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린과의 세 번째 만남: 현실을 수용하는 방법 '근본적 수용'
2022년 2월 1일. 심리 상담가 에린과의 세 번째 만남.
"그 사람이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 있죠? 하루아침에 저한테 이런 일이 생긴 게 믿기지가 않아요. 너무 억울하고 답답해요. 어디서부터 잘못된 건지 계속 생각을 해봐도 도저히 모르겠어요. 화가 나서 잠도 안 와요. 가까스로 잠들어도 새벽에 자꾸 깨요. 눈 뜨자마자 잠들기 전에 했던 생각이 일초 만에 물 밀듯이 밀려들어와요. 미치겠어요. 그날의 상황들이 계속 생각나요. 왜 이렇게 된 건지 일부러 더 생각하기도 해요. 그러지 않으려고 해도 벗어날 수가 없어요. 너무 슬프고 화나고 억울하고… 제게 왜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 알아내려고 쉬지 않고 생각하니까 정신이 돌 것만 같아요.”
“많이 힘드시죠. 주로 어떤 생각을 하나요? 새벽에 깨자마자 무슨 생각이 드나요?”
“그날의 모든 것들을 생각해요. 그 사람의 말투, 표정, 대화 내용, 황당한 상황들, 오해 등등이요. 그러면 극단적으로 슬퍼지고 배신감이 들어요. 감정이 너무 북받치다 보니까 잠도 안 와요. 밤 12시에 누우면 새벽 3시까지 이러고 있어요. 그리고 겨우 잠에 들어도 새벽에 거의 십분 마다 깨요. 깨자마자 ‘왜 이런 일이 나에게 발생했지? 뭐가 잘못된 거지? 내가 어떻게 해야 하지? 어떻게 해결해야 하지?'라는 생각이 마구 들어요. 뇌가 쉴 새 없이 생각하는 동안에 마음은 더욱 슬퍼지고 더욱 분노로 가득 차요. 이게 밤마다 반복돼요.”
“십분 마다 깬다니 정말 힘들겠어요. 그런 생각들 자체도 힘든 생각이고, 그런 감정들도 혼자서는 다루기 버거운 감정들이에요. 잠도 못 자고 이걸 반복하면 얼마나 힘들고 지치겠어요.”
“정신이 나갈 것만 같아요. 잠을 못 자니까 더 그렇고요. 생각을 열심히 하다 보면 그 사람이 내게 왜 갑자기 등을 돌렸는지 답이 나올 것만 같아서 더욱 집착해서 생각하게 돼요. 답을 알아내면 이해를 하게 될 것 같고, 이해를 하면 덜 괴로울 것 같거든요.”
“답이 나왔나요?”
“아뇨. 아무리 생각해도 모르겠어요. 그래서 하루 전, 한 달 전, 세 달 전, 일 년 전으로 돌아가서 더 파헤치기 시작해요. 내가 무엇을 잘못했는지, 어떻게 상황을 바꿀 수 있었을지, 학을 뗄 정도로 집착하듯 생각해요. 제가 봐도 이런 제가 너무 싫고 질려요.”
“그 생각들을 하면서 느끼는 감정은 어떤 것들이 있나요?”
“슬퍼요. 그리고 불안하고, 초조하고, 절망스럽고, 억울하고, 허탈해요.”
“어떤 것이 가장 슬프죠?”
“그 사람이 나를 버렸다는 사실이 가장 슬퍼요. 사람 속은 알 수가 없다더니… 정말 믿었어요. 그런데 속으로는 나를 내칠 생각을 하고 있었다니… 나를 이렇게 함부로 대하다니… 충격받았어요. 화도 나고 황당하기도 하지만 그 무엇보다 슬픈 마음이 제일 커요. 가장 믿었고 사랑했던 사람을 잃었으니까요. 그래서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슬퍼요. 이 모든 게 현실 같지가 않아요.”
"그렇죠. 배신당했다는 생각이 들고 슬픈 감정들이 드는 거 충분히 이해해요. 그럴 수 있어요. 지금 처한 상황은 쉽지 않은 상황이에요. 제가 그 상황이었어도 그랬을 거예요. 상처받고, 화가 나고, 슬프고, 황당하고, 무기력하고. 그런 감정들을 느끼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거예요.”
“그렇죠? 제가 이상한 게 아니죠?”
"그럼요. 감정이잖아요. 본인이 느끼는 것들이 감정인 건데, 옳고 그름이 어디 있겠어요. 이상한 것도 절대 아니고요. 충분히 그런 감정을 느낄 수 있고, 정당한 감정들이에요.”
“네 감사해요.”
“그런데 말이에요.”
“네”
“문제는 계속해서 그 사건에 대해 반복해서 생각하는 거예요. 그 사람이 왜 상처를 주고 떠난 건지, 왜 그런 일이 발생한 건지, 내가 무엇을 잘못한 건지, 끊임없이 스스로에게 묻고 있잖아요. 그런데 그렇게 집착하듯 생각하고 분석해내서 왜 그러한 상황이 발생했는지 알게 되면 뭐가 바뀔까요? 그 사람이 왜 그런 짓을 했는지 이유를 알게 되면 뭐가 바뀔까요? 알게 되면 지금의 상황이 바뀔 것만 같아서 그러나요? 아니면 지금 느끼는 슬프고 화나는 감정들이 없어질 것만 같아서 그러나요?"
