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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채 Aug 30. 2022

괴롭다는 건 성장하고 있다는 거야

| 나를 살리는 문장

스무 살. 성인이 되고 처음 맞이했던 생일이었다. 아주 큰 생일파티를 열겠다는 포부와는 달리 난 어느 타지에서 홀로 생일을 맞았다. 이게 어른이 되는 첫 관문인가, 하는 생각으로 호기롭게 하루를 보냈음에도. 잠들기 전 침대에 누워 조용한 핸드폰을 붙잡고 내가 어느 누군가에게 특별한 존재가 되었으면 좋았을걸. 하고 생각했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내 앞으로 편지가 한 통 왔다. 생일 축하 카드였다. 거기엔 많은 이야기들이 적혀있었는데 그중 한 문장은 5년도 더 지난 지금껏 쫓아온다.


“괴롭다는 건 성장하고 있다는 거야.”


나는 그 말이 좋았다. 괴로운 나는 번데기이고, 결국에 이 괴로움은 나를 나비로 만들어 줄 것만 같았으니까. 나는 기어코 괴로움을 딛고 성장해서 이 철장 없는 감옥에서 벗어나 훨훨 날아가겠노라 마음먹곤 했다. 그런데 나는 몇 년이 지난 지금도 성장하고 있는지 여전히 괴롭다.


이제는 그 성장이라는 단어가 조금 역하게 들리기도 한다. 얼마나 더? 여기서 뭘 더? 난 이제 더 이상 성장하고 싶지 않다. 그러니까, 더 이상 괴롭고 싶지 않다. 난 이만하면 충분히 성장했고, 이만하면 충분히 괴로웠다. 그러니 그냥 적당한 괴로움과 적당한 즐거움 사이를 오가면서 그저 평범하게 살고 싶다.


이런 글을 적는 내가 조금 건방지다 느껴진다. 어디선가 니체의 호통 소리가 들리는 것 같기도 했다. 어찌 고통 없이 삶을 살아가려 하느냐 다그치는 소리가. 자신을 알아가고 내면의 성장을 위해 밤낮으로 공부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눈앞에 펼쳐졌다. 내가 가진 성장이라는 편견의 벽을 느꼈다. 평범함이라는 아주 광활한 의미에 대해서도.

그 모든 편견을 주먹으로 통통 두들겨봤지만 부술 만큼의 힘은 가지지 못했다. 아직 나는 갈길이 멀었다.


성장엔 괴로움이 따른다. 무릎에 시큰한 통증을 달고 살며 일 년에 10cm씩 커가는 청소년들의 성장통처럼 우리는 커가며 비슷한 괴로움에 성장을 얹어 살아간다. 그렇다면 그 괴로움이란 곧 나의 여전한 성장을 의미하고 있다는 것 아니겠는가. 나의 가능성에 대한, 나의 온전한 미래를 위한, 내가 바라는 나의 후년을 위한 어떤 것들을 향한 욕망은 아직 살아있다는 것이고. 그것은 아주 작게나마 삶을 의욕적으로 만들 것이고. 그 의욕에 반해 따라주지 않는 의지들에 나는 괴로울 것이고. 그 무수한 괴로움을 거쳐 일구어내는 무언갈 통해 결국엔 성장한다는 것 아니겠는가. 그렇다면 사람의 괴로움도 그에 따라 함께 상향하는 성장도 우리는 한평생 함께 겪어나가는 것은 아닐까?


살아가는 것이 곧 고통인 사람이 있다면 난 이 문장을 선물처럼 안겨주고 싶다. -괴롭다는 건 성장하고 있다는 거야-  이 문장이 괴로움으로 닿지 않길 바라면서. 그리고 당신의 괴로움은 나약함의 상징이 아니라고 말하고 싶다. 그 괴로움은 곧 당신이 여전히 열정 있고 삶에 대한 책임감을 통감한다는 증거가 된다는 사실을. 괴로움에 한숨짓는 당신은 그 축 처진 어깨를 하고도 삶이라는 언덕을 한 단계 더 밟아 나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그저 무엇도 아닌 것 같았던 순간들이 쌓여 결국에는 이뤄진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싶다. 그러니 괴로움을 애써 외면하고 덜어내려 용쓰지 말고 우리 한 번 잘 견뎌보자고. 결국엔 성장하고자 하는 이 마음을 알아봐 주자고 말하고 싶다.


스무 살 생일 언저리의 늦은 밤. 선물과도 같은 문장은 여전히 나를 살게 한다. 누군가의 짧은 문장이 어떤 이의 삶에 남아 의미를 갖게 된다는 것의 경이로움을 나누고 싶다. 부족하지만 누군가의 괴로움을 쓰다듬으며 글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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