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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로버스앤러버스 Apr 20. 2022

턴테이블 없이 LP 즐기기 (feat.바이닐앤플라스틱)

에디터 일영

  턴테이블이 있든 없든 LP를 모으는 사람들이 보인다. LP는 마치 헌책방처럼 세상에서 사라질 듯 사라지지 않는 것 중 하나다. 하긴 대전의 마스코트 ‘꿈돌이’가 다시 인기를 얻고 달고나 같은 간식들이 유행하는 걸 보면 세상은 사실 돌고 도는 순환구조인 걸지도 모른다. 어쨌거나 이 글에서는 LP에 관한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이 결심은 LP에 관한 단상들에서 출발했다. 


   LP는 나에게 어려운 것이었다. 레코드샵이 있으면 우선 들어가보곤 했지만 식견이 없어 그저 맴돌다 나올 뿐이었다. 당연히 공간의 의도나 주인장의 취향도 전혀 파악하지 못했다. 다음으로 LP를 사 모으려면 나만의 공간이 있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누가 봐도 4인 가족이 살 법한 뜨끈한 인테리어의 집에 LP를 갖다 놓을 수는 없었다. 마지막으로는 LP판이 돌아가는 모습이 참 좋았다. 나에게 가장 오래된 기기는 아이리버 MP3이기 때문에 내가 음악을 듣고 있음을 눈으로 확인할 기회가 없었다. 그런 신비로운 기기들과 달리 음악이 끝날 때까지 혼자 열심히 돌아가는 동그란 판이 바보 같고 담백하게 느껴졌다.


  이렇게 붕 뜬 취향을 가진지도 몇 년이 흘렀다. 관심은 있지만 얘깃거리는 없는 상태. 음악을  진심으로 좋아한다고 말하기에는 살짝 자존심이 상하는 상태다. 누군가에게 음악 듣는 걸 정말 좋아한다고 말하면 십중팔구 “나도 진짜 좋아해!”라는 대답이 돌아올 것이고, 그와 동시에 나는 취미란에 노래 듣기를 적는 10억 명의 사람 중 한 명이 되어 버린다. 반면 LP를 소장하고 있는 사람들은 실제 마음의 크기와 관계없이 청취자로서 최고의 경지에 이른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LP는 사랑의 증명이다. 그런 효과적인 증거물에 대해 이렇게 모르고 살 수는 없다. 굳센 마음으로 ‘LP, 널 갖겠어’라는 세기말 멘트를 외치며 시작한다.




LP 넓고 얕게 알아보기


LP의 역사


  LP는 ‘long-playing record’의 줄임말로, 말 그대로 긴 시간 동안 재생할 수 있는 레코드를 말한다. 이름에서부터 재생시간이 강조된 데는 이유가 있다. LP의 전신인 기존의 SP(Standard Playing Record)에는 단 5분 분량만 담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이야 당연히 음악을 무한정 재생할 수 있지만, LP가 등장하기 전까지는 음악을 5분 정도씩만 감상할 수 있었던 것이다. 사운드가 빌 틈 없이 어딜 가나 음악을 접할 수 있는 한국인으로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다. 그런 제약 속에서 음악에 대한 수요는 점점 늘어갔고, 1948년에 이르러 미국의 CBS-컬럼비아 레코드사에서 염화 비닐을 주성분으로 20분 정도의 분량을 수록할 수 있는 LP 개발에 성공하면서 음반의 대중화가 시작되었다. 이어 미국의 RCA가 잡음 문제를 개선하여 발표한 45rpm, 17cm의 도너츠반이 바로 우리가 아는 레코드의 모습이다. 


