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존자로서 팬을 들다
— 그의 마지막 문장을 읽고, 나는 생존자로서 펜을 들었다
뉴욕의 겨울은 여전히 매서웠다.
총기 난사 사건이 일어났다는 뉴스 속보는 그날 아침, 조용히 내 손에 들린 커피 잔을 식게 만들었다.
피해자 수보다 내 마음을 더 오래 붙든 건, 가해자가 남긴 단 한 줄의 유서였다.
“내 뇌를 연구해 주세요. 미안합니다.”
그는 셰인 타무라, 고등학교 시절 미식축구 선수였다.
그리고 스스로 가슴에 총을 겨누고 세상을 떠났다.
그의 뇌는 지금 연구소의 얼음 같은 금속 테이블 위에 있을 것이다.
기적은 그에게 오지 않았다.
나는 그 문장을 읽고,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살아 있는 동안엔 알 수 없는 병)
그가 앓았다고 믿었던 병의 이름은 C.T.E.
만성 외상성 뇌병증.
헬멧 속 머리가 매번 흔들리고, 부딪히고, 쿵 내려앉을 때마다
뇌세포는 미세하게 손상된다.
작은 상처들이 쌓이고 쌓이다 결국에는,
감정이 무너지고, 충동이 터지고, 기억이 사라진다.
하지만 이 병은 MRI로도, CT로도 보이지 않는다.
살아 있는 동안엔 진단할 수 없다.
그래서 그는, 머리가 아닌 가슴에 총을 쐈다.
자신의 뇌를 남기기 위해.
자신의 병을 증명하기 위해.
그날 나는 한참을 그 문장만 바라보았다.
그가 죽음으로 남긴 증언은,
내게 살아 있다는 이유로 펜을 들게 했다.
(기적을 받지 못한 이들의 침묵 )
나는 뇌출혈로 쓰러졌던 사람이다.
말이 뒤엉키고, 시간의 조각이 흩어지고,
이름을 잃고 방 안의 구석에 웅크렸던 기억이 있다.
눈을 떠도 세상이 기울고, 누군가의 말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그 모든 혼돈 속에서—나는 운 좋게 살아났다.
사람들은 그것을 기적이라 불렀다.
하지만 나는 안다.
기적은 모든 이에게 도착하지 않는다.
그는 죽었고, 나는 살았다.
단지 확률의 문제였을까.
아니면, 우리는 사회가 선택한 희생과 생존의 이면을 보고 있는 건 아닐까.
(스포츠의 그늘, 이름 없는 상처)
그는 유명하지 않았다.
프로 선수가 되지 못했고, 수많은 ‘학생 운동선수’ 중 하나였다.
하지만 미국에서는 그와 비슷한 죽음이 반복되고 있다.
NFL 스타 아론 헤르난데스, 데이브 듀어슨, 주니어 세우—
모두 C.T.E. 판정을 받은 채 세상을 떠났다.
그들 역시 유서에 같은 말을 남겼다.
“내 뇌를 연구해 주세요.”
그리고 나는 떠올린다.
한국의 김일, 홍수환, 여홍철—
영광 뒤에 숨은 고통을 조용히 견디다, 점점 잊혀진 이름들.
그들은 말하지 않았다.
우리 사회가 듣지 않았기 때문이다.
고통의 언어는, 종종 침묵을 가장한 외침으로만 남는다.
나는 기억하고 싶다
살아 있다는 건, 기억할 수 있다는 일이다.
그리고 기억한다는 건, 남아 있는 자의 책임이기도 하다.
그가 가슴을 쏘고 남긴 문장을,
나는 지금 내 심장 가까이에 새긴다.
나는 뇌출혈 생존자다.
언어를 잃을 뻔했고, 이름을 잃을 뻔했고, 살아남기를 잃을 뻔했다.
그러나 지금, 나는 말할 수 있다.
기억을 잃은 사람들에게 기적은 오지 않았다.
그러니, 기적을 받은 우리가 그들을 기억해야 한다.
그리고 그 기억을 기록해야 한다.
이 글은 그 기록의 시작이다.
(살아 있는 자의 사명)
이 글을 쓰는 나는, 의학자가 아니다.
운동선수도, 유명한 누구도 아니다.
나는 단지 한 번 쓰러졌다가, 다시 일어난 사람이다.
말이 어긋났고, 하루가 기울었고, 시간이 흐릿해졌다가
기적처럼 다시 살아난 사람이다.
그에게 기적은 없었다.
그의 마지막 문장은 절규였고,
나는 그 절규 위에 내 말을 이어붙인다.
살아 있는 자의 말은 기억을 짓는다.
이 글을 읽는 당신이
언젠가 셰인의 이야기를 떠올린다면,
그것만으로도 그는 잊히지 않은 사람이 된다.
그것이 우리가 줄 수 있는, 가장 늦은 기적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