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에서 시를 쓰면

오규원 동시, 산

by 강승숙

오규원 동시집 <나무 속의 자동차>를 읽었다. '산'이라는 시를 골라 필사를 했다. 강, 조그만 돌멩이 하나, 그늘, 하늘에서, 뜰 같은 시들이 있는데 그 중 '산'을 골랐다. 시에서 바람과 산 냄새, 나뭇사이로 들어오는 햇살, 그리고 그리움이 느껴졌다


산, 하면 사람들은 어떤 산을 떠올릴까 궁금하다. 난 어릴때 살던 집 뒷산을 떠올리게 된다. 높이가 50미터쯤 되었던거 같다. 어릴 때는 몰랐지만 나중에 생각하니 정말 낮은 산이다. 그 산을 닳도록 오르내렸다.


'산'을 읽으며 시인의 산이 아닌 나의 산을 생각한다. 나는 그 산에서 무엇을 했던가. 나의 나무에 걸터 앉아 멀리 동네를 내려다보며 친구들을 찾아보곤 했다. 심심해서 어쩔줄 모를 때 그렇게 산에 올랐다.


비밀 산딸기 기지를 나 혼자만 알고는 산딸기가 익을 때까지 기다리기도 했다. 비밀기지는 알고보니 나만의 것이 아니었다. 딸기가 빨갛게 익었다고 생각하며 찾아간 날, 빨갛게 익은 산딸기는 한 개도 남아있지 않았다. 누군가 다 따가버린 것이다. 어린 가슴이 내려앉았던 그곳도 산이었다


그 산에서는 어떤 냄새가 났을까. 너무 오래되어 가물가물하다. 기억을 더듬어본다. 비 온 뒤 비릿한 냄새, 쌓이고 쌓인 낙옆에서 나는 흙냄새, 찔레꽃 향기, 아카시꽃 냄새가 났을 것이다.


소리도 있었다. 프드덕 외마디를 지르고 날아가는 꿩 소리, 이파리를 흔드는 바람소리, 툭하고 밤 떨어지는 소리, 삭정이 부러지는 소리, 이파리에서 청개구리 뛰는 소리, 메뚜기 날개짓 소리......


그 시절 산에 앉아서 무언가를 그리고 써 보았다면 좋았을 거 같다. 그랬다면 시에 적힌 말과 말사이에 끼어있는 냄새와 소리, 감촉을 생생하게 오래오래 간직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필사를 한 뒤 다시 시를 읽는다. 이번에는 유년의 산에서 어른이 되어 친구, 또는 동료들과 어울려 오르던 산이 떠오른다. 젊은 날엔 여러 산을 정복하는 일이 꽤나 자랑스러운 일이었다. 하나의 로망으로 여겨졌다. 직장에마다 산악회가 성하던 시절이었다.


엉뚱한 일이 떠오른다. 추운 겨울, 북한산을 오를 때다. 가파른 산길인데 뽀족구두를 신은 여자가 나타났다. 너댓의 일행이 있는 걸로 보아 즉흥으로 산을 타게 된 듯 했다. 여자는 일행의 도움을 받아 꽤 높은 데까지 올라왔다.


나는 여자의 발이 신경쓰였다. 발이 아파서 계속 갈 수 있을까 궁금하기도 했다. 어자 생각을 하며 느리게 걷다가 결국 앞질러 산을 올랐다. 여자의 행군이 어디에서 멈췄는지 알 수 없다. 이 날 부터 북한산만 생각하면 구두 신은 그 여자 생각이 난다. 북한산은 다람쥐 냄새, 참나무 냄새가 아닌 그 여자의 구두로 기억되는 듯 하다.


30대에 지리산 종주를 한 일도 잊히지 않는 기억이다. 계절마다 지리산을 간다는 어느 산악회 소식을 듣고는 우리도 해보자는 마음으로 지인들과 산행을 감행했다. 3박4일 중 비가 오지 않는 날은 없었다. 늘 신발 속은 젖어있었다. 능선길은 때로 지루했다. 하지만 묵묵히 걷는 것도 괜찮았다. 세석평전 새벽은 춥고 맑고 경건했다. 오래되어 희미해진 기억을 시 한 편을 읽으면서 더듬어본다.


그 많은 산을 오르내리며 내 마음엔 무엇이 남은 걸까. 함께 산을 타던 이들 대부분은 이제 연락이 닿지 않는다. 그들은 우리가 오른 산을 어떻게 기억할까. 산길을 돌 때마다 쌓여있는 돌탑에 돌 하나 얹으며 빌었던 소원을 생각해 낼지도 모르겠다.


나는 이제는 평지를 걷는다. 개천따라 난 산책길을 걷는다. 지난 쫒기듯 걸으며 스쳐가던 물과 꽃과 새와 나무를 이제는 느긋하게 바라 본다. 멈추어 서서 물오리와 자라를, 나무수국과 붉은 토끼풀꽃을 구경한다. 지난 날처럼 뾰족 구두를 신고 걷는 여자를 만나기도 하고 네잎 클로버를 수집하는 할머니를 만나기도 한다.


이젠 수첩을 가지고 다니며 종종 글을 쓴다. 시처럼 중대백로의 우아한 날개짓과 보자마자 사라지는 자라의 흔적, 물살을 애써 견디는 물냉이의 시름이 문장 사이에 스며들 것이다. 어쩌다 수첩을 다시 펼치면 글에 적힌 말과 말 사이에서 물냄새, 꽃냄새, 구름냄새를 맡게 될 듯 하다.(*)

목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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