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오호. 통재라."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다. -3-
3화. "오호. 통재라."
1부.
3.
외투를 입고 주민센터 밖으로 향한다. 오만가지 생각이 다 든다. 왜 하필 이계성 할머니일까. 이 할망구는 여러 각도로 나를 괴롭히는구나. 이계성 할머니는 나한테 온갖 분노와 저주를 퍼부었는데 나는 이계성 할머니가 전화를 받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이렇게 튀어 나가야 한다는 게 서글프다. 언제까지 이런 쓸모없는 짓을 해야 하나. 내가 이렇게 고생하는 걸 누가 알아주기는 할까. 알아주는 건 차치하고 내가 하는 이 짓들이 의미나 있는 일들일까.
사람들은 내가 일하는 강병1동에서 일을 한다고 하면 좋은 동네에서 일을 하니 편하지 않냐고 묻고는 한다. 이해는 하는 게, 언론에서는 강병1동은 재개발 이후 사실상 강남이라고 떠들어 댔다. 실제로 재개발 이후에는 부동산 가격도 엄청나게 상승했고 이곳에 사는 사람들의 면면도 모두 바뀌었다고 한다. 그러나 내가 하는 일은 신흥 부유촌인 강병1동에는 존재하지 않을 것 같은, 가난에 대한 일이다. 가난과 일을 한다는 건 곧 이계성 할머니 같은 인외의 존재들과 끝없이 마주해야 하는 일이기도 하다. 아마도 근처 고급 브랜드 아파트 주민들은 내가 아무 일도 안 하며 탱자탱자 놀기만 하는 거머리 공무원이라고 생각하겠지. 이 무능력한 부자 고학력자들아. 그 거머리들과 싸우고 있는 게 나란 말이다.
이계성 할머니의 주소지를 지도 어플리케이션에 입력하고 안내를 따라 걸어간다. 이계성 할머니가 사는 동네인 7통은 고급 아파트와 환승 지하철과는 아예 반대편에 있는 지역이라서 재개발의 영향력이 미치지 못한 곳이기 때문에 빈곤층이 많이 살고 있는 지역이다. 다만 근처 브랜드 아파트들은 7통을 향해 만리장성에 가까운 벽을 쌓았고, 출입로마저 내지 않았다. 덕분에 아파트 주민들은 7통처럼 가난한 지역이 강병1동에 있는지 모르는 사람들도 많다. 그렇게 가난은 잘 숨겨져 있다.
이계성 할머니가 사는 동궁빌라는 주민센터로부터 한참을 걸어가야 한다. 한겨울 추위가 급습한다. 추위가 좀 덜 느껴질까 싶어서 최대한 빨리 걸어본다. 하지만 역시 춥다. 겨울바람마저 나에게 매몰차구나. 공원을 끼고 하염없이 걸어간다. '내가 잘못 왔나?' 싶을 만큼 걸었을 때쯤 편의점이 보인다. 여기서 오른쪽으로 꺾어서 세상 끝까지 걸어간다는 마음가짐으로 직진하다 보면, '콤푸타 세탁' 간판이 건물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다. 맞춤법도, 간판의 안전도 영 거슬리지만 지금은 내 알 바가 아니다. 콤푸타 세탁소에서 몸을 45도 왼쪽으로 틀어서 그렇게 또 하염없이 걸어간다. 그렇게 가다 보면 과거에는 제법 규모가 컸을 것으로 보이는 전통시장이 보인다. 다만 이 전통시장은 재개발의 여파로 손님이 줄어든 것을 넘어, 시장에서 장사를 하는 매장 자체가 거의 없다시피 했다.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아마 재개발만의 문제는 아닐 거다. 이 전통시장은 더러웠고, 냄새까지 난다. 몇 없는 매장 중 생선 집은 매대에 생선보다 파리가 더 많고, 순대집 문은 돼지기름을 바른 건지 손을 대면 바로 쩍쩍 붙어버리는 불쾌감을 선사한다. 요즘 세상에 이런 곳에서 누가 장을 보고 싶을까. 청결을 딱히 따지지 않는 나조차도 여기서는 아무것도 사고 싶지 않다. 전통시장도 이제는 자연사의 길목에 접어든 게 아닐까. 이런저런 상념을 하다 시장 앞에서 아는 얼굴이 하나 튀어나왔다.
