책 <리본>을 읽다
시간표를 본다. 전담이 두 시간이나 들어있는 날이다. 마음이 가벼워진다. 어린이들은 영어교실로, 체육관으로 갈 것이고 나는 빈 교실에서 느긋하게 커피를 마실 것이다. 도서관에 갈 수도 있다. 날이 선선하다면 모과나무가 있는 상상놀이터까지 산책을 나갈 수도 있다. 아침 시간, 솜사탕 같은 전담 시간을 생각하며 할 일과 하고 싶은 일을 생각하는데 컴퓨터에서 메시지 창이 깜빡인다. 불길하다.
' 2교시, 3학년 0반 보결수업 부탁드립니다. 담임 선생님 아이가 아파서 병원에 가야 하는 상황입니다. 급하게 부탁드려 죄송합니다.'
솜사탕은 반으로 줄었다. 물론 당연히 해야 할 일이다. 식구가 갑자기 아플 수도, 집안일이 생길 수도 있다. 그래도 한 시간만 하면 되니 괜찮다. 2교시, 우리 반 수업을 마치면 바로 가야 해서 준비물을 챙겨놓기로 했다. 노란 바구니에 물과 안경, 그림책을 넣었다. 그림책 <리본>은 보결 수업에 들어갈 때면 꼭 들고 간다. 일 년에 한 번 만나는 어린이다. 어쩌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만나는 어린이일 수도 있다. 교과수업만 달랑하고 나오기엔 좀 섭섭하다. 잠깐이라도 그림책의 맛을 보여주고 싶다.
<리본>은 보는 순간 매료되었다. 교과서 크기의 반 밖에 안 되는 판형도, 짙은 파란색 바탕도 노란 옷을 입은 리본 체조 선수도 마음에 들었다. 무용수는 무슨 동작을 하려는 걸까? 곧 몸을 일으키는 동시에 막대를 돌리면서 점점 큰 원을 그어갈 것이다. 끝에서 달랑이는 노란 끈이 상상을 자극한다.
책 밖으로 늘어뜨린 헝겊 끈은 어렸을 때부터 봐오던, 성경책이나 두꺼운 문학작품에 끼어있던 책갈피를 닮았다. 그런데 뭔가 이상하다. 책갈피 달린 데가 위가 아니다. 아래쪽이다. 표지 속 주인공은 몸을 숙인 채 책 모서리에 막대를 바짝 대고 있다. 리본은 바로 그 아래에서 흔들린다.
책 밖에 있는 노란 끈은 책 속 그림과 이어지면서 페이지마다 새롭게 변신한다. 쥐꼬리가 되기도 하고 신발끈으로 변하기도 한다. 쇠창살이 되기도 하고 뱀의 혀가 되기도 한다. 노란 끈 하나로 작가가 펼치는 세계는 산뜻하다가도 으스스해진다. 웃음이 나올 듯하다가도 뭐지 하며 갸우뚱거리게 된다. 작가 '아드리앵 파를랑주'는 프랑스 작가다. 이 책으로 2018 볼로냐 라가치상 논픽션 부문 스페셜 멘션 상을 받았다.
5학년 우리 반 어린이들과 이 책을 읽었다. 표지만 보여준 뒤 첫 장면은 숨긴 채 물었다. 이제부터 이 노란 끈을 이용한 장면들이 펼쳐질 거야, 여러분이 작가라면 첫 장면에 무엇을 그리고 싶니? 어떤 장면이 나오면 기분이 좋을까? 하고 물었다. 리본은 원래의 쓰임에서 마음껏 벗어날 것이라고 덧붙이기도 했다. 어린이들은 선뜻 답을 내지 못하고 우물쭈물한다. 힌트를 주었다. 어릴 때 기분을 좋게 했던 물건을 떠올려 보라고 했다.
한 어린이가 풍선이요, 하고 말했다. 기분 좋게 답을 맞혔다. 풍선이라는 답이 나왔으니, 이제 질문은 한걸음 더 들어간다.
-이 작가는 하고 많은 물건 중에서 왜 첫 페이지에 풍선을 그렸을까?
-보는 사람이 기분 좋으라고요!
괜찮은 답이다. 풍선을 보고 있으면 괜히 기분이 좋다. 조금 더 생각해 보라고 했다.
- 풍선을 손에 들 때는 축제나 무슨 행사, 그러니까 아주 기분이 좋은 날이잖아요. 그러니까 기분 좋게 뭔가를 시작하라는 뜻인 거 같아요.
