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근대는 격동의 시대였다.
임오군란과 갑신정변, 을미사변 등 조선 국내 정치는 걷잡을 수 없이 회오리쳤고 조선을 둘러싼 열강들의 세력다툼은 치열했다. 그 복잡한 정국의 한가운데에 늘 그가 있었다.
흥선대원군. 그를 비추는 밝은 빛과, 그가 만들어낸 어두운 그림자를 따라가 본다.
오늘날 우리가 역사적인 인물을 바라볼 때에는 일정한 시각이 존재한다. 예를 들어 세종대왕이나 이순신 장군의 경우에는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누구나 위대한 영웅으로 평가하는 데 이견을 달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바라보는 관점에 따라서 그 평가가 극명하게 갈리는 인물들이 있다. 바로 조선의 근대, 이 혼돈의 시기의 한가운데에 서있었던 흥선대원군도 그중 한 명이다.
흥선대원군은 다양한 얼굴을 가진 인물이다. 오랜 세도정치를 타파한 사람, 파락호라는 소리를 들어가며, 살아서 아들을 왕으로 만든 사람, 가야금과 그림에 뛰어난 재능을 보인 예술가.
과연 어떤 것이 진짜 흥선대원군의 본모습일까.
1800년대 조선후기 사회는 그야말로 혼란과 부패로 점철된 시기였다.
순조, 헌종, 철종 등이 계속 어린 나이에 보위에 오르며 안동 김 씨, 풍양 조 씨와 같은 외척들이 60년 동안 권력을 휘둘렀다. 그들은 왕족도 함부로 건드릴 수 없는 절대 권력이었다.
그 무렵 흥선군 역시 왕족이지만 안동 김 씨의 서슬 퍼런 권세에 눌려 생활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흔히 알려진 것처럼 그가 파락호 생활을 한 것은 아니었다.
심지어 ‘상갓집 개’라는 별명이 있을 정도로 자신을 위장했다는 설도 있는데... 사실일까?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전혀 사실이 아니다.
이 명칭은 김동인의 소설 <운현궁의 봄>에서 썼던 표현이다.
오히려 대원군은 종친들 가운데 가장 모범이 되는 인물이라는 칭송을 받기도 했던 인물이다.
물론 흥선군이 겸손하게 몸을 낮춘 것은 사실이다. 그런 가운데 차남 ‘명복’을 보위에 올리기 위해 당시 권력을 잡고 있던 신정왕후를 설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이 또한 역사적 사실과는 조금 다르다.
이 부분에 대해 역사학자 오영섭 교수는 이렇게 말한다.
“신정왕후가 흥선대원군의 아들인 고종을 왕에 올리는 데에는 자기들 풍양 조 씨의 이익을 대변해 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을 겁니다. 그리고 그 시기에 정권을 잡고 있었던 세력은 안동 김 씨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안동 김 씨도 고종이 왕위에 오르는 데에 대해서 일정 부분 도움을 줬습니다. 그래서 풍양 조 씨와 안동 김 씨 그리고 대원군 세력의 노력. 이런 여러 가지가 결합이 돼서 고종이 왕위에 오르게 되었다 이렇게 봐야 될 것 같습니다.”
말하자면, 안동 김 씨 세력을 견제하고자 했던 풍양 조 씨 가문의 신정왕후와 아들을 임금으로 만들고자 했던 대원군의 이해관계가 서로 맞았던 것이다. 그렇게 되기까지 흥선군은 철저한 계획에 따라 움직였다. 궐내의 환관이나 궁녀들을 자기 사람으로 포섭했고 조대비의 조카와 먼저 친해진 후 조대비와 만날 수 있었다.
그렇게 어린 명복이 12살 어린 나이에 보위에 오르니 그가 바로 고종이다. 그리고 조선 역사상 전무후무한 왕의 아버지가 수렴청정을 하는 시대가 시작되었다.
대원군은 정권을 잡자마자 가장 먼저 나라를 엉망으로 만든 안동 김 씨 세도정권을 무너뜨리고 개혁의 칼날을 휘둘렀다. 안동 김 씨 세력을 쫓아낸 자리에는 당파를 가리지 않고 능력 위주로 관리를 선발해 정치 기강을 바로 세웠다.
1865년 3월, 조선 유림 사회에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들려왔다. 노론의 본거지와 같았던 만동묘를 철폐하라는 것이다! 60년 세월 동안 기득권을 누려왔던 세력에 대한 흥선대원군의 도전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흥선대원군의 개혁 정책 중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서원철폐. 당시 서원은 양반 사대부들의 부정부패와 적폐의 온상이었다.
