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받고 싶어서, 아무 일 없는 척했다
나는 늘 멀쩡해 보였다 입꼬리는 적당히 올라가 있었고, 말투는 친절했으며,
분위기는 나쁘지 않았다 적어도 겉보기엔.
“애는 착하잖아.”
“얘는 원래 괜찮아.”
“얘는 그런 거로 힘들어하지 않아.”
나는 그런 사람으로 여겨졌다.
그러다 어느 순간, 그게 나 자신도 믿게 된 진실이 되어버렸다.
나는 정말 괜찮은 사람일까?
아무 일 없다는 얼굴을 너무 오래 하고 있다 보면, 진짜 아무 일도 없다고 착각하게 된다.
근데 사실은 정말 사소한 말 한마디에도 하루 종일 마음이 뒤집히고,
별것 아닌 장면이 자꾸 떠올라서 밤에 잠이 오지 않는다.
누가 무심코 던진 말, 무표정한 얼굴, 갑작스럽게 바뀐 톤.
그런 것들이 나를 무너뜨렸다.
나는 아무 일 없는 척, 아무렇지 않은 척하면서 그 무너짐을 마음속에 꼭꼭 눌러 담았다.
왜냐하면, 나는 사랑받고 싶었기 때문이다.
사랑이라는 건, 받고 싶다고 말한다고 해서 받게 되는 게 아니더라.
특히 나 같은 사람은 더 그랬다 나는 늘 조심했고, 눈치를 봤다.
목소리를 낮췄고, 요구하지 않았고, 갈등을 피했다.
어떤 날은 말 한마디조차 조심스러워서, 내가 있는 공간에서 숨을 얇게 쉬었다.
새아빠는 나쁜 사람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특별히 따뜻한 사람도 아니었다.
어릴 때부터 엄마와 함께 살아왔고, 중학교쯤부터 그가 우리 집에 들어왔다.
자연스럽게 ‘아빠’라 불렀지만, 어디까지나 조심스러운 관계였다.
그는 나를 건드리지 않았고, 나도 그를 깊이 묻지 않았다.
말하자면, 물과 기름처럼 섞이지 않은 채 나란히 존재하는 식의 가족.
나는 그 조용함이 오히려 안전하다고 믿었다.
괜히 상처받을 일도 없고, 기대하지 않으면 실망할 일도 없으니까.
하지만 그렇게 조심하며 살아가는 동안,
나는 ‘사랑받고 있다’는 감각을 점점 잃어갔다.
내가 얘기하지 않아서,
내가 요구하지 않아서,
내가 말하지 않아서,
사람들은 내가 괜찮은 줄 알았다.
헬스장에서 CS 업무를 할 때, 사람들은 내게 “항상 밝다”라고 말했다.
“너는 힘든 일 없어 보여서 부럽다.”
“스트레스 안 받을 것 같아.”
나는 웃었다. “그런가 봐요.”
그리고 퇴근한 후 화장실에 앉아, 혼자 숨을 몰아쉬었다.
좋은 사람인 척, 멀쩡한 사람인 척, 괜찮은 사람인 척 하루 종일 퍼포먼스를 한 끝에
남은 감정은 피로였다.
‘사랑받고 싶다’는 말은 생각보다 용기가 필요한 말이다.
사랑받고 싶다고 말했다가, “네가?”라는 반응을 받으면
사람은 다시 침묵을 선택하게 된다.
그래서 나는 입을 다물었다.
그저 일을 잘했고, 실수하지 않았고, 사람들에게 예의 바르게 대했다.
그러면 누군가가 나를 좋아해 줄 거라고,
그렇게라도 누군가 내 옆에 있어 줄 거라고 믿었다.
그건 사랑이 아니라 거래였는데,
나는 그걸 한참 동안 구분하지 못했다.
감정을 꾹꾹 눌러 담는 게 습관이 되면,
나중에는 스스로도 그 감정을 구별하지 못하게 된다.
화가 난 건지, 외로운 건지, 무력한 건지, 슬픈 건지.
그저 멍하니 있다가 문득 눈물이 흐르거나, 아무 일도 없었는데 숨이 턱 막혀오거나.
그럴 때 나는 고장 난 기계처럼 느껴졌다 정상적으로 작동하지 않는 감정 회로.
나는 감정을 망설이면서 살았다 드러내면 불편해질까 봐, 버려질까 봐,
미움만 받을까 봐.
사실은 사랑받고 싶어서였다.
그래서 아무 일 없는 척했다.
괜찮은 사람처럼 보이면, 더 오래 곁에 있어줄 것 같아서.
어느 날, 엄마의 사진을 꺼내봤다 웃고 있는 얼굴이 어쩐지 낯설었다.
생전에 엄마는 나를 많이 챙겨줬다 하지만 동시에 나를 많이 울렸다.
술 마시고 들어와 내 방 문을 열고 소리를 지르던 날들,
아침이면 또 아무 일 없었던 듯 미역국을 끓여놓던 엄마.
나는 그런 엄마를 사랑했지만, 미워했다.
그리고 이제는 없다.
그래서 더더욱, 사랑받고 싶었다.
부드러운 말로 위로받고,
있는 그대로의 나를 누군가가 알아봐 주기를.
하지만 그것이 나에게는 허락되지 않는 감정 같아서
나는 또다시 아무 일 없는 얼굴을 했다.
한 번은 남자친구가 물었다.
“너는 왜 늘 괜찮다고만 해?”
나는 말문이 막혔다 정말 괜찮아서 그런 게 아니라,
‘괜찮지 않다’고 말할 용기가 없었던 것뿐이었다.
사랑받고 싶다고 말하면,
그 사랑을 받을 자격이 없다고 말할까 봐 두려웠던 것뿐이었다.
그 순간, 깨달았다 내가 원하는 사랑은 완벽해 보여서 받는 게 아니라,
엉망이어도, 울고 있어도, 그런 나를 안아주는 사람이라는 걸.
내 슬픔을 묻지 않고 곁에 있어주는 사람.
내 망가진 모습을 보고도 떠나지 않는 사람.
그게 진짜 사랑이었다.
이제는 아주 조금씩 말을 꺼내보려 한다.
“오늘은 좀 힘들었어.”
“사실 그 말에 상처받았어.”
“나한테 사랑한다고 말해줘.”
말을 꺼내는 건 여전히 어렵지만,
조금씩 ‘있는 그대로의 나’를 꺼내는 연습을 한다.
사랑받고 싶어서, 이제는 아무 일 없는 척을 그만두려 한다 나는 아직도 멀쩡한 사람인 척을 자주 하지만,
가끔은 나도 무너져도 된다는 걸, 무너진 나를 사랑해 줄 사람도 있다는 걸 믿고 싶다 그게 진짜 사랑이라면 그게 진짜 나라면.
오늘은, 아무 일 없는 척하지 않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