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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채 Sep 01. 2022

19년 어느 날

전부인 줄 알며 살았던 날들이 상처가 되어 고스란히 나에게 남았다. 어느 것 하나 힘들지 않은 게 없었다. 내가 바란 건 큰돈도, 엄청난 행복도 아닌 그냥 작은 이해들이 함께하는 조금 편안하고 안정된 삶이었을 뿐인데. 그것이 내 손에 절대 잡히지 않을 듯이, 형상조차 보이지 않았다. 아무런 행복이 존재하지 않는 시간을 보냈던 것 같다.

난 아주 작고 쓸모없는 존재이니, 수긍하고 받아들여야 한다. 힘이 없는 자가 신념을 가지면 멍청할 뿐이다. 난 잘하는 게 아니니 끊임없이 배우고 낮춰야 한다. 누군가에게 무엇을 말한들 진심으로 이해해주지 않는다. 우울한 삶을 벗어날 수 없다. 난 나에게 주어진 것들에 만족할 줄 모른다. 기대를 하는 나의 잘못이다. 사랑받을 수 없는 존재다. 예쁘지 않고 뚱뚱하다. 난 멍청하지만 껍데기만 번지르르해서 조금만 말하면 금방 들통날 테니 말을 줄여야 한다. 사람들은 나를 조금도 이해하려 하지 않고 깎아내리기 바쁘니 최대한 눈에 띄지 않아야 한다.

난 그곳에 있던 시간 동안 단 한순간도 나를 사랑하지 않았다. 내가 부족하지 않으면, 내가 날 낮추지 않으면 버틸 수 없었다.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이 많지 않다. 고객들은 눈앞에서 성화고, 뒤에는 대기하는 사람들이 짐짓 화가 난 표정으로 서있고, 전화는 끊기지 않고 울리고, 서류는 쌓여있다. 마음이 조급한 상황에서는 알던 것도 자꾸만 빼먹었다. 결국 그런 것들 하나 버텨내지 못하고 부족하게 서류를 받아내는 난, 꾸지람을 받고 혼났다.

옆자리 대리가 받아준 서류는 엉망진창이었는데, 그것을 다시 받으려다 고객과 큰소리가 나는 것도 여러 번이었고, 모르는 척하고 있는 대리를 보고 열을 식히는 것도 여러 번이었다.

점심을 먹으러 가기 전 모니터만 바라보고 그렇게 바쁘다를 입에 달고 사는 , 마치 자기들만 이 회사에서 일하는 냥 행동하는 대리 과장들에게 식사를 하시겠냐 물어봐야 했고, 여차해서 시간이 오버되면 입에 맞을 음식을 생각해 배달을 시켜야 했다. 배달시킨 음식이 늦으면 늦게 오는 음식을 시킨 내 탓이었고, 그 때문에 점심시간이 줄어들어 눈칫밥을 먹기 일수였다.


고등학교 졸업하고 정책이 좋아 회사에 들어온  잘한  같냐고 물었다. 네가 대단한 사람인  같냐고. 인사하는 모습이 버릇없다며 같이 배치받은 동기와 비교당했다. 자기 때는  힘들었다며, 요즘 힘든  힘든 것도 아니랬다. 그날 집에  울음소리가 새어나갈까 샤워기 아래에서 펑펑 울었다. 내가 이런 말을 들어야할만큼 무얼 잘못한건지 알 수 없었다. 또렷하게 충고해주는 어른도 없었다.  지역에선  이해해줄 사람이, 아니 나의 이야기를 들어줄 사람이   명도 없다는 생각에 사무치게 외로웠다. 침대에 누워 잠들기를 바라며 홀로 울던  시간에   번이나  자신을 다잡았다. 받아들여야 한다.   어른이 되려면  시간이 지나야 한다.


신입으로 맡은 일이 턱끝까지 차오를 때도, 내가 무슨 일을 해야 하는지 아무도 알려주지 않아 막막함에 몸서리칠 때도, 그런 말을 뱉는 것조차 실례일까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다들 바쁘고 힘들 테니, 내가 그런 말을 하면 안 되는 줄 알았다. 버티면 알아주겠거니, 열심히 하는 건 간부들이 다 알아줄 테니, 그렇게만 생각했다. 하지만 그렇지 않았다. 너무 벅차고 힘든데, 어디에 말할 곳이 없었다. 다들 이렇게 버티는 줄 알고, 너무 벅차다 칭얼대고 울어버리는 게 멍청한 건 줄 알고, 본인이 제일 멍청하다는 건 모른 채 버텼다. 이를 악물고 해냈다. 그래야만 하는 줄 알고. 욕을 먹어도, 말도 안 되는 지시를 받아도 그저 버텼다. 울지 않는 것이 대단한 줄 알고. 그냥 독한 사람이 될 뿐이었는데.


