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화:흙으로 돌아가는 것들에 대하여

돌고 돌아...바늘끝에서 이어지다

by 운조





기적이란, 순리를 살아낸 생명 앞에 고개를 숙이는 일

나의 작은 텃밭에도 계절의 그림자가 서서히 드리운다.
한때 푸르름으로 가득했던 상추는 어느새 꽃을 피우고,
오이 넝쿨은 누렇게 바래진 채 바람에 몸을 맡긴다.
탐스러웠던 호박은 마지막 하나의 열매를 남긴 채 줄기를 거두었고,
가지는 그 짙은 보랏빛을 잃고 서서히 시들어간다.

모든 생명이 자신의 마지막 장을 써 내려가는 시간.
나는 오늘도 땅을 만졌다.
시들고 마른 줄기들을 조심스레 뽑아내며,
내 안의 복잡했던 감정들도 함께 정리해본다.
뽑힌 뿌리는 여전히 흙과 단단히 엉켜 있고,
그 아래에는 꺾이지 않은 생의 끈질김이 숨어 있었다.

수확은 끝났다.
이제는 놓아줄 차례다.
나는 시든 잎과 줄기를 퇴비통에 모았다.
한때 내 식탁을 풍요롭게 채워주던 것들이
이제는 썩어 새로운 생명을 위한 흙이 될 것이다.

그 과정을 바라보며 나는 비로소 이해했다.
텃밭의 시간은 결코 직선이 아니라, 완전한 원(圓)이라는 것을.
끝은 곧 시작이며, 썩음은 자람을 향한 예비였고,
이름 없는 순환이야말로 생명을 지탱하는 가장 근본적인 질서라는 것을.

인간은 흔히 ‘무엇을 남길 것인가’를 고민한다.
이름, 업적, 기억.
그러나 흙은 말한다.
남기는 삶보다, 기꺼이 돌아가는 삶이 더 위대하다고.
다른 생명의 거름이 되어, 누군가의 뿌리가 되어주는 삶이야말로
진정한 기적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가지 하나를 온전히 수확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시간과 애씀이 필요했던가.
씨앗을 묻고, 인내하며 싹을 틔우고,
목마를 때마다 물을 주고, 벌레를 떼어내고,
뜨거운 햇살과 비바람을 견딘 끝에 얻은 선물.
그리고 그 모든 시간을 나누었던 나와 식물 사이의 조용한 연대.

텃밭은 내게 거창한 진리를 가르쳐주지 않았다.
그러나 그 안엔 분명하고 작은 진실이 있었다.
삶은 끊임없이 썩고, 피고, 그리고 다시 태어난다는 것.
사라짐은 결코 끝이 아니라는 것.
그리고 모든 생명은 보이지 않는 끈으로 서로 연결되어,
함께 존재의 의미를 되물으며 살아간다는 것.

그 깨달음은 동양 철학이 말하는 순환의 세계관과도 닮아 있다.
시간은 흐르지 않고 돌며, 죽음은 탄생의 언덕이 된다.
모든 소멸은 다음 생의 출발점이다.

나는 이제,
가을 햇살이 스며드는 텃밭 한가운데 서서
온 마음을 다해 말할 수 있다.

기적이 아니면, 무엇이겠어요.
이토록 조용하고 묵묵하게
자신의 순리를 살아낸 생명들.
그리고 그 곁에서,
다시 살아갈 용기를 얻고 있는 나의 삶.
모든 끝은 새로운 시작이라는,
흙의 언어를 배우며.
이곳은 나의 영원한 배움터이다.




그리고 나는 문득 떠오른다.
흙 속에서 잊히지 않고 되살아나는 그 생명처럼,
나 또한 어느 날, 바늘을 들고 다시 일어섰다는 것을.
실 한 올을 꿰어 이어붙인 천 조각들이
나의 삶을 다시 짜고, 꿰매고, 기워냈다는 것을.

삶은 흙처럼 부서져도, 바늘처럼 이어질 수 있으니까.
다음은, 그 바늘 끝에서 피어나는 기적의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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