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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양주가 사라진 이유

배려와 예절로 빚는 가양주

by 윤슬

우리나라는 예로부터 손님을 맞이할 때, 그리고 축하할 일이 있거나 위로의 마음을 전할 때, 혹은 조상들에게 제사를 지낼 때, 꼭 놓치지 않고 준비하는 것이 있었다. 바로 술이다. 특히 제사상에 올리는 술은 지금처럼 공장에서 나오는 것들이 아니라 반드시 집에서 빚은 술로 조상들에게 제를 올렸다.

이를 가양주라 한다. 집마다 가풍과 분위기가 다르듯 술맛 또한 달랐다. 왜, 우리는 그처럼 각 가정마다 술을 빚은 것일까? 쌀과 누룩과 물만 들어가는 술에서 꽃향기가 나는 비결은 무엇일까? 맛과 배려와 예절로 빚는 가양주의 역사와 문화에 대해 알아본다.


술의 역사는 인류의 탄생과 함께 시작되었다. 원시시대 벽화에서 우리는 포도주로 술을 빚는 모습을 찾아볼 수 있다. 인류는 주로 곡류나 과일 등으로 술을 빚어왔지만 드물게 고기나 심지어 생선으로 만든 술도 있다. 우리나라 전통주의 싹이 본격적으로 발아한 시기는 삼국시대. 삼국시대에는 발효식품의 기술이 발달하였는데, 이때 소금과 함께 술이 식품의 저장에 이용되었다. 고려시대에는 몽골군이 침략하며 소주를 갖고 들어와 고려 사회에 퍼지기 시작했다. 이때 술의 종류가 다양해짐과 동시에, 특히 증류법이 도입되어 전대의 양조 기술과 함께 술이 더욱 발달하였다. 조선 중기부터는 각 지방이나 집안마다 고유의 가양주들이 본격적으로 등장하기 시작한다. 거의 한 집 건너 한 집 꼴이었다. 그래서 명가명주, 즉 이름 있는 집에 좋은 술이 있다고 했다.



재료 외에도 서양과 우리나라의 가양주 문화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 유럽 여러 국가들도 가양주를 빚는 문화가 있었다. 하지만 모든 집마다 빚었던 것도 아니며 특별한 행사용으로만 빚었다. 나중에는 이러한 가양주를 상품화시키기도 했다. 반면 우리나라는 모든 집들이 일상적으로 술을 빚었지만 이를 상품화시키지는 않았다.


그렇다면 우리나라의 가양주와 서양의 가양주는 어떤 차이점이 있을까.

서양에서는 주식인 밀이 아니라 부식인 포도나 용설란 등으로 빚었던 것에 비해 우리는 주식인 쌀로 술을 빚었다. 우리 체질에 맞는 술을 만들어 마신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 조상들은 왜 일상적으로 술을 빚었던 것일까. 유교 사상이 사회 전반을 지배했던 조선시대. 조상과 계절 세시마다 농사를 주관하는 자연신에게 드리는 제사에서 술은 결코 빠져선 안될 중요한 요소였다. 특히 1년 열두 달, 매 절기마다 명절이 있는데, 이때에도 집에서 정성껏 빚은 술을 상 위에 올렸다.

무엇보다, 우리 조상들은 집에서 빚은 술로 손님을 잘 대접하는 것을 최고의 미덕으로 여겼다. 그 손님에게 맞고 그 손님이 좋아하는 술을 대접하는 것을 예의로 여겼다. 손님에게 차를 내오는 중국이나 일본과는 다른 문화다. 이것이 바로, 우리나라에서 가양주가 발달한 배경이다.


멥쌀 범벅에 누룩 가루를 더하는 과정(사진 출처: 우리술)

이때 같은 지역에서 같은 쌀과 누룩을 가지고 빚는데도 각 집마다 맛과 향이 다 달랐다. 그 집안만의 물맛이 있고 솜씨가 다르고 그 집안 환경에 따라 미생물의 발효 양상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전통주의 기본 재료는 단 세 가지. 물과 누룩과 쌀이다. 셋 다 특별히 맛이 있거나 향이 좋지도 않다. 하지만 이 세 가지를 혼합했을 때 신기하게도 없던 맛과 향과 알코올이 생겨난다.

우리나라 전통주는 서양의 와인이나 맥주, 위스키 등과 비교했을 때 크게 차이가 있다. 서양의 양조법은 효모와 효소를 이용해 발효시키지만 우리나라는 누룩만을 이용해 당화와 발효가 동시에 진행된다. 일본 역시 우리나라처럼 누룩을 이용해 사케를 빚는다.


숙성시킨 탁주를 거르는 채주 과정(사진 출처: 연합뉴스)

이제 평택 지역의 한 가정에서 복원한 가양주를 만나러 가본다.


