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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막의 연금술사 Jan 15. 2022

내 거인 듯 내 거 아닌, 나의 로스터

중동 항공사 승무원의 로스터 이야기, 첫 번째 편

퇴근해서 돌아와야 하는 내 플랫 메이트*가 돌아오지 않는다. (우리는 매달 로스터를 공유한다.)

플랫 메이트(Flatmate) : 승무원의 숙소는 동료 승무원(국적과 직급에 무관하게 랜덤 배정/원하면 추후 신청해서 이사 가능하다.)과 함께 아파트를 공유하는 구조인데, 한국으로 치면 아파트 안에 있는 방을 한 개씩 갖고, 거실과 부엌은 같이 쓴다고 생각하면 쉽다.


처음에는 비행기가 연착되었나 했는데, 새벽을 지나 아침이 다 되도록 돌아오지 않는다. 슬슬 걱정이 되어서 연락을 해보았다. “어디야? 왜 안 와? 무슨 일 있어?”

얼마 후 연락 온 그녀가 말하길, 비행 갔던 취항지가 오미크론 바이러스 위험국으로 분류되어 도하에 도착하자마자 호텔로 격리 조치되었단다. 비딩*한 비행 나왔다고 그렇게 좋아하더니... 이 비행이 그녀의 발목을 잡을 줄 몰랐다.

비딩(bidding) : 다음 달의 가고 싶은 취항지를 신청하는 것


그렇게 그녀는 다섯 밤이 지나서야 돌아왔다. (5일간의 격리로 인해 로스터가 전부 다 뒤죽박죽 되는 것은 원치 않는 덤이다.) (호텔 격리는 오미크론 발생 초기의 일이며, 현재는 다른 시스템으로 운영된다.)




우리 항공사 승무원은 매달 23-25일 정도에, 다음 달의 로스터를 받는다.

그러나 그것이 확정된 스케줄이냐? 절. 대.로. 아. 니. 다.

항공분야의 특성상, 비행 스케줄은 매우 여러 가지 상황에 영향을 받는다.


그중 내가 지상직 시절 실제로 겪은 일들을 몇 개 나열해보자면,

전쟁 : 취항지에 전쟁이 나면 그 시간부로 비행기 운항을 전면 중지한다. 지상직 시절, 내전으로 인해 예멘행 비행기가 취소되었던 날을 나는 아직도 기억한다. 목적지를 잃어버린 손님들의 허망했던 표정과 이것만은 잃어버리지 않겠다는 듯 두 팔 가득 꼭 안고 있던 보따리 짐. 어떻게든 예멘으로 돌아가려는 손님들의 컴플레인으로 인해, 카운터는 아수라장이었다.

 날씨 : 출발지와 도착지의 태풍, 화산 폭발, 폭우, 폭설 등에 영향을 받는 것은 기본이고, 도하는 사막이라 모래바람까지 영향을 미친다. 실제로 몇 년 전에 모래바람이 심해서 모든 비행이 연착 및 취소된 적도 있다. 그때 나는 감기몸살로 인해 집에 있었는데, 집안까지 모래가 다 들어와서 (모래 입자가 너무 고와서 창문을 닫아도 소용이 없다.) 아픈 몸을 이끌고 하루 종일 모래로 뒤덮인 집을 치웠던 기억이 있다. 한바탕 모래와의 씨름 후, 화가 나서 커다란 비닐을 사다가 방 창문을 아예 막아버렸다.

화산 폭발 : 인도네시아 어느 지역인가에서 일어난 화산 폭발로 인해 가던 비행기가 되돌아오고, 스케줄 되었던 항공편이 취소된 경우도 있었다. 이때도 카운터는 아수라장이었다. 사람 키가 훌쩍 넘는 서핑보드를 옆에 두고, 하와이안 셔츠를 입은 채로 컴플레인하는 손님들이 꽤 많았다.

사건 및 사고 : 몇 년 전, 두바이 공항 활주로에 동체 착륙한 비행기로 인해, 그날 당일의 모든 두바이행 비행기가 취소된 적이 있었다. 그 당시 우리 항공사는 하루에 16번 정도의 두바이행 비행 스케줄이 있었고, 모든 비행기가 취소됨에 따라, 그날은 물론 며칠 뒤까지 꽤나 고생을 했다. 지상직 직원들의 안전을 위해 공항 경찰을 불러 옆에 세워두고 일을 할 정도로 카운터는 또다시 아수라장이었다.

기타 : 요새 같은 경우는 코로나(몇 년 전에는 메르스) 때문에 비행이 연기되는 경우도 있고, (기내 코로나 의심 손님 등) 예상치 못한 상황들로 인해 (비행기 결함, 기내 의료 응급상황, 카고 관련 문제 등 정말 어마어마한 수의 케이스가 있다.) 비행기가 연착, 회항 혹은 취소되기도 한다.