본래 유생의 사학 기관이었던 서원은 조선 중기 이후부터 변질되고 부패하기 시작한다. 붕당 정치가 발달하면서 차츰 중앙 집권 세력과 서원이 밀접하게 연결되는데, 중앙에서 숙청된 인물들의 정치적 복권을 기도하는 장소로 바뀌어가게 되었다. 국가로부터 ‘사액서원’으로 지정을 받게 되면 토지와 노비 등을 하사 받아 서원을 운영하고 유지했다. 게다가 이러한 토지는 면세 혜택까지 받았다.
그러자 국가의 이러한 혜택을 바라며 서원 수가 급증하게 된다. 모든 기관은 비대해지고 권리가 클수록 변질되기 마련. 서원은 교육 및 향촌 질서 유지라는 본래 기능을 잃어버리고 붕당 정치의 사랑방 역할을 하게 된다. 거기에 그치지 않고 일부 서원들은 운영에 필요한 재원을 확보하기 위해 백성들에게 수탈과 횡포를 자행하기에 이른다.
대원군은 이러한 서원에 대해 칼을 빼들었다. 전국의 서원 중 47 곳만 남기고 600여 곳의 서원을 모두 없애버린 것이다. 당연히 기득권을 지키려는 양반 사대부들의 반발이 엄청났다. 하지만 사대부들의 반발에도 흥선대원군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고 눌러버렸다.
대원군은 또한, 부정부패와 전횡을 휘두르는 공간으로 변질되어 버린 비변사를 폐지해 버렸다.
대신에 의정부를 부활시켜 행정은 의정부로, 군사는 삼군부로 분리했다. 그리고 두 기구를 자신의 통제하에 두고 개혁을 추진해 나갔다.
당시 비변사가 국방 문제뿐만 아니라 정치 경제 문제까지도 관장하면서 조선의 행정 체계가 흐려지는 문제가 발생했다. 비변사에는 척족 정권의 중요 인사들이 대거 들어가 국가의 정무를 좌지우지했다. 상대적으로 왕권은 추락할 수밖에 없었다. 대원군은 정권을 잡자마자 척족 정권의 권력을 제한하기 위해서 비변사를 축소 또는 약화시키는 정책을 펼쳤다.
세도권력 타파뿐만 아니라 그는 백성들의 삶을 안정시키는 데도 주력했다. 대표적인 것이 삼정의 개혁. 삼정이란, 조선후기 국가 재정의 핵심을 이루었던 세 가지 제도인 전정, 군정, 환정을 말한다. 당시 백성들이 부담했던 가장 대표적인 세금이며 동시에 국가의 주요한 수입원이었다. 하지만 삼정을 거두기 위한 규정이 명확하게 규정되지 않았고, 사족들은 과세 부담에서 제외되면서 사족이 아닌 계층에게 세금이 편중되었다.
관리들의 비리와 수탈로 인해 삼정의 폐단이 극심해졌고 백성들의 삶은 비참하기 그지없었다.
흥선대원군은 이러한 삼정을 개혁한 것이다. 그는 토지 대장에 오르지 않은 땅을 찾아내어 토호들의 토지 겸병을 금지하고, 부분적이기는 하지만 양전(量田)을 실시해 전정을 바로잡으려 했다. 또한 그동안 상민에게서만 징수해 오던 군포를 양반에게서도 징수하는 호포법을 실시하였고, 지방 수령과 토호의 농간이 가장 심했던 환곡제를 사창제로 개혁하기도 했다. 그리고 암행어사를 수시로 파견을 해서 이러한 제도들이 잘 시행되고 있는지 살펴보기도 했다.
하지만 인간사에서 늘 그렇듯 한 사람에게 공적만 있는 것이 아니다. 패착을 둘 수도 있고 실수도 저지른다.
경복궁 중건도 그중 하나. 강력한 왕권을 회복하려던 흥선대원군은 경복궁 중건이라는 무리수를 둔다.
조선왕조의 법궁이었던 경복궁은 임진왜란 후 270여 년 동안 방치되어 있었다. 흥선대원군은 방치된 경복궁을 재건하는 데 드는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원납전’이라는 기부금을 받는다. 말이 기부금이지 사실은 반강제로 돈을 거둬들인 것이다.
경복궁 중건에는 상식을 초월할 정도의 비용이 들었다.
당시 조선왕조의 1년 평균 수입은 10만에서 50 만전 정도. 그런데 경복궁 중건 비용으로 무려 750만 전을 사용한 것이다. 게다가 공사 기간은 무려 3년 2개월. 게다가 공사 도중 두 번이나 화재가 났으며, 완공은 대원군 사후에 이뤄졌다.
