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의미에 대한 101가지 시선들
미국의 철학자 존 메설리가 지은 ‘삶의 모든 의미’라는 책이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2016년 번역되어 필로소픽 출판사에서 출판된 책이고, ‘삶의 의미에 대한 101가지 시선들’이라는 부제가 붙어 있다.
책의 제목이 좀 오만해 보이지만, 원제목에 ‘모든’이라는 단어는 빠져 있다. 철학자가 자기 책에 그런 제목을 붙이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부제와 더불어 이 제목은 삶의 의미에 대해 특정 관점이 아니라 상당히 다양한 관점을 포괄해서 다루는 개요서라고 하는 책의 성격을 잘 표현해 주고 있다.
이 책에서는 파스칼, 쇼펜하우어, 톨스토이, 비트겐슈타인, 사르트르, 까뮈 같은 고전적 철학자들과 더불어 그들보다 유명하지는 않지만 우리와 동시대 내지는 멀지 않은 세대의 관점들을 대변하는 상당수의 현대철학자들의 견해를 소개하고 있다. 101가지인지는 확인해 보지 못했지만 얼추 그 정도 수의 단락으로 나뉜 견해들이 소개되고 있는데, 저자는 이를 몇 가지 유형으로 분류한다.
저자는 삶의 의미에 관한 이들 견해를 먼저 긍정적 대답, 부정적 대답, 불가지론으로 구분한다. 긍정적 대답이란 삶에 어떤 가치가 존재한다는 견해로서, 이는 다시 종교적 대답과 비종교적 대답으로 구분되고, 비종교적 대답은 주관적 가치가 존재한다는 견해와 객관적 가치가 존재한다는 견해로 구분한다. 부정적 대답은 삶에는 의미가 없다고 하는 허무주의이고, 불가지론은 삶의 의미에 대한 질문이 무의미하다거나 질문은 의미가 있어도 답을 할 수 없다는 입장들이다. 다시 정리를 해 보자면, 1) 종교적 믿음 2) 주관적 가치 3) 객관적 가치 4) 허무주의 5) 불가지론으로 구분을 할 수 있다. 이들 입장에 대해 다루기 쉬운 순서로 이야기해 보고자 한다.
우선 종교적 믿음은 나로선 논외의 입장이다. 신에 관한 한 나는 무신론자 내지는 불가지론자인데, 우주에 설령 신이 존재한들 기독교 등 특정 종교에서 믿는 신과 같은 신은 아닐 거라고 믿는다. 또한 그 신의 목적이나 의도가 무엇인지 알 수 없고, 내 삶에 어떤 목표와 의미를 제시하는지 알 수 없다. 종교적 믿음을 변호하거나 반박하는 여러 논의가 가능하고 그 일부가 책에서도 소개되어 있으나 이 주제에 대한 내 믿음은 확고하다.
하지만 종교적 믿음을 부정하고 나면 삶의 의미는 풀기 어려운 문제로 남는다. 수백억년이 넘는 시간 동안 지속되는 우주의 궁극적 의미가 무엇인지 설명해 줄 이야기가 없는 상황에서 인간의 삶의 의미를 어떻게 규정할 수 있을까? 인간이 어떤 목적을 열심히 추구한들 결국 인간은 늙고 죽는다. 같은 결론에 이른다면 그 과정에서 분투하는 것의 의미는 무엇일까? 행복은 좋고 불행은 나쁘다고 전제한들, 행복과 불행 역시 지나가는 것이고 궁극적으로 영속하는 아무 것도 남기지 않는다면, 그것에 집착할 이유가 무엇인가?
이런 의문에서 허무주의와 불가지론이 탄생한다.