이럴 경우 당연히 해당 항공편에 타고 있던 승무원의 로스터는 변경이 된다.

한 비행기에서 문제가 생기면, 해당 비행 승무원들이 갖고 있던 다음 스케줄의 비행기에 영향이 생기고, 그 비행기는 다른 비행기에서 승무원을 가져오고, 또 다른 승무원의 스케줄이 바뀌고, 무한반복이다. (게다가 우리 항공사는 팀 비행이 아닌, 개인 스케줄이라서 각자의 비행 스케줄이 전부 다르다. 매 비행 때마다 다른 크루들을 만나게 되며 아주 간혹, 진짜 드물게 같은 크루를 다시 만나기도 한다.)


물론 SBY라고(스탠바이)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하여, 특별한 목적지 없이 정해진 시간 동안 공항 또는 집에서 대기를 하고 있는 승무원들도 있는데(비행처럼 랜덤으로 배정된다. 본인의 로스터에 스탠바이가 있는 경우도 있고, 없는 경우도 있다. 로스터 중에 하루 이틀, 길게는 5-6일까지 뜨기도 한다.) 그럼에도 워낙 많은 수의 비행기와 취항지를 운영하기 때문에 종종 발생하는 로스터 체인지는 막을 길이 없다.




로스터가 며칠 전에 바뀌는 경우도 흔하지만, 아무런 예고 없이 갑자기 변경되는 경우도 종종 발생한다. 저녁에 짐 싸고 자고 일어나서 비행 갈 준비 하고 있는데, 회사가 로스터 바뀌었다고 알려주는 건 약과인 편이고, 최악의 경우는 출근하려고 승무원 전용 공항에서 카드를 찍었을 때 (출근 확인 방식이다), 갑자기 내가 비행 가는 곳이 바뀌어있다던지, 크루 브리핑(=비행 전에 모여서 하는 미팅) 중에 다른 비행기로 옮겨진다던지... 더 최악의 경우에는 A행 비행기에 있다가, 손님들이 비행기에 탑승하기 전에 B행 비행기로 옮겨지는 경우도 발생한다.


코로나 전에 있던 일인데, 한겨울 유럽 비행에서 한여름 옷만 가져온 크루를 보기도 했다. 크루가 말하길, 자기는 동남아 비행을 갔었어야 했는데, 출근하고 나니 갑자기 유럽으로 바뀌어있었다고 한다. 반대의 상황으로 한여름 계절의 취항지에 한겨울 옷을 가져오는 크루도 발생한다. (이건 뭐... 밸런스 게임도 아니고...)


그러나 그게 이 직업의 특성 중 하나이다.

컴플레인해도 소용없고, 또 사실 때로는 이런 점 마저 즐기는 나 자신을 발견할 때도 있다.


나는 매우 계획형 인간인데(시간과 스케줄에 집착한다.), 가끔은 이렇게 내 통제를 벗어난 무계획적인 일들이 나의 모난 부분을 유하게 만들어 주지 않을까 하는 자그마한 기대도 한다. (매우 극단적인 방법이지만, 나름 효과는 있는 듯하다.)


이번 주만 하더라도 공항 스탠바이와 4일간의 스탠바이가 있어서, 공항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갑자기 몰디브를 다녀왔고, (스탠바이 종료 1시간 남기고 불려 갔다.) 남아있던 스탠바이는 말레이시아 비행이 배정되어,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나는 쿠알라룸푸르에 있다. 행선지를 알 수 없는 티켓을 들고 있는 듯한 불안함과 설렘이 공존했던 한 주였지만, 좋은 승객들과 크루들을 만나 편안한 비행이었고, 몰디브의 맛있는 해산물과 처음 와본 말레이시아의 음식을 즐기는 기회도 누리게 되었으니, 감사한 한 주이다.




누군가 말하길, 승무원의 시간은 비행기 속도로 지나간다던데, 눈 깜짝할 사이 벌써 1월의 중순이다.

일단 새해 첫 달의 반을 무사히 끝낸 것에 감사하며, 오늘은 잠시 정비하는 시간을 가져보려 한다.

쉬어가며 재정비하는 데에는 역시 음식이 최고다! 말레이시아에서 인기 있는 볶음면 요리(라고 쓰여있는 룸서비스 메뉴)로 여행 기분을 내며, 스스로에게 말해본다.


수고했어. 오늘도:) 힘 내보자! 내일도!! :)


오늘 호텔방은 좋은 뷰 당첨! 룸서비스를 시켜서 여유롭게 식사를 즐겼다. :)

*이전 이야기* https://brunch.co.kr/@a7lchemist/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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