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아시다시피"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다. -2-
2화. "아시다시피."
1부.
2.
이계성이라는 자연재해가 지나갔다. 한바탕 난리굿을 치르고 나니 묘하게 상쾌한 기분도 든다. 이상한 가설이지만 이계성 할머니 같은 재난이 훑고 가면, 그날은 더 이상 문제가 없는 하루가 되고는 했기 때문이다. 기지개를 켜본다.
“억!”
내우외환이라고 했던가. 목인지 어깨인지 모를 애매한 위치에 담이 왔다. 밖에서는 이계성이, 안에서는 담이 나를 괴롭힌다. 되는 일 참 더럽게 없다. 짜증이 솟구쳐 주민센터 밖으로 향한다. 그리고 담배 한 대 사악. 시선에 현수막이 하나 보인다.
‘강병1동 제7구역 재개발 승인 완료! 명품 마을의 완성을 해냈습니다!’
뭐 아주 틀린 말은 아니다. 내가 일하는 강병1동은 제법 괜찮은 동네다. 동네 바로 앞에 있는 지하철역인 천호역은 5호선과 8호선 환승역이며, 근처 버스들도 대개 천호역을 지나가기 때문에 환승도 편리하다. 무엇보다 한강과 매우 가깝다. 이런 이유들로 인해 강병1동은 과거 서울로 상경한 가난한 사람들이 모여 살던 동네였지만, 지금은 동네의 80%가 신축 브랜드 아파트들로 채워졌다. 한 마디로 상전벽해의 동네가 되었다.
참 신기한 게, 동네도 사람이랑 똑같아서 힘들었던 과거는 잊고 싶었는지 강병1동은 원래 다른 이름이었다고 한다. 근데 본격적으로 재개발이 들어가고 부동산 가격이 올라가면서 이에 걸맞게 동네 이름을 바꿨다고 한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지만, 허름했던 과거를 잊은 부동산은 미래 자산을 보장한다. 대체 이 나라와, 이 동네와, 이계성 할머니는 어쩌다 이렇게 된 걸까. 에라 모르겠다. 대한독립 만세.
자리로 돌아온다. 몽롱하다. 이렇게 평화롭게 하루가 끝났으면 좋겠다. 하지만 어림도 없지. 업무용 내선 전화가 시끄럽게 울린다. 민원전화겠지. 귀찮다. 조용히 있고 싶다. 내가 받지 않으면 전화는 계속 울리겠지. 빨리 고요함을 되찾고 싶어 전화를 받는다.
"따뜻함이 함께하는 강병1동 주민센터 주무관 강동노입니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안녕하십니까. 거기 동사무소지요?"
"네. 맞습니다. 무슨 일로 전화 주셨을까요?"
"그건 그렇고. 요새는 뭔 센터라 하니 뭔 말인지 모르겠어. 그냥 동사무소라 하지 말이야. 아! 내 정신 좀 봐라. 내가 전화한 이유가. 그거 뭐냐. 저기 그 내가 아는 할머니가 있는데. 내 연락을 며칠 동안 받지 않아서 말이야."
듣자 하니. 여기서 끊지 않으면 귀찮은 일이 생길 게 분명하다. 공무원이 개인 간 푸념까지 받아줄 여유는 없다. 더 이상 받아주면 안 된다. '관공서는 개인 간의 관계는 해결 해줄 수 없다'라는 굉장히 그럴싸하면서도, 자세히 들어 보면 또 아무 말도 아닌 핑계를 일발 장전한다. 적당한 순간에 이 말을 해야 한다. 그래야 정확하게 상대방의 입을 막을 수 있으며 나는 다시 조용히 있을 수 있다. 목소리를 가다듬고, 장전한 문장을 뱉는다.
"선생님. 말씀 중에 죄송한데, 아시다시피."
참고로 ‘아시다시피’는 굉장히 강한 단어다. 이 말을 듣고 "나는 모르는데?"라는 말을 할 수 있는 용감한 사람은 세상에 거의 남아있지 않다. 왜냐? 아시다시피 그건 비밀이다. 하여튼 이번 전화도 나의 승리로 끝내리라. 이 말 많은 할아버지의 주책을 넘기고 다시 고요 속으로 돌아가리라. 그러나 나의 희망찬 기대는 말 많은 할아버지의 강력한 한 문장과 함께 장렬히 전사하게 된다.
"아니 근데, 그 할머니 전화 벨소리가 며칠째 그 할머니 방에서 계속 나는데. 전화는 안 받네. 참 신기한 일이지. 그렇죠?"
