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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최초의 커피 애호가는 고종이었다?

근대문물, 조선을 깨우다

by 윤슬

역사의 놀라운 발전은 때론 사소한 물건으로부터 시작되기도 한다. 인류가 문맹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은 종류의 발명 덕분이었고, 나침반은 인류의 대항해 시대를 열었다. 안경은 인간의 노동시간을 근본적으로 바꿔 놓았으며, 망원경은 그토록 견고했던 천동설을 무너뜨렸다.

전근대적이었던 나라에 새로운 문물이 도입된다는 건 큰 혼란과 함께 때론 큰 충격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조선을 전 근대의 다친 세계에서 근대의 열린 세계로 이끈 것도 사소한 물건들이었다. 개화기의 조선 역시 마찬가지였다. 최초로 전화기가 보급됐을 때 사람들은 전화선에서 목소리가 들릴 거라 생각하고 전기선에 귀를 가져다 댔다가 감전사하는 일이 발생하기도 했다고 한다. 잠든 조선의 천지를 흔들어 깨운 사소한 물건들의 큰 도전의 역사에 대해 알아본다.


고종 어진

1897년 조선 사회에 대대적인 혁신이 일어났다. 국호가 조선에서 대한제국으로 바뀐 것이다. 임금의 칭호를 ‘황제’로 쓰기로 한 고종은 머리를 짧게 자르고 양복을 입었다. 누구보다 서양의 기술과 문물을 받아들이는 데 적극적이었던 그는 각종 산업화 시책을 추진했다.


이 무렵을 전후로 서양 외교관과 선교사들에 의해 그들의 생활 문화와 새로운 문물들이 조선 사회에 소개됐다. 신기하고 편리한 서양 문물은 점차 조선인의 마음을 사로잡고 일상 문화 역시 이전과 확연히 달라지기 시작한다.


조선은 1894년부터 중국으로부터 외교적으로 자주독립을 선언했고 그때부터 국호 앞에 ‘대(大)’자를 붙여서 ‘대조선국’이라고 부르기 시작한다. 이를 선언하는 왕국에서 ‘제국’으로 국호를 바꾸고 국가적 차원에서 서양 문물들을 빠르게, 전면적으로 도입하기 시작했다.


# 우리나라 근대화의 중심지 정동


이 무렵부터 500여 년 지속되어 온 한성의 도시 풍경에 충격적인 변화가 시작되었다. 경복궁과 육조거리를 중심으로 형성되었던 전통적인 풍경은 경운궁과 정동 지역의 이국적인 도시 경관으로 옷을 갈아입는다. 정동은 조선 태조의 계비 신덕왕후 강 씨의 능침인 정릉이 있었던 곳이라는 데서 비롯된 이름이다. 신덕왕후가 승하한 후 현재 성북동 정릉으로 능을 옮겼으나 이곳은 정릉동 혹은 정동이란 지명으로 남게 되었다.


덕수궁(옛 이름 경운궁)

정동 거리에는 경운궁이 있었다. 명성황후의 비극적인 죽음을 겪은 고종은 신변의 위협을 느껴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한다. 이후 경복궁으로 돌아가는 대신 이곳 경운궁으로 거처를 옮기고 이름을 덕수궁으로 바꾼다. 아무래도 외교 공관들이 가깝게 있는 덕수궁이 유사시에 더 안전하다고 생각한 것이다.


흔히 양관이라고 부르는 외교 공관은 정동을 중심으로 형성되었다. 1884년 4월 최초의 미국 공사관이 개설된 이후 러시아 공사관, 프랑스 공사관, 독일 영사관 등이 모두 정동에 들어섰다. 이때 미국 공사관만 빼고 다들 자국의 양식으로 건물을 지었다. 자국 공관이 이곳에 있으니 그 나라의 선교사나 고문관, 초빙 기술자, 교사와 같은 외국인들도 모두 정동 근처에 집을 얻어 살았다. 말하자면, 대한제국의 정치, 외교, 문화 근대화의 중심지였던 셈이다.