비용뿐만 아니라 경복궁 공사에 백성들을 동원하고 양반들의 묘지에서 나무들을 베어다 썼다. 이 때문에 국가 재정이 악화되고 양반은 물론 백성들로부터 엄청난 원성을 듣게 된다. 결국 경복궁 중건은 흥선대원군의 정치 생명을 단축시킨다.
최익현은 그동안의 대원군의 실정을 비판하며 두 번의 탄핵 상소를 올린다.
최익현의 상소로 권력의 자리에서 밀려난 대원군은 칩거에 들어가고 바야흐로 고종의 친정시대가 열린다.
그리고 이때부터 고종과 흥선대원군, 명성황후와 흥선대원군 사이에 갈등과 불화가 시작된다. 특히 며느리인 명성황후와의 대립은 익히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이에 관해 오영섭 교수의 말을 들어본다.
“야사에 내려오는 것으로는 대원군이 명성황후의 소생이 아니라 궁인 이 씨의 소생이었던 완화군이라는 아이를 원자로 삼으려고 했기 때문에 명성황후가 거기에 대해서 앙심을 품었다. 그래서 둘 사이가 나빠지기 시작했다 이렇게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아마 그것은 그냥 야사인 것 같고 실제로는 대원군의 입장에서 봤을 때 명성황후가 역할을 확대하고 자기 집안 피붙이들을 끌어들여서 관료로 삼고 그러면서 정계에 민 씨들이 대거 진출하고 이런 것이 대원군의 입장에서는 상당히 거북스러웠을 겁니다. 아마 근본적인 갈등은 두 사람이 거기서부터 시작되는 게 아닌가, 대원군으로서는 명성황후를 비롯한 민 씨, 여흥 민 씨 일족이 다시 새로운 세도정권으로 등장하는 것, 그 자체를 정말 원하지 않았을 겁니다.”
흥선대원군에게 다시 기회가 찾아온 것은 임오군란 때문이었다. 이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다시 권력의 전면에 나서게 된 것. 그렇게 대원군의 2차 집권이 시작된다.
하지만 다시 잡은 권력은 불과 한 달밖에 가지 않았다. 임오군란의 여파로 피신해 있던 명성황후의 국상을 선포해 버린 흥선대원군. 이 일로 고종과 갈등을 빚는 과정에서 대원군이 청나라 군대에 납치돼 끌려간 것이다.
이후 그는 3년 동안 감금된 채 통한의 세월을 보낸다. 청나라 보정부에 유폐된 흥선대원군. 그는 가족이나 지인들에게 편지를 보내거나 글씨를 쓰고 난을 그리는 일로 고단하고 괴로운 심사를 달랜다. 추사 김정희로부터 글씨와 그림을 배운 대원군은 빼어난 예술가이기도 했다. 스승이었던 김정희조차 예서와 묵난에서는 대원군이 조선에서 최고라고 극찬했을 정도였다.
3년 후 청나라에서 환국한 흥선대원군은 고종을 폐위시키려고 한다.
이와 같은 대원군과 고종, 대원군과 명성황후 사이의 대립을 이용하여 패권을 쥐고자 했던 주변 강대국들의 암투도 끊이지 않는다.
한편 갑오개혁을 통해 일본군의 호위를 받으며 대원군이 경복궁으로 돌아오면서 3차 집권이 시작된다. 하지만 대원군의 정치적 구상과 일본 측의 구상이 달라 서로 갈등이 빚어진다. 게다가 경기 남부에서는 일본군과 청나라 군대가 한반도에 들어와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이 부분에 관해 오영섭 교수의 설명을 들아본다. “그때 대원군은 이런 전략을 택했습니다. 현재 일본이 조선에 군대를 파견해서 청나라 군대와 전투를 벌이고 있는데 만약 청나라 군대가 패배를 하게 된다면 일본이 조선을 장악할 것이다. 이렇게 생각한 거죠. 그래서 자기에게 계속 자기 요구사항을 거부하는 일본을 제거하기 위해서 나름대로 방책을 구사했습니다. 그 방책은 북쪽에 있는 청나라 군대를 남쪽으로 끌어들이고 삼남, 경상도 전라도 충청도에 있는 동학 세력을 서울로 끌어들이고 이렇게 해서 일본 군대를 궤멸시킨다, 이런 전략을 구사한 거죠.”
하지만 그의 전략은 실패로 돌아가고 결국 이 일로 그는 정계에서 은퇴하게 된다.