이 집의 가양주는 오양주. 술 빚는 과정을 다섯 번 반복하는 순곡주로, 조선시대부터 빚어온 술이다. 일제강점기에 사라졌던 이 술을 최근 전통적인 방법으로 복원해 냈다.

이 술은 조선시대 때부터 있어 왔던 우리 고유의 술 빚는 방법인데, 일제강점기에 접어들며 사실상 사라졌다. 해방된 이후에는 워낙 먹고사는 게 힘들어지니 술을 빚을 여력이 없었다.


이를 최근 복원해 다시 전통 방법에 근거해서 복원한 술이 오양주, 천비향이라고 하는 술이다.

오양주는 덧술 과정을 네 번 더하여 총 다섯 번 덧술을 진행하는 것이 가장 큰 특징인데 이때 기하급수적으로 미생물의 수가 불어난다. 전국에서 유일하게 다섯 번 발효시키는 최고급 술이다. 약 100일 정도의 발효과정을 거친 후에는 6개월가량 숙성 기간을 거치는데 각 숙성 단계마다 다른 향이 생겨난다. 발효와 숙성을 모두 마친 술을 채에 걸러 내리면 비로소 오양주가 완성된다. 이때 막 거른 술은 탁주 또는 막걸리라 하고, 위에 맑게 뜬 술은 청주, 증류해서 내리면 소주가 된다.



한편, 우리 전통주는 크게 몇 가지 종류로 나뉜다. 먼저, 쌀 등의 곡물에 누룩과 물을 섞어 발효시키는 양조곡주와 이를 증류시킨 증류주. 이들 곡주나 증류주에 꽃잎이나 솔잎, 생약재 등을 넣어 그 성분과 향기를 우려낸 가향주와 약용약주, 약용 증류주로 나뉜다.


신선주 도가(사진 출처: 청주 신선주 법인)

이제 술 익는 향기를 따라 청주의 또 다른 집을 찾아가 본다. 이 집에서는 대대로 약용주를 빚어왔다.

신선주는 12가지의 한약재를 가루로 만들어 찹쌀과 누룩을 함께 넣어 찌고 익혀서 빚는 약용주다. 지난 1991년 지방 무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이 술은 조선시대 선비사회에서 그 명성이 자자하여, 경상감사가 대원군에게 진상하기도 했다. 현재는 400년 동안 18대째 한결같은 방법으로 함양 박 씨 집안에서 신선주를 빚어오고 있다. 이 집 주인장의 증조부가 <동의보감>을 보고 제조를 했다는데, 숙지황, 육계계피, 인삼, 감국화(이때 술을 빚을 수 있는 국화가 따로 있다고) 여러 가지, 구기자, 우슬 등 몸에 좋은 약재를 골고루 넣는다.


신선주 빚는 과정을 살펴보자.

먼저 고두밥을 만들기 위해 100번에 가깝게 쌀을 씻어 8시간가량 불려놓는다. 불린 쌀은 시루에 옮겨 담아 장작불에 1시간 가까이 쪄낸다. 다 쪄낸 고두밥은 넓게 펼쳐 식힌다. 다음으로는, 12가지 약재를 끓인 물을 고두밥에 섞는다. 이때 약재 물을 식혀서 섞는다. 뜨거운 물을 부으면 효모가 건강하지 않고 밥알도 많이 풀어지기 때문이다. 여기에 다시 누룩을 섞어 약 1시간가량 치댄다. 이후 100일 동안 숙성기간을 거치면 비로소 탁주가 완성된다. 이 탁주에 용수를 박아 즉 거름망을 대고 걸러내면 신선 약주가 된다. 이를 다시 소주고리를 놓고 가열해서 내리면 전통 소주가 된다.

물은 섭씨 100℃에서 끓는데, 에틸알코올은 78℃에서 끓기 때문에 물보다 먼저 에틸알코올이 기체가 된다. 날아오른 기체는 냉각수와 만나 액체로 변환되어 소주고리를 타고 내려온다. 그렇게 사람의 정성과 발효의 마법이 만나 마침내 향기롭게 술이 익는다.


면천두견주(사진 출처: 면천두견주 보존회)

충남 당진에 가면 꽃향기를 가득 품은 명품 술을 맛볼 수 있다.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된 면천두견주는 진달래 꽃잎과 찹쌀로 담근다. 이 고급 가향주는 봄날 진달래꽃이 만개될 때까지 술밑을 만들어, 두 차례 담근 후 2-3주 간의 발효와 숙성 기간을 거친다. 면천두견주 역시 술을 빚는 과정은 비슷하다. 다만 재료에서 진달래꽃을 섞는다는 차이점이 있다. 그밖에 누룩과 찹쌀 외에 달리 들어가는 것이 없다. 하지만 예로부터 백약지장, 즉 모든 약 중에서 제일가는 것이라고 일컬어질 정도로 그 약리작용이 뛰어나다.