맨 왼쪽이 LP, 맨 오른쪽이 SP



LP 제작과정


  요즘은 LP가 인테리어용으로도 대중적인 인기를 끌고 있지만, 언제나 지금처럼 많은 사랑을 받아온 것은 아니다. 놀랍게도 현재 국내에 존재하는 LP 공장은 단 한 개다. 음악이 디지털화되며 2004년 마지막으로 남아 있던 공장인 ‘서라벌레코드’가 문을 닫고, 이후 등장한 레코드사도 줄줄이 폐업하면서 LP업계는 역사 속에 묻히기 직전이었다. 그 문턱에서 ‘서울레코드페어’ 행사와 함께 젊은 세대의 LP 수요가 살아났고,  2017년 마장뮤직앤픽처스에서 LP 제작 공장을 가동하기 시작했다. 그 명맥을 이어가며 호황을 책임지고 있는 유일무이 제작사, 마장뮤직앤픽처스에서 공개한 제작과정은 이렇다.


   LP는 턴테이블의 바늘이 LP 홈을 따라 움직이는 진동을 전기신호로 바꾸고, 이를 스피커로 전달함으로써 소리가 발생한다. 이 기본원리 자체는 토마스 에디슨에 의해 발명된 것이다. LP에 있는 홈은 일명 ‘소리골’이라고 불리는데, 모든 LP마다 일일이 소리골을 새길 수 없기 때문에 대량 생산을 위한 최초의 LP, ‘마스터 레코드’가 필요하다. 이 마스터 레코드를 만드는 과정이 바로 LP 제작의 첫 단계인 마스터링이다. 마스터 레코드판은 먼지만 쌓여도 손상이 생길 정도로 연질이기 때문에 대량 생산을 위한 도장판인 ‘스탬퍼’ 한 쌍을 먼저 만든다. 스탬퍼를 각각 프레싱 기계의 위아래에 부착한 후 말랑한 PVC 원료를 패티처럼 뭉친 ‘햄버거’를 두 스탬퍼 사이에 놓아주면 LP판을 만들기 위한 준비가 끝난다. 스탬퍼가 햄버거를 동일한 압력으로 압축하여 홈을 새긴 후 쿨링 과정을 거치고, 마지막으로 프레싱하며 튀어나온 옆 부분을 잘라주면 LP판이 완성된다.

  낯선 용어가 많지만, 쉽게 말하자면 와플을 만드는 과정과 비슷하다. 와플 틀을 먼저 만들고, 반죽을 그 사이에 부어 틀을 찍은 후 한 김 식히고 가장자리를 정리하는 방식이다. 말랑한 상태의 LP판 이름이 ‘햄버거’라는 것만으로 LP를 좀 더 사랑할 수 있을 것 같다.   


LP 제작과정 용어 정리

- 대량 생산을 위한 최초의 LP: 마스터 레코드
- 마스터 레코드를 만드는 과정(LP 제작의 첫 단계): 마스터링
- 홈(소리골)을 새기기 전의 공디스크: 래커판
- 마스터 레코드를 대량 생산하기 위한 도장판: 스탬퍼
- PVC 원료를 패티처럼 뭉친 말랑한 것: 햄버거
- 한 쌍의 스탬퍼를 프레싱 기계에 부착한 후 위아래 동일한 압력을 주어 햄버거를 압축한 후 딱딱해지도록 냉각하는 과정: 프레싱&쿨링 




LP 체험기 : 현대카드 ‘바이닐앤플라스틱’


  턴테이블을 덥석 구매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기 때문에 체험할 수 있는 공간을 방문했다. 서울 한남동에 위치한 현대카드 바이닐앤플라스틱은 1만 종 이상의 바이닐과 CD를 판매하는 곳으로, 청음존에 턴테이블 4대를 비치하여 LP로 음악을 감상하는 공간을 마련해 놓았다. 여타 현대카드 라이브러리와 달리 비회원도 이용할 수 있다. 


