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시골에서 살아남기 1
고3이 시작되는 겨울, 넓은 세상 구경하고 오라는 아빠의 말에 고모가 계신 미국으로 여행을 갔다 왔다.
미국에는 고모와 큰아빠가 있었는데, 고모는 한적한 시골에, 큰아빠는 한국인이 많은 대도시에 살고 계셨다.
고모 집은 작은 동네에서도 한참을 들어가야 나오는, 그야말로 진짜 시골에 위치해 있었다. 아침이면 뒷마당 펜스 근처로 소들이 산책을 왔고, 밤에는 사슴들이 뛰어다녔다. 거기에 인터넷까지 느려서 답답함을 더하는 곳. 그래서 나는 자연스럽게 고모 집보다는 쇼핑몰과 아웃렛이 가까이 있는 도시, 큰아빠 집이 더 좋았다.
고모부는 옆 동네 대학에서 교수로 재직 중이셨는데, 그곳 역시 큰 도시는 아니었다. 소도시였지만, 내 기준에서는 그곳도 시골이었다.
당시 나는 고등학생이었고, 대학이라고는 집 근처 캠퍼스밖에 본 적이 없어서 미국 대학교가 궁금했다. 그래서 캠퍼스를 둘러보고, 고모부의 수업을 참관할 겸 미국 대학을 방문했다.
고모부가 미리 학생들에게 양해를 구해주신 덕분에, 나는 교실 맨 뒷자리에 조용히 앉아 미국 대학 수업을 지켜볼 수 있었다. 미국 드라마나 영화에서 보던 거대한 계단식 강의실은 아니었지만, 20명 정도의 학생이 있는 작은 교실에서 못 알아듣는 영어를 열심히 알아듣는 척하며 앉아 있었다.
미국에서 보낸 한 달은 정말 특별한 경험이었다. 당시에는 크게 와닿지 않았지만, 수험생활이 힘들 때마다 이상하게도 그 시골에서의 시간이 떠올랐다. 가장 행복했던 순간은 분명 도시에서 쇼핑할 때였는데, 왜 자꾸 그 시골 생활이 생각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결국, 그 한 달간의 경험이 계기가 되어 나는 미국에서 대학을 다니기로 결심했다. 미국에서 대학 생활을 하겠다고 마음먹었을 때, 제일 먼저 떠올린 건 하이틴 드라마나 영화에서 보던 낭만적인 캠퍼스 라이프였다.
하지만… 현실은 달랐다.
내가 살게 된 곳은 미국의 소도시, 아니, 시골이었다...
미국 애들은 어릴 때부터 운전을 배우고 다녀서 그런지, 대부분 운전 경력이 5년 이상일 정도로 능숙했다. 그리고 대부분 자기 차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대중교통이 딱히 필요해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우리 동네에는 버스가 없었다. 심지어 택시나 우버도 본 적이 없었다.
"그럼 걸어 다니면 되지 않을까?" 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도로에 인도가 없다.
인도가 없는 곳이 너무 많기도 했고, 특히 미국 친구들이 "길을 걸어다니는 사람을 조심하라"라고 항상 말해서, 학교 근처를 벗어나는 곳을 걸어 다닐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결국 차가 없던 나는 필요한 게 있을 때마다 고모나 친구들에게 부탁하거나, 학교에서 운영하는 셔틀버스를 타고 마트에 다녀야 했다.
혼자 스스로 어디를 갈 수 없다는 건… 정말 짜증났다.
처음 미국에 갔을 때는 미성년자라서 신경 쓰지 않았지만, 나중에 보니 학교가 있는 동네 마트에서는 술을 팔지 않았다. 레스토랑이나 바에서는 술을 판매했지만, 마트에서는 찾아볼 수 없었다.
미국에는 내가 살던 동네처럼 아예 마트에서 술을 판매하지 않는 곳도 있고, 맥주처럼 도수가 낮은 술만 판매하는 곳도 있다. 대부분 도수가 높은 술은 '주류 마트'에 가야 살 수 있었다.
그래서 술을 좋아하는 유학생들은 차를 타고 왕복 50분 정도 걸리는 옆 동네 주류 마트에서 맥주, 위스키, 와인을 사 와서, 학교 밖에 사는 친구 집에 모여 마시곤 했다.
왜냐하면… 우리 학교는 캠퍼스 안에서 술을 절대 마실 수 없었기 때문에!
이건 뭐… 기대도 안 했다. 한국인도 얼마 없는 곳에 한국 마트가 없는 건 당연하니까.
그래서인지 월마트에서 신라면을, 크로거에서 너구리를 발견했을 때, 너무 반가워서 소리를 지르기도 했다.
다행히 차로 한 시간 거리에 있는 도시에는 한국 마트가 있었다. 처음에는 라면, 햇반, 김, 통조림 같은 필수 식재료를 사 오곤 했는데, 점점 미국 음식에 익숙해지면서 굳이 자주 갈 필요는 없어졌다.
그래도 라면만큼은 포기할 수 없었다.
