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린 우리로만 세상을 살아왔기에 때때로 한계를 느낀다. 일반적으로 나와 다른 생각의 흐름을 경험하거나 결론을 경험할 때면 당황한다.
나라는 기준에 맞춰 상대를 설득하려 하기도 하고, 여러 질문을 통해 이해하려 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우리가 쳇바퀴 돌며 머무는 곳은 '나라면'의 틀이다.
나라면 그렇게 하지 않았을 텐데.
나라면 다른 판단을 했을 텐데.
나라면.
그러나 어떤 날에는 그 나라면이 무기가 되어 나와 상대방을 베어버리고 우리의 관계를 베어버린다.
나라면은 어쩌면 의미 없는 가정인 것이다.
너라면 어떻게 했을 거야? 질문 뒤에 따르는 답이 아닌 다음에야, 나라면은 조언이 될 수는 있을지언정 상대의 결정을 뒤집을 근거로는 충분하지 않을 수 있다.
나라면, 그 뒤에 따라올 수많은 문장에는 내가 경험한 역사가 있다. 매분 매초, 다르게 경험하고 나만이 겪은 일들이 있다.
마찬가지로, 그들에겐. 그들의 판단 뒤엔 그들의 역사가 있다. 그가 그런 생각을 한 것엔, 그런 느낌을 느낀 것엔, 그런 판단을 한 것엔 그의 역사와 그의 과거들이 영향을 주고 있다.
그러니 우리는 어느 때 건, 무엇에 대해서건 쉽게 말하지 못하는 현실에 있다.
직접 겪고 있는 일에 대해 나의 선택이 있다면 그들의 선택이 있다.
나라면, 이라고 서두를 떼는 일엔 이해의 깊이가 부족할지도 모른다.
'나라면'을 넣어두고 '너라서'를 꺼내자.
너는 그렇게 결정했구나.
너는 그렇게 생각했구나.
너는 그러고 싶었구나.
갈등 상황에서도 우린 가끔 선을 넘나 든다. 상대의 감정에 정당성을 빼앗고 다시 내 감정의 이유를 빼앗긴다.
나의 마음은 나의 마음인대로 옳고, 너의 마음은 너의 마음인대로 옳다.
네가 원하는 것과 내가 원하는 것이 늘 같을 수 없듯이.
네가 겪은 일과 내가 겪은 일이 같을 수 없듯이.
그러니 어느 순간, 나라면을 꺼내지 않고 마음깊이 공감할 수 있는 일들이 생길 때 우린 크게 감사해야 한다.
너와 나의 역사를 넘어 우리가 함께 공명한 것이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