  체험 전 청음존에 따로 마련된 책장에서 듣고 싶은 LP를 최대 3장까지 고른다. 백예린, 10cm, 콜드 등의 국내 아티스트부터 Amy Winehouse, Queen, Adele, Rolling Stones 등의 외국 아티스트까지 장르별로 칸이 구분되어 있고, 각 음반의 표지에는 현대카드 측의 간단한 큐레이션이 제공되어 있다. 어떤 앨범을 들을지 고민하다가 LP로는 오래된 노래를 듣는 것이 정통이라는 생각에 국내 앨범을 제외시켰다. 해외 섹션을 살펴보니 Amy Winehouse의 앨범이 보였다. Amy Winehouse는 백예린이 헌정곡 ‘Amy’에서 누구보다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언급한 적이 있기 때문에 주저 없이 골랐다. 또 재즈를 빼놓을 수 없었다. 재즈도 LP처럼 내가 애매하게 관심이 있는 취향 중 하나였기 때문에 이번 기회에 한 앨범이라도 제대로 들어보자는 생각이었다. 그렇게 Amy Winehouse의  ‘Back To Black’ 앨범과 Ray Charles의 ‘At Newport [Limited Edition]’ 앨범을 손에 들고 턴테이블이 놓여 있는 좌석으로 이동했다.


  LP를 들어본 적이 없다고 하니 조작 방법과 주의사항을 알려주셨다. LP는 side1과 side2의 양면으로 되어 있고, 판을 자세히 보면 트랙 수에 맞게 칸이 나누어져 있다. 안쪽에서 바깥쪽으로 갈수록 높은 숫자의 트랙이니 원하는 트랙의 칸에 맞게 조정하면 된다. 턴테이블에서 바늘을 움직이기 위해서는 레버만 조작하면 되는데, 레버를 올리면 반대로 바늘이 내려가는 형태였다. 먼저 LP의 양면 중 듣고 싶은 면이 위에 오도록 끼우고, 바늘이 트랙의 소리골에 닿도록 레버를 올려준다. 다른 면으로 바꾸고 싶을 때는 레버를 먼저 내려 바늘이 LP에서 떨어지게 하고, LP를 조심스럽게 뒤집어주면 된다. 바늘이 닿아 있는 상태에서 LP를 움직이면 LP가 손상될 수 있으니 반드시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아래는 각 앨범을 들어본 간단한 소감이다. 방문 후 집에 돌아와 알아본 내용들을 덧붙였다.



Amy Winehouse, <Back To Black>

  2007년에 발매된 이 앨범은 네오 소울 음악으로 구성되어 있다. 소울은 1960년대와 70년대 사이 흑인민권운동을 배경으로 하는 장르로, 백인들의 우아한 멜로디와 대비되는 격정적인 리듬을 사용해 흑인들의 정서와 자부심을 대변하는 음악이었다. 네오 소울은 60-70년대의 소울을 그리워하며 재즈, 힙합 등의 장르를 퓨전시킨 장르이며, 에이미 와인하우스는 네오 소울의 차세대 주자였다.


   LP의 첫 느낌은 현장감이었다. 훌륭한 음악가들이 바로 옆에서 음악을 연주하고 있는 것처럼 생생한 공간감이 느껴졌다. 이렇게 강렬했던 첫인상에는 에이미의 영향도 있다. LP를 통해 처음 들은 에이미의 목소리는 웅장한 베이스에 지지 않을 정도로 힘이 있었다. 이름을 특정하기 힘든 다양한 관악기들이 소리를 부딪히는 와중에도 에이미는 공기 하나 안 섞인 진한 음색으로 노래했다. 나중에서야 알게 된 앨범 뒤의 비극적인 이야기는 전혀 느껴지지 않았을 정도로 말이다. 

[앨범 더 알아보기]
  에이미 와인하우스의 두 번째이자 마지막 앨범인 <Back To Black>은 슬픔의 자서전으로 불리기도 한다. 연인과 헤어진 후 약물 중독과 상처에 시달리던 자신에 대한 내용이기 때문이다. 이 앨범은 그래미 어워드 5관왕에 오를 정도로 엄청난 성공을 거뒀지만, 이후 에이미는 길을 걸어 다닐 수 없을 정도로 집요하게 사생활을 파헤치는 파파라치와 언론 때문에 고통받았다. <Back To Black>에 수록된 곡인 ‘Rehab’에는 “나는 그저 친구가 필요할 뿐이야”라는 가사가 있다. 에이미의 유일한 친구는 개인 경호원뿐이었다. 27세라는 어린 나이에 세상을 떠나기 직전 에이미는 그에게 “내 재능을 돌려주고, 거리를 마음껏 걸을 수 있다면 그렇게 할래”라고 말했다고 한다.    