신기하다니. 말이 참 많은 할아버지 민원인의 표현에 경의를 표하고 싶다. 이런 무지막지한 소식을 동네 총각 순돌이가 만취 귀가 중 참기름을 밟고 넘어졌다는 정도의 가십처럼 말을 할 수 있다니. 게다가 이 노인네는 반말도 존댓말도 아닌 어중간 한 말로 사람 마음 어지럽게 만드는 형식까지 갖추었다. 이쯤 되면 재능이다.
"선생님, 근데 동사무소, 아니. 주민센터가 남의 집 문을 따고 들어갈 수 있는 강제력이 없어서요. 그러니까 선생님 우선은 119나 경찰서에..."
"아니 근데! 이 할머니가 자기가 나라에서 돈도 받을 수 있는 영세민인데, 동사무소에 있는 호랑이상 사기꾼 때문에 매번 물 먹는다고! 동사무소 가서 아주 박살을 낼 거라고 매일 말했는데 혹시 동사무소에서 이 할머니 상황을 아나 했지. 그 할머니 이름이 이성계였나?"
조선의 이성계는 위화도 회군을 통해 나라를 세웠지만. 나는 짤막한 통화 속 이름에 정신머리 회군을 감행한다. 물론 이성게는 나라라도 세웠지만, 난 이성계와 달리 얻을 수 있는 게 없다.
"선생님. 제가 처리할 여지가 있는 일이네요. 혹시 말씀하시는 그 할머니 집 주소가 어떻게 되나요?"
말 많은 민원인은 기다렸다는 듯 주소지를 빠르게 읊었다. '강병1동 13-5호 동궁빌라 101호' 동시에 주민조회 시스템에서 이계성 할머니를 조회 해본다. 민원인이 말한 주소와 일치했다. 게다가 이계성 할머니의 마지막 상담자가 나였으며 더 최악인 건, 할머니가 사는 골목은 내가 담당하는 지역이었다. 고로. 이 사건은 나의 업무다. 일단 얼버무려 전화를 끊고 119에 관련 내용을 신고한다. 뒤이어 팀장님에게 보고를 한다. 어쩐 일로 팀장님은 깨어 있었다. 아마도 나의 통화를 듣고 깼으리라. 팀장 직위쯤 되면 자기가 연루될 만한 일에 부교감 신경이 빠르게 반응하는 모양이다. 팀장님은 나의 통화 내용을 듣고 자신에게 문제가 생길 수도 있다는 판단이 들어 기상을 했을 게 분명하다. 나도 팀장이 되면 꼭 저렇게 뻔뻔해질 거다. 팀장님은 짐짓 모든 상황을 본인이 통제한다는 느낌의 근엄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팀장님은 나에게 출동을 명령한다.
"강 주임. 지금 바로 다녀오게. 행여나 문제 생기면 연락을 주게나!"
태권브이에게 지구를 침공한 외계인과 싸우라고 출격 신호를 내릴 때보다 더 비장한 출동 명령이다. 내 옆자리 근무자인 이수진 주임을 바라본다.
“저도 같이 나갈까요?”
“아니에요. 굳이 여러 명 나가는 것보다는, 현장에서 문제 생겼을 때 주민센터 업무 봐줄 사람이 여기 있는 게 좋겠어요. 저 혼자 다녀올게요.”
“알겠어요. 문제 생기면 저한테 연락 주세요.”
수진 주임은 참 믿음직한 동료다. 어떻게 아냐고? 수진 주임은 내 옆자리 주임이면서, 동시에 대학교 한 학번 후배이기도 했다. 수진이는 대학 때부터 똑똑했고, 담백했으며, 냉철한 사람이었다. 그런 수진이는 후배지만 어딘가 나사 빠진 채로 살아가던 나를 부모된 마음으로 잘 챙겨주었고, 서로 좋은 선후배 관계를 유지하며 지냈다.
그런데 참 신기하게도 나와 수진이는 따로 이야기를 하지도 않았는데 둘 다 같은 해에 공무원 시험을 치렀다. 게다가 같은 자치구로 발령이 났고. 게다가 이번 인사 발령 때 수진이라 우리 강병1동으로 오면서 아예 옆자리에서 일을 하게 되었다. 직장에서 내가 원래 알던 사람이 있다는 게 마음이 참 놓인다는 걸 이번 인사 발령 때 새삼 느꼈다. 내가 일을 건성으로 해도 도와줄 사람도 생기고 말이다.
"수진 주임님 그럼 나 출장 좀 다녀올게요."
"알겠어요. 저도 전화 대충 들어서 상황은 아니까. 얼른 다녀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