어떻게 그럴 수가 있었을까. 싶다. 나에게 단 하나의 행복도 허락되지 않았다고. 그 당시에 만났던 사람 모두가 최악이었다고. 단 한 명도 나에게 괜찮냐 묻지 않았다. 마음 맞는 사람 한 명이 없었다. 회사에서 마주치는 사람들 모두가 별로였고, 들어주려 하지 않았고, 도리어 물어보지도 않았으며, 일은 너무 벅찼고, 상사는 아주 호되게 혼냈다. 나를 깎아내리는 상황을 조성했고, 근로자를 존중할 줄 몰랐고, 회사가 먼저인 아주 구식의 사람. 다른 사람들 중엔 성희롱을 일삼는 이상한 사람, 뒷말을 하고 다니는 촉새, 위하는척하며 사실은 아무런 관심도 없는 사람들, 노조원들의 안위는 관심조차 없던 노조위원장, 간부만 챙기는 대리 과장들뿐이었다. 젊은 사람들 중엔 이렇다 친한 사람도 없었고, 남자 직원과 조금 붙어 다니면 이상한 시선으로 바라보기 일수였다. 내 곁엔 아무도 없었다. 그 지역에서 나에게 무슨 일이 생긴 들 나의 편을 들어줄 누구도 없었다. 맘 편히 저녁 먹을래요? 하고 물어볼 사람도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도 긍정을 찾을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매일 저녁을 울며 잠들고, 술에 의존하며 살았던 것 같다. 다들 그렇게 버티는 줄 알면서. 조금도 행복하지 못한 삶을 어떻게들 버티고 있나 궁금해하면서.

내가 긍정적이지 못해서, 우울함만을 찾아대서, 조금 더 살갑지 못해서 이런 상황이 벌어진 건 줄 알았다. 간부와의 마찰도, 사원들 간의 불화도 다 내 탓인 줄 알았다. 근데 아니었다. 중간에서 조율해주고, 제1인분을 하는 대리 없이 일을 했던 상황도, 남녀 직원 간에 이상한 분위기를 조성하는 간부들도, 아닌 척 혼자서 살 길을 찾던 동기도 하나같이 다 매정했다. 그 사이에 나와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이 한두 명만 더 있었더라면 이렇게까지 힘들진 않았을 텐데.


그때의 기억이 잊힐까. 이 분노가 사그라지는 날이 올까.

이제 갓 스물의 난, 내가 어른인 줄 알았다. 난 이제 어른이니, 선배이니, 그 노릇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난 그냥 어린애였을 뿐인데. 어른의 흉내를 내려니 보고 배울 어른이 하나 없는 곳에서 올곧은 어른 흉내를 내려니 마음이 부서지고 다쳤다. 그런 마음을 다잡아줄 사람이 한 명도 없는 타지에서 매일을 울고 다친 마음을 쓸어 담아 안고 잠들며 주말을 기다리는 시간을 보낸 것이다. 나의 가족이 있는, 나의 친구가 있는, 내 이야기를 들어주는 나의 편이 있는 그곳에 갈 날만 기다리면서, 매일 저녁을 그렇게.. 나를 안쓰러워할 줄도 모른 채 그렇게 사는 것만이, 버티는 것만이 정답인 줄 알고 그렇게...


이곳에 와보니 알겠다. 그때의 상황은 정말 최악이었구나. 사람들이 정말 별로였구나. 진짜 지독하게도 별로였구나. 내 잘못이 아니었구나. 난 그렇게 별로가 아니었구나. 나 되게 안쓰러웠구나.


내가 앉을자리를 청소하고, 꾸리고, 정리하였다. 앉은자리에서 어떤 업무를 봐야 할지 머리가 복잡했지만 내색할 수 없었다. 사적인 이야기가 오가기엔 너무도 시끄러웠던 그곳과는 달리 여긴 조용했다. 시시콜콜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키득키득 웃을 수 있었다. 그런 편안한 환경에 있으니 나 또한 유해졌다. 애초부터 날이 선 사람이 아니었던 내가, 그 모습을 점점 찾아갔다.

나의 일이 조금씩 손에 잡히면서 목소리에 힘이 들어갔다. 본래 일을 해왔던 것처럼, 최선을 다하진 않더라도 최대의 결과가 나올 수 있도록 노력하는 것, 모르는 것을 인정하고 배우려 하는 것, 고객과 과열된 감정을 다른 사람에게 옮기지 않는 것. 나는 본래 하던 대로 해왔을 뿐인데 ‘잘한다.’는 칭찬이 돌아왔다. 2년 동안 나 스스로 끊임없이 던지며 무너져가는 날 붙잡던 외침이 누군가에 의해 귓가에 음성으로 흘러들어왔다.


그 시절 잘한다 고생했다는 말 한마디를 고파했던 나 자신이 너무 안타까워 마음이 저리다.

그냥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나한테 ‘괜찮냐’ ‘일이 너무 많은 것 같다’ ‘힘든데 저녁 한 끼 같이하자’ 하고 말해주는 사람이 한 명이라도 곁에 있었더라면 내가 좀 더 나아지진 않았을지. 곁에 가족이 있었더라면, 혼자 있는 시간이 조금 덜었더라면 괜찮지 않았을지.




우울함에 허우적거리던 22살의 어느 날 적어 내려 간 글입니다.

감정적이고 사적인 이야기이기에 묻어두려 하였으나 그 무엇보다 저의 상황과 감정이 잘 드러난 것 같아 이 글을 초입에 담습니다. 제가 우울함에 빠져 허우적거림을 알았을 때는 닥쳐있는 상황이 최악일 때가 아니었습니다. 그 상황보다 나은 상황을 마주했을 때, 비로소 제가 깊은 슬픔을 껴안고 있음을 알아차렸습니다. 어쩌면 평범한 삶을 사는 사람들이 한 번쯤은 마주쳤을 상황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마주 보기 어려운 상처들을 낯낯이 들쑤시는 것이 감정적으로 무척 어렵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아질 수 있는 첫 발걸음이 될 수 있음을 알리고자 글을 나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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