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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대와 실망의 소용돌이

by 몇몇

감정의 오르락 내리락에 이름 붙이지 않는 사람들은 많다. 때론 이름을 지어주지 않으면, 언급하지 않으면 존재하지 않는 일처럼 느껴질 때도 있다.

안타깝게도 그 느낌은 사실이 아니다. 우리가 언급하지 않고 인식하지 않으려 하면 할수록 그 존재감은 커진다. 치료하지 않으면 계속 번져나가는 피부병처럼 우리를 덮어 나간다.


어떤 날엔 기대한 것이 부끄럽고, 어떤 날엔 실망한 것이 수치스럽다. 이러한 '부끄러운' 마음들은 자꾸만 나의 현 마음을 인정하지 못하도록 한다.


기대하는 것, 실망하는 것, 부러워하는 것, 그 일련의 과정은 자꾸만 수치심 아래로 숨는다. 발견하는 순간 찍함을 마주할 것 같은 두려움이 더 깊숙이 밀어 넣고 참도록 한다.


그 과정은 어느새 소용돌이가 된다. 잔잔한 물속에 존재하는 그 소용돌이는 곁에 가까이만 가도 정신이 혼미하도록 지금을 집어삼킨다. 나의 기대와 가까운 근처에만 가도, 나는 이해할 수 없는 행동과 반응과 말을 하는 사람이 되어 있기도 한다.


어떤 날엔 차라리 최악을 상상하며 기대를 내려놓고자 한다. 그러면 실망도 작아지기에. 우리의 기대에는 소망이 담겨있고, 실망에는 아쉬움이 담겨있다. 하나하나 떼어 보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그 감정들이 모여, 모여, 커다란 소용돌이가 되는 것이다.


갑자기 소용돌이에 휩싸이게 되는 일들이 많아진 건 우리의 삶과도 연관이 있다. 내가 계획한 대로, 내가 마주하고자 하는 것만 마주하며 살아갈 수 없는 게 인생이지만, 현대 삶 속에서는 그 특성이 더욱 극대화되었다.


평온한 어느 날, 내 피드에 나타난 친구의 스토리가 나를 질투에 휩싸이게 하고, 나의 알고리즘을 통해 뜬 물건이 나를 실망으로 끌고 들어간다. 건강하게 나의 기대를 하나하나 살펴볼 수 있는 환경이 아니라, 나도 몰랐던 나의 기대들을 순간적으로 마주하고 기대-실망 소용돌이에 빨려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그럴 때 갑자기 물건을 구매하기도 하고, 갑자기 미래를 그리기도 하고, 갑자기 현실을 비하하기도 한다. 작스레 나빠진 기분에 몸 둘 바를 모르기도 한다. 이렇게 통제할 수 없는, 예측할 수 없는 괴로움은 아이들이 두려워하는 미지의 괴물과 다를 바 없다.


언제 어디서 빠져들지 알 수 없는 소용돌이. 어디서 어떻게 나타나 나를 뒤흔들지 모르는 괴물. 두려움이 커지면 커질수록 우린 몸을 사리고, 나를 들여다보는 일을 멈춘다. 갈등을 덮어두려 한다.


그때 소용돌이는 몸집을 불린다. 바로 그때 괴물은 덩치를 키운다.


그 두려움에서, 그 소용돌이에서, 그 괴물에게서 벗어나는 방법은 단 하나이다.


나의 기대를 아는 것. 내 욕구를 아는 것. 내가 뭘 원하고 있는지 바라고 있는지에 대해 내가 잘 알아주는 것.


단순히 알아주는 것에 그치지 않고 궁금해하는 것. 나는 왜 이런 기대를 할까. 나는 왜 이걸 원할까. 나는 어째서. 나에게 필요한 건 정말 무엇인가?


좋은 여행지는 쉼을 뜻하기도 하고, 과시할만한 물건은 인정을 뜻하기도 한다. 예쁜 가방은 관심을, 좋아요 수는 어떤 날에는 애정을, 어떤 날은 어울림을 의미할 때가 있다.


모든 요소는 저마다 다른 의미를 지니고 우리의 문을 두드린다. 우리의 기대와 우리의 실망이 알려주는 바가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소용돌이의 그 큰 에너지가 내 것이 된다면 얼마나 높은 파도를 타고 깊은 바다를 탐험할 수 있겠는가. 그 커다란 괴물을 길들여 친구로 만든다면 얼마나 더 먼 세계로 탐험을 나갈 수 있겠는가?


나의 실망이 가리키는 곳에, 내 기대가 머무는 그곳에 우리의 힘이 숨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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