구 러시아공사관

특히 외국 문화를 직수입하는 통로이기도 했다. 이 동네에서 서양인들과 교류했던 중국인들에 의해 이발 기술을 비롯해서 신발 기술, 양복 기술 등이 들어왔고 일반 국민은 이들을 통해 근대 문물을 접하게 되었다. 이후 이 일대에서 시작된 현대적 생활양식이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그런데 왜 다른 지역도 아닌 정동에 각 나라의 공사관들이 들어섰을까? 조선 정부가 궁궐과 가까운 이 지역을 공관 부지로 제공했기 때문이며, 각 나라 역시 자국의 외교 공관을 궁궐 근처에 두고 싶은 의도가 서로 맞았기 때문이다. 일종의 ‘외교 타운’이었던 정동 거리에는 현재 러시아 공사관만이 덩그러니 남아있다. 그조차 밖에서만 볼 수 있을 뿐이다.


덕수궁 석조전

한편 조선의 전통 궁궐인 덕수궁에 서양의 신고전주의 건축 양식에 석조전이 들어선 것은 가히 천지가 개벽할 일이었다. 1909년에 황실의 정전으로 준공된 석조전은 전형적인 유럽풍 건물이다. 고종은 이곳을 보관 대신과 외국 사절들을 만나는 용도로 사용하였다. 기본적으로는 황태자와 왕세자 등을 위한 공간으로 마련되었지만 일제 강점기 동안 이왕 세자가 주로 일본에 살았기 때문에 석조전은 대부분의 기간 동안 비어 있었다.

석조전 건축은 영국인 건축가 하딩의 설계로 이루어졌고, 내부 공사는 영국인 건축기사 루벨이 설계했다. 총공사비는 당시 금액으로 상당한 거금이었던 1,290,000원에 달한다.


중명전

덕수궁의 전각 중 하나인 중명전 역시 정동 거리에 있다. 중명전은 우리나라 궁궐 중에서 서양식으로 지어진 최초의 건물이다. 본래의 이름은 수옥헌이었으며 1899년 6월에 황실 도서관으로 건립되었다. 하지만 2년 후인 1901년에 원인 모를 화재로 소실되었고 재건된 후 중명전이란 이름으로 불리게 된다.

이곳은 고종황제의 편전이자 외국 사절의 알현실로 사용되었다. 1905년 11월 17일에는 을사늑약이 체결된 치욕적인 현장이기도 하다.

아관파천 당시 고종은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했는데, 이때 이곳에서 커피를 처음 접한 이후부터 커피 마니아가 되었다고 한다. 인생의 쓴맛을 처음 겪은 왕에게 커피는 어쩌면 자기의 마음을 가장 잘 알아주는 친구 같은 존재였을 것이다.


정관헌

덕수궁으로 돌아온 고종은 궁궐 안에 로마네스크 양식의 정관헌을 짓는다. 사실 로마네스크 양식이라기도 애매한, 지붕은 중국 전통 양식인데 기둥은 서양식이 접목된 독특한 건축 양식을 갖고 있다.


고종은 이곳에서 대신들과 함께 커피와 다과를 즐기거나 외교 사절단을 맞아 연회를 베풀기도 했다. 특히 1902년 대한제국 선포 5주년이 되는 해였고 고종의 왕위 재위 40년이 되던 해였다. 고종은 이를 기념하고 국제 사회에 대한제국의 위상을 알리기 위해 미국, 영국, 프랑스 등에 특사들을 초청해서 국제적인 행사를 치른다.