흥선대원군을 평가할 때 가장 극명하게 갈리는 부분은 그의 쇄국정책이다. 그 때문에 조선의 근대화가 늦어졌다는 것이다. 이 부분에 관해서도 다시 알아보자.
병인년에 벌어진 천주교인 박해는 이후 프랑스 군대의 침공에 빌미를 제공한다. 프랑스 정부는 병인박해를 일으킨 책임자 처벌과 함께 통상 수교를 맺자고 요구해 온다. 흥선대원군은 그 요구를 일언지하에 거절하고 두 나라 사이에 격전이 벌어진다. 결과는 조선군의 승리.
그런데 조선 조정이 처음부터 이양선들을 적대시한 것은 아니었다. 처음에는 식량도 보내주는 등 우호적인 분위기였다. 하지만 1866년, 미국의 무역선 ‘제네럴 셔먼호’가 통상을 요구하며 육지에 상륙해 약탈을 벌인다. 이에 화가 난 백성들이 제너럴 셔먼호를 공격해 불살라 버린다.
5년 후 미국 정부는 이 사건을 구실로 쳐들어와 통상을 요구한다. 이때 흥선대원군은 미국의 통상 요구를 단호하게 거부하며 강화도에서 격퇴한다. 바로, 신미양요다.
이 부분에 관해 오영섭 교수는 이렇게 설명한다.
“그러다 보니까 대원군으로서는 이렇게 생각하게 된 거죠. 지금 중국의 상황도 대단히 외세가 침략을 해와서 중국을 점령에 들어가는 상황이 벌어졌으니까 대원군으로서는 그게 상당히 우려되는 상황이었던 거죠. 거기다가 두만강을 건너서 러시아인들이 나타나서 통상을 요구하고 이런 상황까지 겹치는 모양 새니까 대원군으로서는 조선의 국권을 지키고 영토를 지키기 위해서는 일단은 서양 세력을 막아내야 되겠다 이렇게 생각을 한 것 같습니다."
말하자면 나라의 문을 닫는 것이 아니라 나라를 지킨다는 생각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다 결정적으로 대원군이 나라의 빗장을 단단히 지르게 된 사건이 발생한다.
오페르트라는 독일 상인이 흥선대원군의 아버지인 남연군의 묘를 도굴한 사건이다. 엄격한 유교 국가였던 조선에서 이는 천인공노할 만행이었다. 이는 조정뿐만 아니라 온 백성의 공분을 샀다.
두 번의 양요를 치른 후에 흥선대원군은 통상수교 거부 정책을 전 국민에게 홍보하기 위하여 전국 각지에 척화비를 세운다.
하지만 흥선대원군은 그 나름대로 신식 무기를 개발하는 등 조선의 국권을 지키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이기도 했다. 두 차례의 양요를 겪으면서 대원군은 서양보다 조선이 무기 군사 면에서 열세라는 것을 알고 수뢰포를 비롯하여 방탄복, 면포배갑 같은 다양한 신식 무기들을 개발한 것이다.
그렇게 영욕의 세월을 살았던 흥선대원군은 1898년 2월, 79세의 나이로 파란만장한 인생을 마감한다. 그는 숨을 거두기 직전까지 아들을 기다렸다고 한다. 하지만 부친과 거의 의절하다시피 했던 고종은 부친의 임종을 지켜보지도 않았으며 장례식에도 참석하지 않았다. 유교사회였던 조선에서 이 사건은 매우 충격적인 일이었다.
흥선대원군에 대해서는 보는 시각에 따라 호불호가 나뉠 수 있다. 그를 조선 사회의 부정부패를 해소하고 백성을 위한 개혁 정치를 펼치려 했던 정치인으로 바라볼 수도 있다. 한편으로는, 왕권을 강화하고 현실 정치에 끊임없이 개입하려 해서 국론 분열을 초래하고 외세가 개입하는 여지를 준 인물이라고 볼 수도 있다. 말하자면 빛과 어둠이 공존했던 인물.
그가 살았던 시대는 격동과 혼란의 시기였다. 국내의 혼란스러운 정쟁과 조선을 둘러싼 열강들의 끊임없는 침략의 시도 속에서 그는 늘 선택과 결단을 내려야 했다. 역사란 다양한 맥락과 관점에서 봐야만 제대로 알 수 있다. 흥선대원군의 공과 역시 당시의 혼란한 시대 상황이 만들어낸 것이 아닐까. 그러한 현상과 결과들이 모여 역사를 이루었으며 그 역사에 대한 평가는 지금도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