면천두견주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술로 고려시대 때부터 제조되어 왔다. 당진 지역 주민들은 예로부터 면천두견주를 약주로 마시거나, 조상과 손님 앞에 정성을 다해 내어놓았다.

이 술은 높은 도수에도 불구하고 목 넘김이 부드럽고 전통주에서 나는 특유의 누룩 냄새와 같은 것을 많이 없애서 남녀노소 마시기 편한 술로 인정받고 있다.



문배주-horz.jpg 남북정상회담 때마다 식탁에 오른 문배주(사진 출처: 매일경제)


문배주는 면천두견주, 교동법주와 더불어 국가 지정 무형문화재다. 2000년, 2007년에 이어 2018년까지 남북정상회담이 마주 앉은 식탁에 빠짐없이 올라 분위기를 훈훈하게 만들기도 했다. 문배주는 밀 누룩에 좁쌀과 수수, 단 세 가지 재료로 술을 만드는데, 두 번 덧술을 해서 만드는 순수 증류주이다. 문배주라는 이름은 '잘 익은 문배나무의 돌배 향이 난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이밖에도 조선의 3대 명주로 인정을 받았던 가양주가 있다.


이강주는 전주 한양 조 씨 가문에서 빚어오던 가양주로, 토종 소주에 배와 생강, 계피와 울금 등을 넣고 만드는 전통 약주다. 다른 전통주들과 달리, 이강주를 만들 때는 누룩과 고두밥을 직접 섞지 않는다. 물에 누룩을 넣고 우려낸 뒤 여기에 고두밥을 넣어 발효시킨다. 사소해 보이지만 이 작은 차이가 맛을 결정짓는다.


이처럼 정성으로 빚어낸 가양주는 우리 조상들에게 어떤 의미였을까?

조선의 사대부에게 술은 하나의 문화였으며 예술이었다. 시, 서화, 노래 등과 함께 곁들여 마시는 풍류로서의 음주였다. 술은 군신 간의 대접에서도 빼놓을 수 없는 요소였다. 나라에 큰 공을 세운 대신이나 중신들에게 임금은 술을 내려서 그 공을 치하했다. 일반 백성들에게 술은 삶의 고단함을 잠시나마 잊게 해주는 좋은 벗이었다.


계영배2.jpg 계영배의 원리


우리 조상들은 언제, 어떤 자리에서 누구와 마시든지 술을 마시는 원칙이 있었으니, 바로, 과음하지 않고 절제하는 것이었다. 손님이 고주망태가 되도록 취하는 것은 초대한 집주인에 대한 결례로 여겼다. 적당히 기분 좋을 정도까지만 즐기는 것이 우리의 가양주 문화였다.

하지만 한 잔 두 잔 마시다 보면 어쩔 수 없이 취할 때가 있다.

그래서 이를 경계하기 위해 특별히 만든 술잔이 있다. 계영배라는 것이다. 술잔의 7할 이상을 채우면 술이 모두 밑으로 새어버리는 잔이다. 어떻게 잔에 술이 가득 차면 저절로 새어버리는 것일까? 계영배에는 놀라운 과학적 원리가 숨어 있다. 이는 사이펀의 원리와 유사하다. 사이펀이란 한 곳에 있는 액체를 위로 끌어올려 더 낮은 곳으로 옮기는 장치다.


그런데 이러한 가양주 빚기 전통은 언제, 어떻게 사라진 것일까?

일제강점기, 1907년 7월 조선총독부는 주세령을 공포한다. 그리고 이를 근거로 각 집마다 내려오던 가양주 빚기를 금지한다. 명분은 비위생적이며 표준화되지 않았다는 것이었지만, 실상은 일본 주류 회사들의 독점 판매를 위해서였다.

이때부터 각 지방과 집안마다 빚어오던 가양주는 밀주 형태로 그 명맥을 간신히 이어가게 된다. 그러자 일제는 다시 밀주 제조에 대한 단속을 강화하고 모든 주류를 약주, 탁주, 소주로 획일화, 규격화시켰다.

이러한 가양주 금지령은 현대에까지 이어졌고 1985년에야 비로소 정부 주도로 단속 대상이었던 가양주를 발굴하고 무형문화재로 지정하게 된다.


하지만 그것에 들인 시간과 정성이 무색하게 우리 전통 가양주들은 양주에 비해 제 대접을 못 받아 왔다. 다행히 최근 들어 우리 전통주를 살리기 위한 움직임이 조금씩 일어나고 있다.

가양주는 조상에 대한 공경의 의미로, 선비들 사이에서는 풍류의 하나로, 백성들에게는 삶의 시름을 잊게 해주는 존재였다. 무엇보다 가양주는 내 집에 찾아온 손님을 극진히 대접하기 위한 배려의 표시였다. 그렇게 우리 전통주는 사람과 사람 사이를 향기롭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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