"글쎄요… 그것에 대해서 생각해 본 적은 없어요. 음… 그러게요… 이유를 알아낸다고 해서 지금 제 상황이나 감정이 바뀔 것 같진 않아요. 오히려 알게 되면 더 절망할 것 같기도 해요. 마치 내가 큰 잘못을 했고 큰 결점이 있었으니 버림 당할 만했다는 말 같아서요.”
"맞아요. 바뀌는 건 없어요. 우리는 나 자신 아니면 컨트롤할 수 있는 것이 없잖아요. 다른 사람의 생각이나 행동은 내 영역 밖에서 일어나요. 내 통제 바깥인 거죠. 그러니 타인을 완벽히 이해한다거나 바꾸는 건 매우 힘든 일이에요. 이 넓은 세상에서 내가 오로지 통제할 수 있는 대상은 나 자신뿐이에요. 그런 세상에서 내가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나는 것은 당연해요. 현재 겪고 있는 일 또한 이러한 맥락에서 보아야 해요. 상처를 주고 떠난 그 사람의 마음을 우리가 어떻게 온전히 이해할 수 있겠어요. 도대체 왜 그런 일이 발생했는지 계속 생각한다고 해서 답을 알아낼 수도 없고, 답을 알아낸다고 해도 지금의 상황과 감정이 바뀌지도 않을 거예요."
"그렇네요… 맞는 말씀이에요. 제가 아무리 생각한다고 해도 그 사람의 생각은 알아낼 수가 없겠네요. 제 머릿속이 아니니까요… 제가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네요. 그럼 전 이제 어떻게 해야 하죠? 이 상황이 너무 괴로운데 제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해요? "
"혹시 Radical Acceptance (근본적 수용)라고 들어본 적 있어요?"
"아니요, 그게 뭐예요?"
"도저히 이해할 수 없고 힘든 상황을 그대로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거예요. 자신의 컨트롤 밖의 상황을 있는 그대로 수용하는 거예요. 그럼으로써 고통이 줄어들 수 있거든요.”
“받아들이라고요? 뭘요? 지금 이 황당한 상황에서 무엇을 받아들여요? 이해가 돼야 받아들이죠.”
“현재 발생한 일들을 있는 그대로 인지하라는 뜻이에요. 받아들이라는 말이 ‘지금 이런 일이 나에게 일어나도 괜찮다’ 거나 ‘이런 일을 당해도 싸다’고 생각하라는 뜻이 아니에요. 힘들지 않아야 한다는 뜻도 아니고요. 때로는 이해되지 않는 상황일수록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더 나을 때가 있어요. 내게 그러한 일들이 일어났다는 것을 그대로 인정할 때, 마음이 덜 고통스러워요. 힘든 상황을 겪고 감정적으로 슬프고 화가 나는 것은 지극히 정상적인 감정 반응이에요. 그렇지만 마음이 고통스러운 것은 달라요. 그 상황을 얼마나 잘 받아들이냐에 따라서 슬픔이 고통으로 가는 것을 막을 수 있거든요.”
무슨 말인지 알 것 같았다. 내가 근본적 수용의 개념을 알고 있었다거나 이미 실천하고 있어서가 아니었다. 불안하고 슬프고 억울하고 걱정될 때마다 난 생각에 과하게 몰입했다. 생각이 쌓이고 쌓여서 산이 되고 그 산에서 산사태가 나고 나를 덮쳐서 지쳐 나가떨어질 때까지 생각을 했었다. 도대체 왜 이런 일이 발생했고, 원인이 어디에 있는 것이며, 누구의 잘못이고, 내가 어떻게 하면 이 상황이 나아질 수 있는 지를 끊임없이 파고들었다. 그리고 온 에너지가 소모되어서 쥐어짜도 생각을 한 방울도 할 수가 없을 때 비로소 그만할 수 있었다. 그렇게 생각이 휘몰아쳐 폐허만 남았을 때 느끼는 감정은 '체념'이었다. '에라이 모르겠다', '어떻게든 되겠지', '될 대로 돼라'. 그때 체념을 할 때 함께 느꼈던 감정의 일부는 '받아들임'이었다. 내가 지금 무슨 용을 쓰든 간에 이미 벌어진 일은 바뀌지 않는다고.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그러니 그만 나를 괴롭히자고. 그러면 불안하고 슬픈 마음이 약간 편해졌었고, 난 오밤중에 드디어 잠이 들 수가 있었다. 그랬던 밤들을 떠올리자, 에린이 내게 해주고 싶은 말이 무엇인지 대략 감을 잡을 수 있었다.
나를 덮치는 생각과 감정의 산사태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하고 싶었다. 그래서 에린이 보내준 자료들과 책을 찾아 읽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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