"아니 이게 누구야! 우리 동사무소의 꽃미남! 우리 동네 수급자들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는 우리 미스터 깡 아닌가!"
이 아저씨는 강병1동 수급자 밀집 지역 7통의 천하대장군. 이대윤 아저씨다. 왜 천하대장군이냐. 풍채가 대단해서는 아니다. 물론 군 장성 출신인 것도 아니다. 그저 이대윤 아저씨가 언제나 시장 앞 공터에서 술을 마시고 있거나. 만취해서 누워있기에 붙은 별명이 천하대장군이다. 이대윤 아저씨는 이런 별명의 뜻을 아는지 모르는지 자신의 별명을 매우 자랑스럽게 여겼다. 이런 이대윤 아저씨는 종종 만취한 채로 주민센터에 들어와 크게 떠들며 직원들을 괴롭히기도 했다. 다만 이대윤 아저씨는 경찰들한테 끌려 나가도 웃음을 잃지 않았다. 자기 딴에는 유쾌하다고 생각하겠지만 경찰들에게는 불쾌 그 자체인 인물이 바로 이대윤 아저씨였다.
그런 유쾌하고도 불쾌한 이대윤 아저씨는 자꾸 나한테만 '미스터 깡'이라고 친근하게 불렀다. 평소 같았으면 이대윤 아저씨의 농에 대꾸를 했을 거다. 하지만 오늘은 농을 받을 상황이 아니다.
"대윤 아저씨. 나 오늘 되게 바빠요. 그러니 그냥 갈게요. 상담 필요하시면 주민센터. 아니 동사무소로 전화 주시거나 직접 오세요. 그리고 절대로 술 마시고 오면 안 됩니다!"
"에이 미스터 깡! 사람 섭섭하게 왜 그래. 그러지 말고 막걸리 딱 한 잔만 하고 가. 내가 한 잔 줄게. 공무원 나부랭이 돈도 없잖아. 시장 염 씨 할망구가 나 먹으라고 순대도 좀 썰어줬어. 자 입 벌려. 세계 제일 순대 들어가신다!"
이대윤 아저씨는 바닥에 있던 순대를 젓가락으로 들어 나에게 건넸다. 이대윤 아저씨는 오늘처럼 추운 날에도 시장 입구 공터 바닥에 접시 하나 없이 순대를 공터 흙바닥에 뿌려놓고 말 그대로 주워 먹고 있었다. 이런 식사 방식은 청동기 시절 이후에는 사라졌을 텐데. 말세다. 위생 상태에 관해 한마디 할까 하다가 참았다. 이대윤 아저씨를 상대할 시간이 없기 때문이다. 안 그래도 바쁜데 왜 이런 인간까지 나를 괴롭힐까. 그냥 순대고 나발이고 한 대 올려붙이고 끝낼까. 어금니를 다시 꽉 물어본다. 아프다. 이 정도로 아픈 걸 보니 곧 임플란트도 해야 한다. 비쌀 텐데, 내 계좌에 얼마가 있더라? 이제 곧 설날이 오면 부모님께 용돈도 드려야 한다. 이뿐만이 아니다. 사는 집 월세도 내야 하고. 곧 내 방 재계약 일자도 다가오는데, 아마도 보증금과 월세도 오를 게 분명하다. 이대윤 아저씨 폭행에 대한 고민은 접어두자. 당분간은 더러워도 참고 일 해야 한다.
"아저씨. 저 갑니다. 그리고 술 자실 거면 집 가서 드세요. 멀쩡한 집 두고 왜 여기서 먹어요. 집에서 안 드실 거면 뭐라도 깔고 먹어요. 동네 땅바닥에서 먹지 말고요. 동네 집값 떨어지게."
