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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다. -4-

4화. "욧!"

by 동노야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다. -4-

4화. "욧!"



1부.


4.


소소한 모욕들을 감내하며 이계성 할머니 주소지 앞에 도착했다. 도로명 주소를 대차대조 해본다. 번지수도 맞고. 빌라 현관 옆 동판에도 동궁빌라라고 떡 하니 박혀 있다. 주변을 돌아본다. 자주색인지 고동색인지 모를 건물, 스티커를 억지로 떼어낸 자국이 가득한 우편함, 열 개 하나는 너덜너덜한 계단 손잡이. 이계성 할머니가 살고 있는 동궁빌라는 대로변에 있는 고급 아파트들과 달리 90년대 어귀에 시간이 멈춰진 듯한 공간이다. 게다가 빌라 공동현관에는 '동궁빌라'라고 쓰여 있어야 했지만, 누가 참 부질없이 성실하게도 ‘동궁빌라‘ 글자 중 '동'의 'ㄷ' 글자 가운데의 페인트를 벗겨내어 'ㄸ'으로 보이게 만들었다.


멍청한 짓을 참 성의 있게도 만든 작품이다. 누가 돈을 주는 것도 아닌데 어떻게 저기까지 올라가서 자기 손으로 페인트를 벗겨놓을 생각을 했을까. 이 정도 노력을 할 거라면 폐지라도 줍는 게 더 생산적인 일이지 않을까. 꼭 이런 장난질은 똥 아니면 섹스라는 글자를 넣어야만 직성이 풀리는 유아기적 인간들이 있다. 인간의 본능을 표출한다고 생각한다면 ’똥궁빌라‘가 되어버린 동궁빌라는 현대미술에 가깝지 않을까. 그것도 아니라면 진짜로 동궁빌라 보다는 똥궁빌라가 어울리는 현실을 보여주기 위한 혁명의 움직임일까. 전세계 빌라 거주자여 일어나라. 얻는 것은 똥궁이요. 잃는 것은 동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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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부질없이 성실한 망상이 끝나갈 즈음. 이계성 할머니 집 앞에서 한 할아버지가 서성이고 있는 걸 발견했다. 이계성 할머니의 가족이 이미 119에 신고한 걸까. 그게 아니라면 저 남자는 이계성 할머니의 내연남일까. 그것도 아니라면 이계성 할머니와의 싸움 끝에 이계성 할머니를 살해한 사람일까. 어떤 경우이든 다행이다. 이계성 할머니의 가족에게 이계성 할머니 일을 떠넘기고 사무실로 돌아갈 못된 희망을 품는다. 그러나 나의 희망이 박살 나는 데 그리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안녕하세요. 혹시 이계성 할머니 가족분이실까요?"

"아니. 나는, 음? 목소리 듣자 하니, 아까 전화 받은 공무원 양반이구만! 나 이계성 할매 집 꼭대기 층에 사는 사람인데, 아유 매일 소리소리 지르며 돌아다니는 할매가 안 보이니까. 이상하다 싶은 거야! 내가 또 사람 관찰을 잘 하는데, 이게 말이지..."


말이 많은 걸 보니 아까 내가 통화한 할아버지가 맞다. 말을 줄일 사람이라는 걸 알기에 시간이나 때울 겸 망상이나 다시 하고 싶다. 그러나 날은 추웠고 상황은 급박했다. 말 많고 사람 관찰하기를 좋아한다는 할아버지와의 대화를 대충 얼버무리고 계단을 내려가 이계성 할머니 집 현관문을 두드린다. 할머니의 주소지는 '동궁빌라 101호'로 되어 있지만, 실제 101호는 1층이 아닌 지하였다. 근데 왜 B101호가 아니냐고? 지하라는 사실을 이렇게라도 숨기고 싶은 게 부동산의 논리다. 돈이 없다면 이를 수용해야만 한다. 그렇게 다가선 이계성 할머니 집 앞 계단은 대낮이지만 차양막이라도 설치한 듯 빛이 전혀 들지 않았다. 101호 현관 근처에는 할머니가 끌고 다니는 유모차가 있었고. 그 뒤에는 쥐가 죽어 있었다.