불가지론을 먼저 다루자면, 비트겐슈타인의 유명한 문구인 ‘말할 수 없는 것에는 침묵해야 한다’로 요약할 수 있다. 삶의 의미에 대한 질문은 언어와 논리로 다루어질 수 없는 것이다. 우리는 의식적 사고를 통해서 삶의 의미에 대한 의미 있는 답변을 구할 수 없다. 하지만 그렇다면 우리가 삶의 의미를 모르는 채로 삶을 살아가도 괜찮은 것인지, 어떤 삶이 더 낫다고 판단할 수 있는지, 그런 판단 없이 선택을 하고 목표를 위해 인내하며 살 수 있는 것인지에 대한 의문이 남는다. 이 의문은 허무주의가 제기하는 질문과도 공통된 것이다.
허무주의는 불가지론과 큰 차이가 없어 보이는데, 결국 삶의 의미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삶의 의미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니체는 자기 자신의 가치 체계를 새롭게 창조하라고 말하고, 까뮈는 시지프스가 바위를 굴려 올리는 것처럼 부조리한 인생일지라도 그 반복되는 노력을 긍정함으로써 허무에 반항할 수 있다고 한다. 쇼펜하우어는 인생에 긍정적 의미는 없지만 고통이란 실재하는 것이기 때문에 최대한 고통을 적게 겪으면서 인생을 관조하고 소소한 위안에 만족하며 살아가는 것이 최선이라고 한다.
결국 삶의 의미가 알 수 없는 것이든,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 것이든, 우리는 삶을 스스로 끝내지 않으려면 어떻게든 살아가야 한다. 그렇다면, 되는 대로 살아가는 것이 최선일까? 되는 대로 살아가는 것은 어떤 것일까? 까뮈의 ‘이방인’의 주인공처럼 태양이 너무 눈이 부시고 이마에서 땀이 나고 마침 손에 총이 쥐어져 있어서 방아쇠를 당겼다는 식으로 살아가는 것일까?
하지만 우리는 결국 무언가를 위해서 살아갈 수밖에 없고, 좋고 나쁜 것을 평가하며 선택을 하면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것이 아닐까? 허무주의가 아무렇게나 살아도 마찬가지라는 결론을 피하기 위해서는 결국 어떤 가치평가의 기준을 제공할 수밖에 없다.
한 가지 입장은 결국 그 가치의 빈자리는 주관적으로 부여하는 의미들로 채울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편의상 주관적 가치주의라고 이름 붙여 보겠다. 주관적 가치주의는 신이 세상을 만든 목적이나 인간에게 부여한 역할처럼 객관적인 의미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각 개인이 스스로 의미와 가치의 창조자가 되어야 한다고 전제한다. 의미있는 일이란 곧, 자신이 의미를 부여한 대상이다. 알렉산드로스가 세계의 끝에 이를 때까지 정복을 하는 것을 의미로 여겼다면, 어떤 생물학자는 거의 아는 사람이 없는 이끼류의 특성을 밝히는 것을 의미로 여긴다. 사랑에 빠진 사람은 사랑을 얻는 일에 몰두하고, 어린 자식이 있는 사람은 자식을 돌보는 일에 전념하며, 야심 많은 젊은이는 승진을 계속 하여 자신이 갈 수 있는 최고의 자리까지 가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 우주의 궁극적 의미와 연결되지 않더라도 우리는 여러 가지 방식으로 상위 단계의 목적을 설정하고 그 목적을 이루는 데 몰두한다. 의미란 그런 목적들과의 관계에서 부여되는 것이다.
주관적 가치주의가 가치의 주관적인 측면과 각 개인이 의미의 궁극적인 창조자라는 것을 강조한다면, 객관적 가치주의는 그러한 의미 부여가 객관적인 조건과 기준에 따라 질서 있게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을 강조한다. 예를 들자면, 혼자만의 기이한 취향에 몰입하는 것보다는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가치있다고 여기는 것들, 예를 들어 건강, 우정, 성취, 관계 등을 추구하는 것이 낫고, 일관성 없는 즉흥적 삶보다는 장기적 기획에 헌신하는 삶이 낫다는 것이다.