당시 강대국들은 대한제국을 마치 문명이 발달하지 못한 부족 국가 정도로 인식하고 있었다. 이런 곳은 나라라고 인정할 수 없으니 식민 지배해도 된다고 생각한 것이다. 고종은 이러한 편견을 불식시키기 위해 외교 특사들을 초청해서 외교 행사를 벌였다. 다시는 주변 강대국들에게 지배당하지 않겠다, 우리는 아직 잠에서 깨어나지 못한 작고 힘없는 나라가 아니라 문명이 발달한 근대 국가라는 것을 적극적으로 보여주려고 한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커피를 최초로 마신 사람은?


한편 고종은 언제 어디서나 커피를 즐겨 마셨다. 그런데 우리는 그동안 조선에서 커피를 가장 먼저 마신 사람이 고종이라고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는 잘못 알려진 사실이다.


실제로 조선에서 누가 제일 먼저 커피를 마셨는지는 알 방법이 없다. 다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고종대에 커피를 마시기 시작했다는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다.


1884년, 퍼시벌 로엘이라는 미국인이 한국에 와서 한강변에 있는 담당정이라고 하는 정자에서 후식으로 당시에 조선에서 유명했다고 하는 커피를 마셨다는 기록이 남아있는데, 이것이 가장 오래된 기록이다.



손탁호텔

고종과 커피를 이야기할 때 ‘손탁호텔’을 빼놓을 수 없다. 손탁은 러시아공사 베베르의 처형으로, 1885년 베베르와 함께 조선에 들어온다. 이후 그녀는 궁내부 소속 관원이 되어, 외국인을 위한 황실 연회를 주관하게 된다. 고종은 손탁이 탄 커피를 즐겨마셨다고 한다.

고종은 배일 활동을 한 손탁에게 고마움의 표시로 황실 소유의 땅과 건물을 하사했고, 그녀는 이곳에 손탁호텔을 짓는다.


한편, 커피를 이용해 고종을 독살하려 한 사건이 있었다. 러시아 통역관 김홍육이 거액의 공금을 착복하고 유배를 떠날 위기에 처하자 이에 앙심을 품고 고종의 커피에 독을 섞어 넣은 것이다. 다행히 고종은 커피 냄새가 이상해 한두 모금의 소량만 마셨고 반잔을 마신 태자는 토하며 쓰러졌다고 한다.


황실에서만 즐기던 커피를 민간에서도 마시기 시작한 것은 언제부터였을까. 1896년에 발행된 독립신문에는 고살키 상점이라는 영문 광고에 수입품 모카커피와 자바커피가 등장한다. 이후 1900년 11월 26일 자 황성신문에는 송교 청향관이란 곳의 광고가 실리는데 여기에 ‘가피차’ 즉 커피를 판다는 문구가 등장한다.


전화기에 대해 큰절을 했던 대신들


구한말 대한제국기에 들어와 조선 사회를 뒤흔든 역사적인 물건이 있었다. 바로 전화기다. 전화와 관련된 재미있는 설이 있다. 지금이야 휴대폰 화면에 상대방의 이름이 뜨기 때문에 바로 이름이나 직함으로 전화에 응대하지만 낯선 번호가 뜨면 우리는 대개 “여보세요”라는 말로 전화를 받는다. 이 말은 어떻게 시작하게 된 것일까? 우리말 ‘여보세요’는 “여기 보세요”의 준말인데, 옛사람들이 문 앞에서 사람을 부를 때 “이리 오너라”라고 말했던 데서 비롯되었다는 설이 있다.


조선 정부가 전화를 최초로 사용한 것은 1896년. 덕수궁을 중심으로 중앙부서를 연결하는 전화선이, 그리고 한성과 인천 사이에도 전화선이 가설되어 이용되었다. 이 전화선을 관리, 운영하기 위해 궁내부에는 통신사가 설치되었다.

최초의 자석식 전화기는 사용방법이 매우 복잡했다. 수화기를 들기 전에 먼저 자석을 감아서 전류가 흐르게 한다. 그 전류를 이용해 음성을 전기신호로 바꾸고 다시 음성신호로 바꾸는 과정을 거친다. 이렇게 해도 바로 상대방에게 연락할 수 없었고, 중간에 연결해 주는 교환소에 번호를 대면 비로소 상대방과 전화가 연결되었다.