박수가 터져 나왔다. 답을 한 어린이에게 다가가 노란 리본을 살짝 쥐게 했다. 책을 느리게 흔들었다. 풍선이 흔들거리는 거 같았다. 어린이들은 부러운 눈빛을 했다. 다음에는 노란 끈을 쥐어 봐야지 하는 듯했다.
3학년 교실에 들어갔다. 낯선 선생님이 들어오자 어린이들은 궁금해한다. 누구세요, 묻는다. 간단히 소개를 마친 뒤 그림책을 보여주겠다고 했다. 교과서를 펴라고 하지 않으면 어린이들은 마냥 좋아한다. 표지를 보여둔 뒤 세 번째 장면을 펼쳤다. 알라딘의 램프를 닮은 듯한 주전자가 나온다. 주전자는 묘하게 동화적 분위기를 자아낸다. 추운 겨울 난로 위에 얹어 놓은 주전자, 주전자에서는 찻물이 보글보글 끓고 있다.
이 장면은 결핍이 주는 상상력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화면에 드러난 정보는 주전자와 주전자에서 나는 뜨거운 김, 그리고 주전자를 쥔 노란 손뿐이다. 낱말은 딱 하나 '차'이다. 적은 정보로 이루어진 장면이지만 얘깃거리가 있어 보인다. 그래서 장면에 집중하게 된다. 어린이들에게 물었다.
-주전자에 담긴 차는 무슨 차일까, 아니 무슨 차였으면 좋겠니?
-코코아요!
-코코아 좋지! 이렇게 자신이 먹고 싶은 걸 말하면 된단다
-유자차요! 우리 할머니가 만든 유자차 맛있어요.
-그렇구나. 건강에 좋은 차지.
다음 질문으로 넘어간다.
-그런데 차를 따라주는 손은 누구 손일까, 누구 손이면 좋을 거 같니?
질문이 떨어지자 여기저기에서 답이 나온다. 어린이들은 엄마, 할머니, 이모를 외쳤다. 저마다 친한 식구나 친척을 떠올리는 듯했다. 이때 맨 뒤에서 간절한 눈빛으로 손을 드는 어린이가 있었다. 어린이는 의자에서 엉덩이를 반쯤 든 채 힘을 다해 팔을 뻗고 있었다. 그 어린이를 시켰다.
-손흥민 손이요!
모두 입을 다물지 못했다. 앞에 있던 남자 어린이들은 일제히 뒤를 돌아 그 어린이를 보았고 동시에 뭔가 억울한 표정을 지었다. 손흥민 같은 스타 이름이 나올 줄은 꿈에도 몰랐던 것이다. 괜히 이모, 할머니 얘기를 했네 하는 얼굴이었다. 그 사이에서 누군가 반격을 했다.
-근데, 손흥민은 경기 중인데 뜨거운 차를 어떻게 마셔?
어린이들은 손흥민을 말하는 순간 손흥민이 뛰는 경기장으로 모두 입장해 있었다. 축구 경기를 관람하고 있는 것이다. '손흥민이요'를 외친 어린이가 어떤 답을 할지 궁금했다. 궁지에 몰린 건 아닌가 염려가 되기도 했다. 뒤에 있는 어린이는 침착하게 대답을 했다.
-그 차는 손흥민 감독이 만들어 온 거야, 손흥민이 경기를 많이 해서 지칠까 봐 보약을 해왔어.
걱정은 쓸데없었다. 뒤에 앉은 어린이는 스토리텔러였다. 하지만 반격은 이어졌다.
-그래도 너무 뜨겁잖아!
-응, 지금 먹을 게 아니라 경기 전에 미리 따라 놓고 전반 쉴 때 마실 거야.
이로써 평정이 되었다. 어린이들은 친구의 말을 수긍하는 듯 질문을 멈추었다. 우리는 뒤에 나오는 몇 장면을 더 면서 즐겁게 그림책 읽기를 마쳤다. 다음 날 오후, 보결 수업을 했던 그 교실을 찾았다. 선생님 안부도 묻고 손흥민을 얘기했던 어린이 얘기도 들려줄 생각이었다.
-아, 정말요! 그 애가 그렇게 차분하게 그림책을 봤다고요! 그런 모습 본 적이 없어서 신기해요, 평소에 수업을 방해해서 친구들이 힘들어하는 어린이거든요..... 집에서 거의 돌봄을 받지 못하는 어린이예요.....
