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사막의 연금술사 Mar 11. 2022

나는야, 집순이 승무원

하아. 오늘의 비행도 정신없이 끝이 났다. 비행 후 호텔을 향해 가면서 *레이오버 플랜에 대한 승무원들의 대화가 이어진다. 그리고 그 질문은 여지없이 나에게도 돌아온다.


 레이오버 (Lay over) : 비행 간 곳에서 체류하고 오는 것. 짧게는 하루가 안 되는 레이오버도 있고, 긴 경우는 며칠씩 되는 경우도 있다. 참고로 나의 최단 기록은 11시간, 최장 기록은 3일이다.


 “*언니! 나 시티 가는데 같이 갈래? 언니 호텔 도착하면 뭐 할 건데? 같이 가자~”


언니 : 한국인 승무원들을 통칭하여 이르는 말. 특히나 오늘 비행에 한국인이 나밖에 없다면? 오늘 나의 이름은 무조건 ‘언니’이다. 사무장님도 부사무장님도, 직급과 나이에 관계없이 나를 ‘언니’라고 부른다. 문제는 가끔씩 남자 크루들도 나를 언니라고 부른다는 것인데, ‘누나’라고 교정을 해줘 봐도 잠시 뿐이다. 급하면 다시 ‘언니!’ 소리가 여지없이 기내에 울려 퍼진다.


나의 플랜을 묻는 크루들의 질문에 나는 당당히 대답한다.

“응! 오늘 나의 플랜은 호텔방 셀프 격리야.”




나는 집순이다. 집순이라고 하기엔 아이러니하게도 승무원이라는 직업을 가졌지만, 그럼에도 내가 집순이라는 사실을 부정할 순 없다.


주변 사람들은 왜 스스로를 가두냐고 하는데, 사실 집에 있는 순간이 나에게는 충전의 시간이다.

그리고 집에서도 할 게 진짜 많다. 나는 청소와 요리를 좋아해서 이 두 가지 만으로도 하루 온종일을 행복하게 보낼 수 있으며, 사실 이것 말고도 할 일이 무지무지 많다. 게다가 최근에는 내가 벌인 일들이 좀 많아져서 오프가 비행보다 바쁠 지경이다. (브런치도 한몫한다...)


그리고 아무래도 직업상 사람들을 많이 만나서 그런가, 비행이 끝나면 아무도 만나고 싶지 않다.

가끔 너무 힘든 비행 뒤에는, 아무 말도 듣고 싶지도, 하고 싶지도 않아서, 가족들에게조차 전화를 하지 않는 경우도 있다. 이럴 때는 몇 시간 혼자 조용히 있으면 다시 충전된다.




나는 집순이이지만, 새로운 도시에 도착하면 도시 탐방하는 걸 좋아하는데, 가고픈 장소나 카페에도 가고, 먹고 싶은 것도 먹고, 도시 구석구석을 나만의 템포로 혼자 구경하는 것을 매우 좋아한다. 그래서 나가게 되더라도 주로 혼자 돌아다닌다. (게다가 나는 낯을 좀 가리는 편이다. 그러나 비행 중에는 내 안에 또 다른 자아가 튀어나오는지 다행히 아무도 눈치채지 못한다.)


비행 전에 짐을 쌀 때는, 호텔 근처 및 도시 중심부에서 가보고 싶은 곳을 찾아보고, 호텔부터 도심까지의 거리가 너무 멀거나, 비행 갈 도시에 딱히 흥미를 느끼지 못하면, 잠옷만 챙긴다.


사람들은 직업이 승무원일 때 많이 돌아다녀야 좋은 거 아니냐고들 하는데, 비행 2년 이상이 되면, 비행 가는 곳이 슬슬 겹쳐지기 때문에, 그 도시에 갔을 때의 즐겨가는 식당이나, 쇼핑, 마사지받기 등 도시에 따른 본인만의 레이오버 패턴이 정해져 있고, 다음날 비행이 부담되기에 결코 여행자의 마음으로 편히 여행을 다닐 수 없다. 특히 레이오버 시간이 짧고 다음날 비행이 만석인 경우에는 무조건 잘 먹고 잘 자는 게 우선순위가 된다. 게다가 요즘같이 코로나가 기승을 부릴 때는, ‘뭐 꼭 이렇게까지 돌아다녀야 하나...’라는 내 안의 집순이 기질이 더 기승을 부린다.


이 기질은 베이스인 도하에서는 여지없이 아주 잘 발휘되는데, 나는 오프가 있어도 가끔 친한 친구들 몇 명만 만나고, 식료품을 사러 가는 경우가 아니면 잘 나가지 않는다. (사실 이마저도 이제는 온라인 주문을 선호하는 편이다.) 친구들도 다섯 손가락 안에 꼽을 만큼 한정되어 있어서 나의 패턴은 거의 (비행-숙소-동네 대형마트-가끔 친구로) 정해져 있다. 




장을 보고 요리하는 것을 좋아하지만, 오프가 짧을 때에는 식료품을 사는 것이 외려 낭비가 되기도 한다. 기껏 사다 놓고는 채 다 먹지도 못한 채 긴 비행을 다녀오면, 과일이고 야채고 다 상해서 결국엔 버리게 되기 때문이다. 식료품 사러 가는 교통비에 장보고 요리하는데 드는 시간까지 생각하면 가끔은 배달음식이 더 저렴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그래서 비행과 비행 사이 주어진 오프가 짧고 냉장고에 식재료가 없다면, 주로 음식을 주문해 먹고는 하는데 나는 아랍 음식을 좋아해서, 아랍식을 시켜서 먹는다.


한국으로 치면 배달의 민족, 요기요 등에 해당하는 음식 주문용 어플을 이용하면, 터키, 레바논, 이집트, 모로코, 튀니지 등의 아랍 음식들을 배달로 편하게 집에서 맛볼 수 있다. (이건 뭐 당연히 내가 중동에 있으니까 가능한 거지만, 배달을 시킬 때마다 신기하긴 하다.)


며칠 전 짧은 오프에도 나는 나가기가 귀찮아서 배달을 시켰다. 메뉴는 당연히 아랍식!

하루반 정도 되는 오프라서 3 끼니 식사+간식까지 한 번에 시켰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오늘은 긴 오프의 시작이기에, 어제 주문한 식료품을 오늘 아침 배송으로 한 아름 받았다. (내 돈 주고 내가 사는 것인데도 선물 받는 듯한 기분이 드는 것은 왜일까...)


이번 나의 오프는 주말과 겹쳐져서 (카타르는 금토가 주말이다. 이 이야기는 나중에 다시 다루도록 하자.) 어딜 가도 사람들이 바글바글 할 것이 뻔하니 더욱더 집에 있을 계획이다.


식료품 주문 앱과 배달앱, 노트북과 핸드폰만 있다면, 나의 오프는 행복하다. :)


이렇게 문명의 발전과 함께 나의 집순이 모드는 점점 진화되어간다.


왼쪽은 치킨 BBQ와 아랍식 피클과 빵, 오른쪽 위에서부터 Vine Leaves (포도잎에 싼 밥(?!)), 치즈 파이, Mix Grill (양고기, 닭고기, 소고기)

*이전 이야기* https://brunch.co.kr/@a7lchemist/13

*다음 이야기* https://brunch.co.kr/@a7lchemist/15


이전 04화 그 도시의 민낯은 나를 슬프게 했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