"할머니. 동사무소입니다. 문 좀 열어주세요."


벨도 누르고, 문도 두드려 보지만 대답이 없다. 메모해 온 이계성 할머니의 전화번호로 전화를 걸어본다. 집 안에서 벨소리가 들린다. 이 시점부터 공포감을 느낀다. 평범한 고독사 현장이 통상 이렇기 때문이다. 집 안에서 들리는 전화벨 소리, 그러나 받지 않는 노인과 열리지 않는 문까지. 고독하게 죽어간 한 사람의 최초 사망선고가 사실상 이 순간에 이루어진다. 내 속을 모르는지 나를 따라온 꼭대기 층 사는 말 많고, 참견하기를 좋아하는 할아버지가 뒤에서 장광설을 시작한다.


"공무원 양반. 내 생각에는 말이야. 이계성 할매가 거진 매일 하루 종일 돌아다니는데, 아니 딱 3일 전부터 보이지를 않더라고! 저 할매가 허구한 날 돌아다니면서 사람들한테 시비 붙이고, 여기저기 들쑤시고 다니는데. 그게 딱 끊긴 거야. 내가 또 이건 이상하다 싶었지! 내가 또 사람을 잘 관찰하는데 말이야. 이계성 할매가 처음부터 그런 건 아니었어. 언제부터인가 감정 조절을 못 하더라고. 근데 또 내가 신사라 무례한 짓을 해도 용서를 해주고 그랬지. 왜냐면 이계성 할매가 딱 치매노인의 전형인 거라!"


노인네 말 참 많다. 외로워서일까. 아니면 자의식 과잉일 수도 있다. 말 많은 할아버지의 말소리를 뚫고 집 안에서 이계성 할머니의 것으로 추정되는 휴대전화 벨소리가 계속 울린다. 나의 일상에 아무 일도 없으리라는 희망은 사라졌다. 내 귀에 희망이 부서지는 '바사삭' 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그러나 '바삭' 소리는 119 대원이 도착해 계단을 내려오는 소리였다. 민망해라. 정신을 차리자. 지금이라도 이계성 할머니 일을 119 대원에게 넘겨야 한다.


"환자분 어디 계시나욧?"


잘못 들은 게 아니다. 분명히 '욧'으로 말을 마무리했다. 상황에 맞지 않은 귀여움을 간직한 119 대원이다. 근데 ’욧‘은 발음 하기도 힘든 자음인데, 말버릇인 걸까 아니면 귀여워지고 싶은 걸까. 망상은 접자. 지금은 이계성 할머니 일을 내 손에서 떠나게 만드는 게 최우선이다.


"안녕하세요. 강병1동 주민센터 사회복지 2팀 주무관 강동노입니다. 제가 상담했던 할머니가 며칠째 안 보이고, 전화를 해도 안 받으셔서 주소지 집으로 찾아왔습니다. 근데 전화를 받지 않으시는데. 전화 벨소리가 집 안에서 들리네요. 근데 아시다시피 일반 공무원인 저는 문을 열 수가 없어서."


119 대원의 눈썹이 꿈틀거린다. 119 구급대원으로서의 직업적 소명이 발휘되어 진지해진 걸까. 아니다. 아마 일을 자신한테 떠넘기려는 나의 알맹이 없는 발언에 대해 분노하는 것 같다. 양심에 가책을 느낀다. 이번에는 욕을 먹어도 참아야겠다. 119 대원이 입을 열었다.


"아니 그러면 신고하실 때 문이 잠겨있다고 말을 하셔야지욧! 그래야 저희가 문 여는 기계도 가져오지욧! 문을 열기 위해서는 절차가 따로 있단 말이에욧!"


얼씨구? 세상이 요지경이라는 사실은 알고 있다. 근데 이 시국에 신고할 때 문이 잠겨있다는 말을 먼저 해야 하는 이유를 설명하는 사람을 마주하고 있노라면. 이건 또 별천지다. 역시 충실한 직업인은 다들 어디 하나씩은 망가져 있다.