그래서 한 번 갈 때마다, 당시 최고로 매웠던 '틈새라면' 한 박스씩 쟁여두곤 했다!
이게 제일 아쉬웠다.
쇼핑몰이 없어서 자연스럽게 온라인 쇼핑에 눈을 뜨게 됐지만, 그래도 직접 가서 사는 것과는 느낌이 다르지 않은가? 옷도 입어보고, 물건도 직접 만져보고 사는 재미가 있는데!
그래도 다행히 T.J. Maxx 같은 할인 매장이나, 내가 제일 좋아했던 Hobby Lobby가 있어서 그나마 숨통이 트였다. 특별히 뭔가가 필요하지 않아도 하루 종일 생활하는 학교에서 벗어나는 것만으로도 행복했다. 그래서 주말이면 친구들과 월마트에 '놀러 가는'걸 제일 좋아했었다.
한국 마트가 있는 도시에 아울렛은 없었지만 꽤 큰 쇼핑몰이 있었다. 내가 가진 모든 애플 제품도 여기 있는 애플 매장에서 샀다. (큰 학교들은 캠퍼스 내에서도 맥북을 팔던데...) 졸업할 때쯤에는 드디어 아웃렛도 생겼다. 그전에는 아웃렛에 가려면 3시간 정도 걸리는 윗동네 주나, 아니면 6시간이나 걸리는 큰아빠가 계신 주까지 가야 했다. 미국 하면 아웃렛 쇼핑인데, 너무 멀어서 저렴한 쇼핑을 마음껏 즐기지 못한 게 조금 아쉬웠다.
한국 마트가 있는 도시에 아웃렛은 없었지만, 꽤 큰 쇼핑몰이 있었다. 내가 가진 모든 애플 제품도 여기 있는 애플 매장에서 샀다. (큰 학교들은 캠퍼스 내에서도 맥북을 팔던데… 부러웠다.)
졸업할 때쯤에는 드디어 아웃렛도 생겼다! 하지만 그전까지는 아웃렛에 가려면… 3시간 정도 걸리는 윗동네 주 OR 6시간이나 걸리는 큰아빠가 계신 주까지 가야 했다.
"미국 하면 아웃렛 쇼핑인데!"
너무 멀어서 저렴한 쇼핑을 마음껏 즐기지 못한 게 조금 아쉬웠다.
외할아버지 댁도 고모네처럼 시골이지만, IT 강국 대한민국에서는 전화나 인터넷이 끊긴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고모네가 너무 시골이라서 그런 건지, 아니면 한국과 미국의 차이인지 모르겠지만, 고모 집에서는 핸드폰이 아예 터지지 않았다. 집 전화와 TV는 문제없이 작동했지만, 핸드폰 신호만 들어오지 않았다. 요즘 같은 시대에 핸드폰이 안 되는 동네가 있다는 게 충격이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와이파이는 멀쩡했다! 보통 와이파이가 되는 곳이면 전화도 잘 터지기 마련인데, 이건 정말 이상했다.
나는 Verizon과 AT&T, 대표적인 미국 통신사 두 곳을 사용했었는데, 둘 다 고모 집에서는 쓸모가 없었다. 그래도 와이파이를 쓸 수 있어서 카톡이나 인터넷은 문제없었지만, 나는 보통 친구들과 문자나 전화로 연락했기 때문에, 고모 집에 있는 동안 친구들이 나에게 페이스북이나 인스타그램 DM으로 연락해야 했다. 아마 꽤 불편했을 것이다.
나중에 알고 보니, AT&T에서 제공하는 특정 요금제를 사용하면 고모 집에서도 핸드폰 서비스가 가능하다고 했다. 그 사실을 알았을 땐, 나는 이미 전화를 사용하지 못하는 것에 익숙해져서 더 이상 필요가 없었다.
재미있는 점은, 집 안에서 단 두 군데 내 방 침대 옆 한 곳과 테라스 쪽 한 곳에서만 간신히 핸드폰 신호가 잡혔다. 덕분에 나는 새벽 3시, 내 방에 개구리가 나타났을 때, 기적적으로 고모에게 SOS 전화를 할 수 있었다.
(고모 방과 내 방이 꽤 멀어서, 소리쳐도 잘 안 들릴 때가 많았기 때문… )
내가 하루도 빠짐없이 들르던 스타벅스가 학교 캠퍼스 안에 있었다. 덕분에 언제든 편하게 커피를 마실 수 있었지만! 아쉽게도 내가 제일 좋아하는 'Strawberry Acai'는 팔지 않았다. 그래서 가끔은 학교 밖에 있는 스타벅스도 가야 했다.
거의 매일 스타벅스에 방문하다 보니 어느 순간 직원들이 나를 알아보기 시작했다.
그래서 가끔은 주문하기도 전에, "오늘은 바닐라 라테? 아니면 모카 프라푸치노?"라고 먼저 물어보는 직원들 덕분에 작은 단골의 행복을 느낄 수 있었다.