교실로 돌아오는 내내 마음이 무거웠다. 다른 어린이들처럼 엄마나, 할머니 이름을 말하지 않고 손흥민 이름을 꺼낸 까닭을 생각해 보았다. 손흥민 선수가 너무 좋아서 그럴 수도 있지만, 어쩌면 그 어린이는 자신을 돌봐주는 다정한 보호자가 없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문득 십 년도 훨씬 지난 일이 떠올랐다. 그림책으로 다양한 시도를 하면서 열정적이 수업을 하던 시절이었다. 무슨 자신감이었는지 학년 선생님들에게 도움이 필요한 어린이 한 명씩 방과 후에 보내달라고 했다. 4학년 어린이 다섯 명이 모였다. 나의 야심 찬 계획은 첫날부터 와장창 무너졌다. 나 쟤 싫어요, 하며 날카롭게 감정을 드러내는 건 양반이었다. 그림책을 읽어주는데 아무 반응이 없었다. 눈도 반짝이지 않았고 입도 달싹이지 않았다.
그림책 <비가 오는 날에>는 읽을 때마다 어린이들이 좋아했다. 내 경험 속에선 재미가 검증이 된 책이었다. 그러나 이 어린이들 앞에서는 이전의 경험이 통하지 않았다. 땀이 났다. 몸짓과 구음, 모든 수단을 써서 어린이들의 마음을 열어보려 애썼다. 애쓰는 게 안타까웠는지 어린이들은 조금씩 반응하기 시작했다. 등장했던 인물들이 구름 위에서 뒤집힌 우산을 타고 노는 장면에 이르렀다.
이 장면은 어린이들이 꽤 좋아하는 장면이다. 기대를 하며 질문을 했다.
-만약에 이 뒤집어진 우산 배에 한 사람씩 태운다면 누구를 태우고 싶니?
이건 그냥 상상놀이었다. 친구 이름을 대도 좋고 엄마나 아빠, 동생을 말해도 좋았다. 그런데 아무도, 정말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보채듯 두세 번 더 물으니까 겨우 입을 떼었다.
-없는데요.
-저도 없어요.
-아무도 태우기 싫어요!
어떻게 수습해야 할지 난감했다. 이대로 넘어가면 안 될 거 같아 질문을 고쳤다. 아주 마음에 들지 않아도 된다고, 조금이라도 마음에 드는 사람으로 정해보라고 했다. 그제야 겨우 엄마, 아빠, 동생을 태우겠다고 했다.
끝내 남자 어린이 하나는 아무도 태우고 싶지 않다고 했다. 그 어린이는 4학년이 되도록 친구 하나 없는, 완벽한 외톨이였다. <홍당무>의 주인공처럼 얼굴에 주근깨가 가득했던 그 외톨이 는 점심시간이면 홀로 도서관을 찾곤 했다. 책을 보기도 하고 창밖을 보기도 했다. 아무도 우산 배에 태우지 않겠다는 외톨이 어린이를 조금 더 설득해보기로 했다.
-응, 엄마도 아빠도 우산 배에 태우고 싶지 않다면 선생님이라도 태워줄래?
-아직 안 돼요? 선생님하고 만난 지 얼마 안 돼서 친하지 않잖아요.
내심 놀랐다. 상당히 표현이 논리적이었다. 나는 조금 더 친해지면 우산 배에 태워달라고 했고 그 어린이는 그러겠다고 했다. 그렇게 수업을 마쳤다. 여러 날이 지나고 약속처럼 조금 친해졌을 때 우리는 교문 밖으로 나갔다. 특별히 브라보콘을 사주겠다고 하자 갑자기 친한척하며 외톨이와 다른 친구가 내 팔짱을 끼었다.
기다란 학교 담장을 지나 브라보콘을 다 먹을 즈음 헤어지자고 했다. 교실로 돌아가 일을 해야 했다. 하지만 어린이들은 특별한 소풍을 더 이어가고 싶은 듯했다. 나를 놔주지 않았다. 아무도 우산 배에 태우기 싫다던 외톨이는 자기 집까지 가자고 했다. 안된다고 어서 학교로 돌아가야 한다고 하다가 결국 아이 손에 이끌려 집 앞까지 갔다. 어린이는 빠르게 집 안으로 들어가더니 햄스터를 가지고 나왔다. 처음으로 그 어린이의 밝은 표정을 본 듯했다. 외톨이는 햄스터를 내 손에 쓱 올려주며 쓰다듬어 보라고 했다.
세상에 태어나 처음으로 햄스터를 만지게 되었다. 긴장했지만 그 어린이를 위해 용감하게 햄스터를 만졌다.
이상하게 손흥민을 외친 어린이와 햄스터 어린이가 겹쳐진다. 무언가 닮은 듯했다. 손흥민을 좋아하는 어린이는 자신의 상처를 공격적으로 푸는 듯했고 햄스터를 기르는 어린이는 햄스터 하고만 놀며 현실을 도피하는 듯했다.