한편 고종은 선왕의 능을 직접 참배하는 대신 전화로 문상을 올리기까지 했다. 고종은 조대비 신정왕후의 동구릉이 너무 멀어 아침저녁으로 제를 올리고 문안을 드리는 것이 너무나 불편했다. 그래서 3년상을 치르는 동안 동구릉에 가설된 전화로 곡을 하며 예를 올린 것이다.

그 과정이 참으로 재미있다. 능참봉이 혼전을 향해 수화기를 갖다 대면, 내시는 황제의 입 가까이에 송화기를 갖다 댄다. 거기에 대고 황제는 곡을 하고 큰절을 올렸다고 한다. 이 전화 문상은 순종 황제로까지 이어졌다.

또한 고종이 신하들에게 전화를 걸면, 전화를 받는 신하들은 최고의 예법을 따라야 했다. 해당 신하에게 내시가 미리 그 시간을 알려주면 신하는 미리 의관을 정제하고 황제의 전화를 기다렸다. 이후 전화가 걸려오면 전화기를 향해 네 번 큰절을 올리고 두 손으로 공손히 전화기를 받들어 통화를 했다고 한다.


전화와 관련해서 김구 선생이 목숨을 건졌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독립운동을 하기 전 청년 시절에 김구는 을미사변의 시해범으로 어느 일본 상인을 지목하고 그를 살해한다. 이 때문에 사형선고를 받고 해주 감옥에 갇혔는데, 당시 고종 임금이 그 사실을 알고 개성 궁내부에 전화를 한다. 궁내부 대신이 그 전화를 받고 사형집행 직전에 해주 감옥에 임금의 뜻을 전해서 사형을 면했다고 한다. 해주 감옥까지 직통 전화가 연결되어 있었을 리는 없지만 어쨌든 전화 덕분에 연락 시간을 단축해서 사형을 막을 수 있었던 것이다.


윗사람 앞에선 못썼던 안경


성호 이익의 <애체경명>의 한 구절

오늘날 인류의 삶을 바꿔놓은 혁명적인 물건들 중에서, 5위 안에 들어도 좋을 물건은 안경이다. 안경이 조선사회에 들어온 것은 언제부터였을까. 조선 후기일 것으로 짐작하기 쉽지만 무려 임진왜란 때였다.


18세기에 이르면 안경은 양반 사대부들의 생활필수품으로 자리 잡는다. 늘 책을 가까이했던 조선 지식인들에게 안경은 그야말로 감격이었고 축복이었다. 얼마나 감격스러웠는지 심지어 성호 이익은 <애체경명>이란 글에서 안경을 이렇게 열렬하게 찬양하기까지 했다.


경주 남석안경

조선 사회는 안경을 수입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직접 제작까지 했는데, 17세기 초반 경주에서 만든 남석안경이 바로 그것이다. 경주 최부자 집안의 독보적인 기술로 오랜 기간 전승되어 온, 당시로서는 최첨단 기술이었다. 경주 남산은 우리나라 수정(옥돌) 중에서도 가장 양질의 수정이 나는 곳이다. 특히 안경을 만들기에 적합한 연수정이 많이 났다. 이 수정을 잘 갈아서 안경알을 만들고 여기에 소뿔을 깎고 갈아서 만든 안경테에 끼운 것이 바로 ‘남석돌안경’이다.


조선의 왕들도 안경을 썼다. 최초로 안경을 쓴 왕은 숙종. 숙종. 42년 승정원일기에 임금이 신하들과 함께 안경에 관해 대화하는 대목이 나온다. 영조와 사도세자, 그리고 정조 임금에 이르기까지 모두 유전에 의해 시력이 무척 안 좋았다고 한다. 하지만 영조는 시력에 꼭 맞는 안경을 찾지 못해 벗었다 쓰기를 반복했고, 독서광이었던 정조는 안경을 애용한 왕으로 유명하다. 그런데 정조는 안경이 없으면 글씨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였는데도 신하들 앞에서 안경을 쓰는 것은 어색하게 여겼다.