맥도날드, KFC, 타코벨, 써브웨이, 버거킹, 웬디스, 파파이스, 피자헛, 도미노 등 거의 모든 유명 패스트푸드 체인들이 바로 학교 앞 쪽에 몰려 있었다. 내 고향에는 이런 프랜차이즈 가게들이 없어서, 처음에는 신기하고 좋아서 자주 갔다. 그때는 ‘그래, 여기가 그렇게 시골은 아닐 거야. 대학도 있는데’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미국 사람들의 주식이 대부분 이런 음식들이니까 작은 도시에도 패스트푸드 가게들이 흔히 있는 게 당연한 일이었던 것 같다. 한국에서 해장국집이나 김밥천국이 어디에나 있는 것처럼!
나는 특히 학교 안에 있던 Chick-fil-A(칙필레)를 정말 좋아했었다. 치킨 스트립과 칙필레 소스가 진짜 맛있어서, 지금도 가장 먹고 싶은 미국 음식 중 하나로 기억에 남아 있다.
학교 근처에 이렇게 다양한 패스트푸드 가게들이 많았지만, 결국 나가기 귀찮아지고, 음식이 질리면서 학교 카페테리아에서 소고기가 듬뿍 들어간 샐러드와 샌드위치만 먹게 되었다.
한국에서 산에 간다고 하면 보통 등산화를 신고 힘들게 걸어 올라가는 모습을 떠올리게 된다. 그래서 친구들이 "산에 가자"고 했을때,
"아니 나 지금 치마 입었는데 무슨 등산이야?"
라고 하며 어이없어했다. 알고 보니 우리 동네 근처에 있는 산들은 대부분 차로 정상까지 갈 수 있었다.
'차로 정상까지 올라갈 수 있다고??'
산을 좋아하지만 등산 과정을 즐기지 않았던 나에게 맞춤인 미국 산! 그 후로 산 정산은 내가 제일 좋아하는 장소가 되었다. 마치 서울에서 "한강 갈래?"라고 하듯이, 접근성 매우 좋아서 친구들과 나는 종종 즉흥적으로 운전해서 산 정상에 올라가 선셋을 보고 오는 일이 많았다. 차로 정상까지 편안하게 갈 수 있었기 때문에, 치마를 입고 슬리퍼를 신어도 산 정상 위에 서 있을 수 있었다.
이때는 몰랐지만, 사실 우리나라에도 차로 산 정상까지 갈 수 있는 곳들이 있다고 한다. 예를 들면, 그 유명한 '매봉산 바람의 언덕'!
이건 장점인지 단점인지 모르겠다. 하지만 확실한 건, 한국에서 살던 때보다 미국에서 살던 5년 동안 훨씬 더 많은 야생 동물들을 봤다.
특히 고모가 살던 집 근처에는 사슴이 엄청 많았다. 그래서 운전할 때 항상 조심해야 했다. 실제로 이른 아침, 도로를 달리던 차에 사슴이 뛰어들어 고모의 새 차 문을 통째로 교체해야 했던 적도 있었다. 사슴은 차에 치인 후 다시 산속으로 뛰어 들어가서 상태를 확인할 수 없었지만, 아마 많이 다쳤을 것이다. 그런 일을 직접 겪고 나니, 도로에 사슴 조심하라는 표지판이 괜히 있는 게 아니구나 싶었다.
고모 집이 시골이라 가끔 동물이 집 안으로 들어왔었는데, 문제는 특히 내 방에 자주 들어왔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미국 집은 방문과 바닥 사이에 공간이 있는데, 그 틈을 통해 개구리나 쥐가 내 방으로 들어온 적이 있었다.
"대체 어떻게 집에 들어온 거야?!"
둘 다 내가 제일 싫어하는 동물들이었는데… 하필 왜 내 방으로 들어왔는지ㅠ
아마 새벽까지 불빛이 켜져 있던 방이 내 방뿐이라서, 불빛을 따라 들어왔던 것 같긴 한데…
그래도 하필 내 방만 골라서 들어오다니, 정말 싫었다.
이런 일이 있고 나서 나는 고모 집에 있을 때마다 항상 방문 밑 공간을 막아두고 생활해야 했다.
없으면 없는 대로, 있으면 있는 대로, 미국 시골 대학 생활은 꽤 재미있었다.
친구들 집에 모여 보드게임을 하고,
쇼핑하러 월마트에 가고,
한국 치킨을 그리워하며 파파이스 치킨을 먹고,
빵이 질린다고 버거에서 빵을 뺀 패티랑 야채만 주문해서 먹고,
방학에는 미국 애들 없는 기숙사 식당에서 삼겹살 파티하고,
스테이크가 너무 먹고 싶어서 기찻길을 건너 다운타운까지 걸어가고,
기숙사에서 몰래 술 마시겠다고 친구들이랑 007 작전 찍고,
운전면허 시험에 떨어져서 울고불고 난리 치다가,
우리 학교 스타벅스에서만 파는 초콜릿 시럽 가득한 모카 프라푸치노 한 잔에 스트레스를 날려버리던 일상.
이런 소소한 순간들이 모여, 내 미국 시골 대학 생활에 즐거움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