손흥민을 좋아하는 어린이와 그림책을 읽는 상상을 했다. 그 어린이는 번번이 내 상상을 벗어나 싱싱한 이야기들을 꺼낼 것만 같았다. 담임 선생님께 한번 얘기해 볼까 생각도 했지만 여러 사정으로 책 읽기는 실행하지 못했다. 그 어린이 이야기를 더 듣지 못한 게 못내 아쉽다.
<리본>은 교과 수업시간에도 워밍업을 하듯 한두 장면씩 아껴보는 책이다. 몇 년 전 5학년을 가르치면서 옆반과 교환 수업을 한 적이 있는데 그때 나는 도덕 수업을 했다. 일주일에 한 번 들어가는 수업인데 진도를 나가기 전 <리본>을 한두 장면씩 보여주었다. 그 반에는 4학년 때 담임하던 어린이들이 있었다. 그 친구들은 함께 나와 그림책을 읽은 추억이 있어서 그런지 열심이었다.
그중 연수 눈이 빛났다. 연수는 4학년 때 동생 문제로 힘들어했다. 동생이 도무지 형 말을 듣지 않으니 속이 상할 대로 상해 있었다. 동생 때문에 힘든 어린이 대부분은 동생이 태어나기 전 차지 하던 부모님 사랑이 반으로 줄어드는 데서 정서적, 심리적 충격을 받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부모님은 둘째를 돌보는데 급급하여 첫 째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한다.
사랑이 반으로 줄어든 것도 못 마땅한데 사랑을 앗아간 동생은 말도 듣지 않는다. 게다가 뻔뻔하고 의기양양하다. 연수는 창의적이고 표현력도 좋은 어린이지만 이런 배경으로 인해 작은 일에도 예민했다. 글을 쓸 때면 서술어가 억울했다, 힘들었다, 잘 안 됐다 같은 부정어가 나오곤 했다.
곡예사가 등장하는 장면을 펼쳤다.
-지금 곡예사에게는 뭐가 필요할까?
-용기요.
-집중력이요.
-마인드컨드롤이요.
저마다 잘 짚어낸다. 곡예사에게 필요한 덕목들이다. 연수도 손을 든다.
-연수는 또 뭐가 필요한 거 같니?
-균형이요.
-균형! 그렇지.
-그런데 혹시 이 곡예사뿐만 아니라 우리에게도 살면서 균형이 필요할 때가 있을까, 있다면 언제일까....
연수가 답을 했다.
-저는 동생이랑 사이에 균형이 필요해요.
-동생하고?
연수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올지 궁금했다. 4학년 때 일을 잘 아는 나로서는 연수의 답이 기다려졌다.
-네, 동생과 나 사이에 균형을 잘 잡으면 싸우지 않아요.
-아, 그럼 지금은 전보다 균형을 잘 잡는 걸까.
-네, 어느 선을 넘어가면 싸우는 걸 아니까 균형을 잡으면서 싸우는 상황까지 안 가게 해요.
-그럼 이제는 예전보다 동생과 잘 지내겠구나.
-네......
연수는 마지막 말을 하며 웃었다. 생각해 보니 도덕 수업을 할 때 연수 표정이 4학년 때보다 밝았던 거 같았다. 다행이다. 힘든 시간을 견디면서 연수가 단단해지고 성숙해진 듯하여 기뻤다.
그림책을 읽을 때면 해석이 잘 안 되는 장면이 나올 때가 있다. 거미가 나오는 장면이 그렇다. 거미를 무서워하다 보니 이 장면에서 머물게 되지 않는다. 얼른 넘기고만 싶다. 어린이들에게 고민을 고백했다.
-얘들아, 선생님은 작가가 많고 많은 동물 중에서 거미를 골라 실었는지 모르겠어. 누가 설명 좀 해줄래....
갑자기 교실은 진지한 분위기가 되었다. 선생님을 위해, 멋진 답을 찾기 위해 모두 심각하게 생각 중인 것이다. 답을 얻은 듯 바윰이가 번쩍 손을 들었다.
-거미는요, 스스로 집을 짓잖아요. 그런 거처럼 사람도 자신의 집을 지으라는 뜻이 있는 거 같아요. 그리고 여기서 집은 그낭 사람들이 사는 건물이 아니라 마음의 집인 거 같아요.
어린이에게 배우는 순간이다. 나도 어린이들도 모두 공감했다. 바윰이는 4학년 5학년 2년간 담임한 어린이다. 책을 읽으면서 생각을 깊이 하는 어린이로 때로는 독서수업이 끝나면 쉬는 시간에도 친구들과 논쟁을 하곤 했다.