내가 볼 때는 종교적 믿음을 제외한 나머지 네 가지 입장, 허무주의, 불가지론, 주관적 가치주의, 객관적 가치주의는 명확히 경계가 그어지지 않는 것 같다. 궁극적 삶의 의미는 존재하지 않거나 알 수가 없고, 그러니 그 빈자리를 채워야 하는데 그 채움의 주체는 나 자신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내가 삶의 의미를 창조한다고 하더라도 자의적으로 할 수는 없는 일이고 고려하고 반영해야 하는 객관적 조건들이 있어야 한다. 문제는 그렇게 나의 개인적 의미를 창조해내기 위한 구체적 방식이다.
물론 사람들이 그렇게 다 주체적으로 사는 것은 아니다. 가족이나 어릴 때의 경험, 교육, 친구 관계 등을 통해 나의 가치관은 어린 시절에 상당 부분 생성되어 평생 지속된다. 내가 가치있게 여기는 것은 보통 다른 사람들도 가치 있게 여기는 것이고, 우리는 사회와 문화의 영향 속에 옳고 그름과 좋고 나쁨을 판단한다. 배가 고플 때 음식을 찾는 것이 자연스럽듯, 우리는 행복과 즐거움과 건강을 좋아한다. 이와 같은 선호들은 철학적 숙고의 결과가 아니라 자연스럽게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다.
그렇다면 삶의 의미에 대해 의문을 갖기 보다 삶의 의미에 대한 질문의 의미에 대해 의문을 가져야 하는 것이 아닐까? 사실 많은 사람들은 삶의 의미에 대해 고민을 그다지 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고, 특히 삶이 만족스럽고 원활한 사람들일수록 그렇게 보인다. 어쩌다 삶의 궁극적 의미가 무엇일까 하는 질문이 떠오르더라도 잠시 지나가는 상념으로 취급하고 우리가 열정을 쏟기에 적합한 다른 활동들 속에서 잊어버려도 되지 않을까?
문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그런 질문을 갖게 된다는 것이다. 질문이 떠올랐을 때 단호하게 그 질문이 의미없다고 믿고 생각을 떨쳐버리는 것도 하나의 대답이 될 수 있다. 하지만 그 대답에 대한 확신이 부족하기 때문에 우리는 불안을 느낀다.
우리가 정말 원활한 삶을 살고 있다면 우리는 그런 질문을 별로 떠올리지 않는다. 또한 삶이 고통스럽고 절박한 필요에 따라 바쁘게 살아야 할 때도 그렇다. 이런 질문은 우리가 적당한 여유를 갖고 있을 때 떠오른다. 특히 무언가를 선택하려는 데 갈등을 느끼는 경우, 또는 이대로 지내도 좋은지 아니면 무언가 변화를 추구해야 할 것인지 불안을 느끼는 경우와 같은 때이다. 그런 갈등이나 불안이 없다면 우리는 그냥 질문을 잊고서 삶에 몰두해도 되는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결국 삶의 의미에 대한 질문은 삶에서 선택을 하고 변화를 추구하는 전략에 대한 질문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선택과 변화를 최소화하고 되는 대로 사는 전략에서 소수의 목적에 일관되게 헌신한다는 삶의 전략까지, 취할 수 있는 전략은 다양하다. 행복, 다른 사람의 인정, 관계, 건강, 고통의 최소화, 다양한 경험, 부와 소득, 가족의 행복, 자신이 속한 조직의 성공, 만족스러운 일상의 반복, 배움, 지혜 등 우리가 추구할 수 있는 가치는 다양하며 그 우선순위나 가중치도 다양하게 조정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어떤 선택을 할 때 우리가 구축해 둔 가치관과의 일관성을 얼마나 중시할 것인지, 아니면 그런 부담 없이 자유롭고 즉흥적인 선택에 의존할 것인지 등 선택을 하는 스타일도 다양하게 가질 수 있다.
