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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막의 연금술사 Jan 22. 2022

걸어서 세계 속으로

카타르에서 런던까지 걸어간다고?

“나 오늘 런던까지 걸어갔다 왔잖아.”


이 말을 처음 듣는 사람들은 이게 무슨 말인가 싶을 것이다. 카타르에서 런던까지 걸어간다고? 그게 가능해?


하지만 이것은 승무원들의 용어이다.

‘어디까지 걸어갔다.’라는 의미는 목적지에 도착할 때까지 쉬지 못하고, 앉을 새도 없이 바쁘게 일을 했다는 의미이다.


손님 수가 많고 비행시간에 비추어 서비스가 많은 섹터들은, 승무원들에게 종종 걸어서 목적지까지 가는 경험을 하게 하곤 한다. 승무원들도 중간에 밥을 먹긴 하지만, 바쁜 비행의 경우 주로 비행이 끝나가는 시간, 기장님의 기내방송으로 인해 손님들이 잠에서 깨서 화장실을 가고 랜딩 준비를 하는 찰나의 5-10분 사이에 식사를 한다.


이 경우, ‘밥을 먹는다.’라는 말보다, ‘끼니를 때운다.’ ‘음식을 삼킨다.’라는 표현이 더 적절한데, 맛을 음미하는 것은 둘째 치고, 일단 짧은 시간 안에 식사를 해결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빠르게 먹는다.

나는 원래 성격이 급해서 밥을 빨리 먹는 편이었는데, 승무원 생활을 하고 나서는 더 빠르게 먹는다. 이게 건강에 매우 좋지 않다는 것은 알고 있어서, 비행 후의 식사나 오프 때 시간이 충분히 있는 경우에는, 여러 영양소를 고루 갖춰 천천히 식사를 하려 노력하는 편이다.


음식 이야기가 나와서 말인데, 기내식을 자주 먹으면 살이 많이 찐다. 비행 시 높은 고도로 인해 둔해진 미각 때문에 일반 음식보다 짜고 달게 만든다는 얘기도 있고, 혹시 모를 비상사태에 대비해 고열량으로 만든다는 설도 있으나, (무엇이 진짜인지는 나도 모르겠지만...) 무엇이 되었든 간에 살이 잘 찌는 건 확실하다. 요 근래 체중조절 중이라서 기내 음식을 먹지 않으려 노력하고는 있지만, 배가 고픈 상태에서 눈앞에 음식이 있으면 참기가 힘들다. 게다가 우리 회사의 크루아상과 디저트 케이크 류는 정말 맛있다. 순간의 허기에 눈이 돌아 비행 때마다 몇 개씩 집어먹었다가는 한 달도 채 되기 전에, 제철에 살 오른 방어처럼 오동통해진 뱃살과 마주하게 될 것이 불 보듯 뻔하기에 자중하는 중이다. 요즘은 대체품으로 바나나 혹은 단백질 음료(맛있는 걸로)를 챙겨 들고 다닌다.




나도 이제 슬슬 비행 4년 차를 향해 가면서 여러 곳을 걸어서 가보았지만, 그중에 단연 자주 걸어 다니는 곳을 꼽자면 ‘런던’을 빼놓을 수 없다. 도하에서 약 7-8시간 정도 걸리는 런던은 승무원들에게는 ‘걸어서 세계 속으로’를 찍게 되는 가장 유명한 취항지이다.


런던행 대부분의 손님들은 환승 손님이다. (다른 나라에서 도하까지의 비행 후, 도하에서 환승, 런던행 비행기를 탑승하는 경우). 이미 첫 번째 비행에서 충분한 수면을 취한 경우가 많아, 잠이 오지 않는 두 번째 비행인 런던행에서는 음식과 음료 서비스 요청이 많아진다. 서빙 횟수가 늘어날수록 손님들의 화장실 이용은 빈번해지고 기내의 쓰레기는 늘어나므로 더 잦은 화장실 청소와 기내 청소가 요구된다. 이 일들은 기본적인 서비스 외에 추가되는 것들이다 보니, 비행은 점점 바빠지고 런던까지 걸어가는 일이 자주 발생하게 되는 것이다.




입사 초 첫 런던 비행에서 나는 호텔에 도착하자마자, 샤워 후 무려 17시간을 내리 잤다.

잠을 잤다기보다 거의 기절했다는 게 맞을 정도로 한 번도 깨지 않고 잤다.


아무튼 이렇게 크루들 사이에서는 걸어서 가는 취항지 목록들이 존재한다.

크루들끼리의 정보교류가 매우 활발하기에 이런 정보들은 쉽게 구할 수 있다.

나도 나만의 목록이 있는데, 잘 모를 때는 몇 주 전부터 다른 크루들에게 물어본다.


“나 다음 주에 어디 어디 가는 비행 있는데, 비행 어때?”


나의 질문을 받은 크루가 씨익 웃으며 나의 어깨를 토닥인다.

아. 그녀는 말을 하지 않았지만, 나는 이미 대답을 들었다.


다음 주에도 나는 걸어서 세계 속으로를 찍겠구나.

어디에도 방영되지 않는 나만의 '걸어서 세계 속으로' 촬영은 그렇게 매번 계속되고 있다. 



*이전 이야기* https://brunch.co.kr/@a7lchemist/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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