이 그림책에서 좋아하는 장면이 여럿 있는데 그중 하나가 바로 '영감'이다
짐작했지만 어린이들은 영감의 낱말 뜻을 몰랐다. 나이 든 영감님을 부르는 걸로 생각하는 어린이가 두어 명 있었다. 한자 뜻풀이부터 했다. 靈(신령령)에 感(느낄 감)이다. 뜻은 신령스러운 예감이니 느낌, 또는 창조적인 일의 계기가 되는 기발한 착상이나 자극을 말한다. 뜻을 알았으니 이제 장면을 해석해야 한다. 번개가 치듯 영감이 다가올 때 이 연필로 무언가를 써 내려가라는 뜻일까, 우리는 곰곰이 생각했다.
-우리가 늘 쓰는 연필로 어떤 결과물을 만들어 낼까. 노란 끈은 여러분이 만들어 낼 결과물이겠지. 생각해 보자. 올 일 년을 생각해도 좋고 좀 더 길게 보아도 좋아.
어린이들은 자신이 없는지, 자신의 생각이 답이 될지 판단이 안 서는지 말하기를 주저했다. 참지 못하고 나부터 얘기했다.
-어제 우리가 시를 썼는데 그때 영감이 찾아오지 않았을까, 노란 끈은 시 한 편!
그제야 어린이들은 알겠다는 듯 끄덕였다. 이어 내 계획을 말했다.
-선생님은 이 연필로 부지런히 글을 쓰고 그림을 그려서 그림책을 내려고 해. 영감이 오지 않을 때도 있지만 꾸준히 하다 보면 어느 순간 영감이 오지 않을까. 생각지 않는 시간에 번개가 치듯 말이야.
말을 해 놓고 보니 마치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에 나오는 키팅 선생 된 듯했다. 그 영화를 보고 나서 키팅선생님 같은 수업을 하고 싶어 애달파했다. <리본>을 보여 줄 때면 분수처럼 갖가지 생각이 피어나고 영화 같은 수업을 하는 기분이 들곤 했다. 어린이들은 의지를 자신만의 노란 끈에 대해 말했다.
-저는 배움 공책을 끝까지 다 쓰려고요
-저는 만화를 좋아해서 웹툰 만화 그릴 거예요
-저는 요즘 그림책 만들기가 좋아졌어요. 시간 나는 대로 그림책을 만들어볼 거예요.
연필은 도구다. 생각을 표현하는 도구인 것이다. 시도 쓸 수 있고 그림도 그릴 수 있다. 악보를 그릴 수도 있고 설계도를 그릴 수 있다. 아무것도 없는 백지에 자신의 생각을 그리고 쓰는 일은 멋진 일이다. 영감이 떠오르든 떠오르지 않든 꾸준히 글을 쓰자고 했다. 아침 두 문장을 꾸준히 쓰면서 우리 모두 영감을 기다리는 것이다. 영감은 언제 올지 모르기 때문이다.
긴 글에 대한 피로감이 큰 고학년 어린이들에게 <리본>은 그림책의 매력을 제대로 알려준다. 이 그림책을 보면서 어린이들은 글이 많지 않아도 깊은 내용을 담을 수 있다는 걸 알게 된다.
<리본>은 풍선으로 시작해서 곡예사, 탈출, 미끼, 큰 뱀, 작은 뱀, 별똥별, 추락, 승리, 거미 같은 낱말로 이어진다. 각각의 독립된 장면을 다 읽다가 마지막 장면 '여행'에 이르면 무릎을 치게 된다. 누군가의 미끼가 되기도 하고 무언가에서 탈출하기도 했다. 쫓기는 생쥐 꼴이 되기도 하고 연인과 함께 낭만적인 별똥별을 만나는 벅찬 순간도 경험했다. 승리했다고 생각하는 순간 비참하게 추락하기도 했다. 풍선에서 시작하여 거쳐간 그 모든 여정은 인생이라는 여행이었다.
인생 끝자락에서 뒤돌아보면 이 모든 게 한 편의 여행이다. 손흥민을 좋아하는 어린이, 햄스터를 내 손에 얹어주던 어린이는 이제 6학년이 되었거나 청년이 되었을 것이다. 그들은 지금 <리본>의 어느 구간을 지나곤 있을 것이다. 마음 한끝에 아프게 남아있는 어린이들, 그 어린이들이 꿋꿋하게 인생의 구간 하나하나를 잘 통과하면 좋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