"미스터 깡! 이러면 나 서운해! 그리고 이 박사님이 술과 안주는 밖에서 먹어야 건강한 거라고 그랬어! 그래야 사람들이랑 대화도 하고 그런다고. 짜식이 어디 알지도 못하는 게. 너 인마 박사도 아니지?"
"이 박사? 어이구야. 박사가 퍽이나 그런 말을 했을까요. 됐고. 대윤 아저씨 알코올 중독이라니까요. 제가 지난번에 말씀드렸던 정신과 상담은 받았어요? 어려우면 말 만해요. 제가 상담도 해드리고 요양병원도 넣어 드릴게요. 서당 개 3년이면 풍월을 읊는다고 저도 의사만큼 상담 할 수 있어요. 특히 아저씨 같은 알코올 중독자한테는."
"새끼 말 참 개 같이 하네. 너 인마 싸움 잘 해? 나랑 한 따까리 해볼텨? 내가 인마 도합 27단이야! 그리고 인마. 상담을 받으라고? 개뿔 지난번에 너한테 우리집 전구 나갔다고 고쳐 달라고 한 것도 무시했지? 그것도 인마 이 박사님이 고쳐주셨어! 알지도 못하면서. 정신과 상담은 너나 받아라. 퉤."
"27단? 대윤 아저씨 거짓말 좀 하지 마요. 그리고 자기 집 전구는 당연히 자기가 고쳐야지. 그리고 무슨 박사라는 사람이 남의 집 전구나 갈아주고 있어요. 나한테는 거짓말 안 해도 된다니까요."
"진짜라니까! 안 되겠다. 넌 나의 27단의 무용을 좀 봐야 쓰겠다."
흠칫한다. 27단은 진짜일까. 물론 거짓말이겠지만 진짜면 어쩌지. 이 나이 먹고 맞으면 되게 서러울 텐데. 하지만 나 사나이 강동노. 태권도 학원조차 다닌 적이 없지만 한국사 능력시험 3급이라는 단증을 가지고 있노라.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가 없기에 27단의 이대윤 아저씨보다 내가 강하다. 아차. 내가 지금 여기서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다. 이계성 할머니 사건이 우선이다.
"됐어요. 나 바쁘니까 갑니다!"
"야 인마! 순대 먹고 가! 전구는 이 박사님이 고쳐줬으니까 너 귀찮게 안 해. 막걸리도 한 잔 하고 가!"
"됐어요! 나 진짜 갑니다."
"저 못생긴 놈이."
머리가 지끈거린다. 왜 이런 모멸감까지 느끼며 일을 해야 할까. 게다가 '이 박사'는 또 뭔가. 요새 자꾸 동네 기초생활수급자들이 "이 박사님이 뭐 어떻게 하라고 했다."라고 말을 하는데. 누구인지도 모르겠고, 무슨 연유인지도 모르겠다. 이 박사라는 건 노인네들이 보는 방송에 나오는 뽕짝 가수일까. 모르겠다. 이놈이고 저놈이고 다 싫다. 게다가 난 석사라서 박사라는 명칭에 자존심도 좀 상한다.
나도 박사는 아니더라도 석사인데 이따위 일을 당하고 있어야 할까. 석사로서 말하건대, 난 이런 일을 할 사람이 아니다. 지금이야 이런 더러운 꼴을 당하고 있지만, 한때 나는 행정고시도 도전했던 놈이다. 행정고시에 실패한 건 내가 실력이 없어서가 아니다. 신림동 고시촌에서 더 이상 버틸 돈이 없어서 잠시 후퇴했을 뿐이다. 두고 봐라 돈을 모아서 다시 신림동에 들어가 행정고시에 도전할 거다. 그리고 장원급제를 하고, 외제차 한 대 뽑아서 이 동네도 시원하게 한 바퀴 돌아주리라. 그때까지는 이런 시궁창에서 밥을 빌어먹고 살아야 한다. 오호 통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