"죄송합니다. 119에 신고할 때 말씀을 드렸어야 했는데. 제가 잊어버렸네요. 죄송합니다. 근데 말씀 중에 죄송한데, 그러면 제가 지금 당장 해야 할 일이 있을까요?"


"일단 주민센터 직원분은 여기 건물 소유주분께 연락을 먼저 해주세요. 여분의 열쇠가 있는지 확인해주시고. 없다고 하시면 문 강제개방 하는 걸 양해만 구해주세요. 문 따는 기계는 제가 혹시 몰라서 가져왔으니까욧."


절씨구? 119 대원은 문 따는 기계를 처음부터 가지고 왔었다. 근데 왜 나를 그렇게 혼냈던 걸까. 그저 누군가를 혼내고 싶었던 걸까. 일단은 건물 소유주 신상을 알아내기 위해 주민센터에 전화를 걸었다.


"따뜻함이 함께하는 강병1동 주민센터 주무관 이수진입니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수진아! 나 강동노 주임. 아니. 아니. 동노인데. 나 출장 나온 이계성 할머니 알지?"

"이제야 도착했어? 알기야 알지. 근데 어쩐 일로 전화를 했어. 뭔 일 난 건 아니지?"

"설명하면 길다. 예전에 이계성 할머니 기초생활수급 신청할 때 제출했던 임대차계약서 사본에서 집주인 전화번호만 나한테 문자로 보내주라. 최대한 빨리 부탁할게."

"알겠어. 아! 그리고 구청에서 전화 왔는데."

"나중에! 나중에! 나 복귀하면 내가 처리할 테니까. 이계성 할머니 집주인 전화번호만 빨리 보내줘."

"아니 주임님! 아니. 오빠! 잠..."


전화를 후딱 끊는다. 수진이랑 대화가 길게 할 수 없는 상황이다. 심호흡을 한다. 정신 차리자. 이제부터 문제가 생기면 안 된다. 지금부터 발생하는 모든 일은 내가 처리해야 하는 일이 된다. 어떻게 해서든 일 자체를 만들면 안 된다. 수진이가 빨리 문자로 이계성 할머니의 가족 전화번호를 보내주고, 가족과 연락만 된다면 이계성 할머니 일이 나에게 넘어오는 걸 막을 수 있다. 수진이를 믿는다. 고마운 자식. 돌아가는 길에 간식으로 먹을 붕어빵이라도 사서 가야겠다. 수진이에게 받은 집주인 전화번호를 누른다. 제발 받아라. 근데 참 신기하지. 전화 벨소리가 내 근처 어디선가 들린다.


"세상은 요지경! 요지경 속이다! 잘난 사람은 잘난..."


진짜 전화벨 소리가 등 뒤에서 울리고 있다. 신나는 노래 가사보다도 요지경인 건, 이계성 할머니가 사는 집 건물 소유주는 최초로 이계성 할머니가 안 보인다고 나에게 전화했던, 그리고 사람 관찰하는데 조예가 깊다는 저 말 많은 할아버지라는 사실이었다.


"여보세요?"

"아... 안녕하세요. 그... 전화를 굳이 받으시네요... 그... 아니에요."

전화를 끊고 할아버지에게 다가간다.

"할아버지. 혹시 여분의 열쇠 가지고 있으세요?“

”아니야. 당장은 없어.“

”그럼 이거 문을 좀 개방해도 괜찮을까요? 사연은 아실 테고."

"오케이. 내 허락하지. 걱정 말고 열어도 괜찮아. 문제 생기면 내가 책임질게. 그러면 아무런 문제가 전혀 없네. 그치? 역시 내 말이 맞지?"


이 말 많은 할아버지는 왜 정작 자기가 집주인이라는 중요한 사실은 말을 안 했던 걸까. 그리고 끝없이 나오는 저 유머는 어디서 나오는 걸까. 외우고 다니는 레퍼토리일까. 그만두자. 생각해서 기분 좋을 일도 아니다. 119 대원은 우람한 기계로 이계성 할머니가 사는 101호 문을 강제로 개방했다. 문고리가 없어진 문은 마치 집에 들어오라는 것처럼 힘없이 약간의 틈을 우리에게 내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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