우리 조상들은 윗사람 앞에서 안경을 쓰는 것을 예의에 어긋나는 것으로 여겼다. 오죽하면 대한제국의 외교 고문이었던 묄렌도르트는 지독한 근시안이었는데, 처음 고종을 알현할 때 안경을 벗고 걸어가다 비틀거렸다고 한다. 이 모습을 본 고종이 다음부터는 안경을 쓰고 와도 좋다는 배려를 했다.


서양보다 앞섰던 전차 개통


초창기 한성거리를 누볐던 전차

하지만 뭐니 뭐니 해도 조선 민중의 일상을 혁명적으로 바꾼 근대문물이 있으니 바로 전차다. 1898년 4개의 산으로 둘러싸인 한양도성의 경관은 전혀 다른 풍경으로 바뀌게 됐다. 종로를 관통하여 서대문에서 청량리까지 이어지는 전차 궤도 부설공사는 10월 17일부터 그해 12월 25일에 걸쳐 진행되었다.

전차를 도입한 사람은 고종. 그 이유에 대해서는 이렇게 알려져 있다. 고종은 명성황후의 홍릉에 자주 행차했는데 그때마다 십만 원 안팎의 엄청난 비용이 들었다. 그래서 이 비용을 절약하기 위해 전차를 개설했다고. 콜브란이란 서양인이 고종을 꼬드겨서 그랬다는 일본인들이 남긴 기록에 그렇게 써있다. 하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고종은 1898년 한성전기회사를 세우며 전차 사업을 포함한 전기, 전화 사업을 본격적으로 추진했다. 이듬해인 1899년, 고종의 명으로 전차 노선이 부설되고 그해 서울에서 전차 개통식이 열렸다. 말하자면 도시 근대화의 일환으로 전차를 개설한 것이다.

당시 조선의 전차 부설은 매우 이른 시기에 이뤄졌다. 일본보다는 3년이나 빨랐으며, 대다수 유럽 국가들은 아예 전차가 개설되지 않은 곳도 많았다. 때문에 당시 외국 공사들은 조선의 전차를 보고 오히려 신기해하고 깜짝 놀랐다고 한다. 그만큼 조선의 근대화에 대한 고종의 의지가 강했던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종로는 서울 상권의 중심이다. 당시 이 거리는 중국과 일본 상인들에게도 개방되었고, 상권은 두 나라 상인들이 장악하게 된다. 하지만 전차가 개설되면서 자연스럽게 조선 상인들의 상권이 부활되기 시작한다.

단지 신기함을 넘어서, 전차가 도입됨으로써 조선사회에 불러온 가장 큰 변화가 있었다. 바로, 신분질서에 혁신적인 변화가 이뤄진 것. 전차를 탈 수 있는 사람의 기준은 신분의 높고 낮음이나 귀천이 아니었다. 경제적 능력이었다. 전차는 천천히 길을 가로지르는 사람이 양반이라고 해서 멈춰 서거나 피해 가지 않았다. 오히려 양반들은 평민들이 탄 전차에 길을 비켜줘야 했다. 전차는 남녀 칠 세 부동석의 견고한 관습도 무너트렸다. 이제 좁은 전차 안에 남녀가 함께 앉아 있는 모습은 더 이상 망측한 짓이 아니었다.




새로운 문물이 들어온다는 것은 새로운 한 세계가 들어오는 것이다. 새로운 세계는 열린 시선과 타인에 대한 이해를 필요로 한다. 우리 선조들은 조심스럽지만 신중하게, 느리지만 여유 있게 밖으로 향한 문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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