결국 원론적인 철학으로 얻을 수 있는 결론에는 한계가 있다. 내가 확신할 수 있는 것은 신이나 우주가 삶에 의미를 주지는 못하고, 그렇다고 해서 되는 대로 살아간다는 결론을 피하려면 어떤 식으로든 의미 부여는 필요하고, 그러한 의미 부여는 실재하는 궁극적 진리가 아니라 나의 주체적 판단일 수밖에 없고, 다만 주체적 판단은 자의적 선택이 아니라 나의 본성과 세계에 대한 나의 지식을 반영한 것이어야 한다는 것 정도이다.
우리에겐 상당히 많은 선택지가 있고, 그 중에 특정한 무엇을 정답이라고 할 수는 없다. 하지만 선택의 기준들과 방법론을 마련해 두는 것이 선택의 상황에서 도움이 되는 것처럼, 삶의 의미에 대해 어느 정도 정리를 해 두는 것은 살아가는 데 도움이 된다. 예를 들어 자기 삶에 있어 가장 중요한 의미와 가치를 갖는 것들이 무엇인지, 그러한 의미들에 충실하게 헌신하는 것과 우연과 직관에 따르는 자유를 누리는 것 사이에 균형을 어떻게 맞출 것인지와 같은 질문들에 잠정적인 답변들을 정해 둘 수 있다.
타인에의 봉사와 관계 맺음, 공익의 증진과 그에 따르는 명예, 새롭고 다양한 경험과 배움, 갖고 싶은 것들의 획득, 구체적 목표의 성취와 몰입, 고통과 위험의 최소화와 무난하고 소박한 행복, 고민과 잡념 없이 반복되지만 만족스러운 일상 속에서의 충실함, 얽매이지 않고 자신의 마음을 따라 사는 자유, … 어쩌면 삶에 의미가 없다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우리가 여러 가능한 의미 중에서 갈팡질팡하고 있는 것이 문제가 아닐까? 허무주의에 따르면 갈팡질팡하는 삶이 보다 질서 있는 삶보다 못하다고 할 수는 없을지 몰라도, 우리는 허무주의적 평등에 반하는 ‘취향’들을 갖고 있다. ‘달팽이보다는 참새가, 못보다는 망치가 되고 싶다’고 하는 <엘 콘도 파사>의 가사처럼 말이다.
우리는 의미와 가치의 체계를 만드는 동시에 그 체계에 의존해 삶을 살아야 하고, 동시에 삶의 경험은 우리가 가진 의미와 가치의 체계를 변화시킨다. 이 체계는 완성된 건축물이 아니라 비바람과 추위를 피하기 위해 만든 가건물 같은 것이며, 우리는 이 건물을 끊임없이 해체하고 다시 세우고 비가 새는 틈새를 막고 무너지는 기둥을 받치거나 대체해야 한다. 하지만 당신이 원한다면 꽤 튼튼하고 견고한 건물을 지어 안정된 원칙에 따라 삶을 살 수도 있다. 이 경우 안정감을 누리는 대가로 변화와 유연성은 어느 정도 희생해야 할 것이다. 아니면 가벼운 천막 같은 집을 갖고 자유롭게 떠돌아다닐 수도 있다. 아니면 두 가지 방식을 어떤 방식으로인가 조화시킬 수도 있다.
우리는 삶의 의미에 대한 가설들을 갖고 산다. 그 가설들이 진리로 확증될 날은 오지 않겠지만, 그런 가설들에 의존해 우리는 기획하고 선택하고 실천한다.
어떤 가설들을 세우고 삶에 그 가설들을 어떤 방식으로 적용할지를 가장 아래에서 결정짓는 것은 결국 당신의 ‘취향’이다. 취향은 혹시 그 단어가 풍길지 모르는 뉘앙스와 다르게, 우리가 매우 진지하게 여겨야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