Ray Charles, <At Newport [Limited Edition]>

  소울 장르의 대부라 불리는 레이 찰스가 1958년 Newport Jazz Festival에서 펼친 라이브 공연을 담은 앨범이다. 그의 음악 스타일은 찬송가, 재즈, 리듬앤블루스의 영향을 받았다고 하는데, 이 앨범은 재즈 카테고리에 분류되어 있었다. 확실히 첫 번째로 들은 에이미의 앨범보다 ‘아! 내가 알던 재즈!’의 느낌이었다. 


  정말 이 앨범을 들을 때만큼은 헤드폰을 빼고 공간 전체에 음악이 울려 퍼지게 하고 싶었다. 충격적인 앨범이었다. 마치 내가 1950년대 재즈바 한가운데서 화려한 화장에 머리 장신구를 두르고 술 한 잔 하며 공연을 즐기고 있는 것 같았다. 라이브 앨범답게 곡의 마지막에 긴 박수소리가 이어지면서 그 느낌은 배가 됐다. LP를 처음 다뤄본 탓에 계속 몸이 긴장 상태에 있었는데, 레이 찰스의 음악은 그 모든 걸 압도했다. 턴테이블이 있었다면 바로 구매하고 싶은 앨범이었다. 나처럼 재즈에 조예가 깊지 않거나 악기 소리를 들어도 무슨 악기인지 잘 모르시는 분들은 앨범 뒷면에 적힌 설명들을 읽으면서 감상하는 것을 추천드린다. 



  짧은 시간 동안이지만 LP로 음악을 들어보니, 휴대폰으로 듣는 음악보다 날 것의 느낌이 강했다. 소리가 매끄러운 지금의 음악과 달리 홈에 새겨진 음 하나하나가 느껴지는 것 같았다. 그 차이는 기기가 소리를 내는 방식에 있지 않을까. 진동을 전기신호로 바꿔 소리를 내는 LP의 물리적인 원리가 청각을 통해서도 전달되는 듯했다. 특히 실제 악기 연주가 베이스가 되는 음악들을 들을 때 빛을 발했다. 전자음이 아닌 악기 연주는 소리가 조금이라도 덜 변형되어야 그 생생함이 살아나기 때문이다. 




LP를 사는 이유


  지금은 음악을 다운로드할 필요조차 없는 스트리밍 시대다. 어떤 노래든지 5초 동안 슬쩍 들어보고 마음에 들지 않으면 바로 흘려보낼 수 있다. 좋아하는 노래도 터치 한 번에 듣고, 별로인 노래도 터치 두 번에 삭제할 수 있다. 좋아하는 노래에 내가 들이는 노력이 없을뿐더러 새로운 노래들이 들어오면 순서에서 밀려나 버리기까지 한다. 음악에 애착이 생기기 힘든 구조다. 


  반면 LP는 그 자체로 물성이 있다. 디지털 세계에서 모두가 같은 터치 한 번으로 듣는 음악과 달리 내가 소장하고 있는 이 판으로 음악을 들을 수 있는 사람은 오직 나뿐이다. 게다가 턴테이블을 조작할 때는 흠이 가지 않도록 주의하며 다음 트랙으로 바늘을 옮겨야 한다. 두 손으로 조심조심해가며 음악을 다루는 경험은 LP를 통해서만 할 수 있는 것이다. 서두에서 언급했던 사랑의 증명은 타인만이 아니라 나 자신에게도 해당되는 듯하다. 악기 연주가 중심이 되는 장르를 좋아하시는 분들, 남들보다 확실하게 사랑을 증명하고 싶은 분들께 LP라는 취향을 적극 추천하고 싶다.





출처

LP 역사 - RecordInfo (google.com)

[월간중앙] MZ세대의 LP 사랑 | 중앙일보 (joongang.co.kr)

[방송출연] 반전상회-LP 레코드의 제작과정 전격 공개 : 네이버 포스트 (naver.com)

사진

LP: Can My Record Player Play All Sizes of Record? – Vinyl Record Lif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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